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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비평]한국에서 요가 수련의 경향과 전망
[기획비평]한국에서 요가 수련의 경향과 전망
  • 이거룡 서울불교대학원대
  • 승인 2006.10.30 22: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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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가 아닌 ‘정신’…체험 기반의 연구 필요

이거룡 교수
요즘 우리 주변에는 요가(yoga)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높다. 관련된 책이나 비디오 자료도 많이 나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관심은 요가의 본고장인 인도뿐만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보기 어려운 현상이다. 한 집 건너 요가센터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지금도 우후죽순처럼 요가센터가 생겨나고 있으며, 전국에 2백 개 이상의 체인을 지닌 기업화된 요가센터들도 여럿 있다. 최근에는 종교적 수행전통뿐만 아니라 의학, 심리학, 체육학, 예술분야 등에서도 요가를 수용하고 있으며, 무용이나 성악을 하는 사람들, 심지어는 초등학생들의 '태권도교실'에서도 요가를 배운다.

이와 같이 국내에서 요가열풍이 일고 있는 것은 무엇보다 우리 사회의 물질적인 풍요와 관련된다. 이 점은 근세 이후 요가에 대한 관심이 인도보다는 물질적인 풍요를 먼저 이룬 서구나 일본 그리고 최근에는 우리나라에서 고조되고 있다는 점에서도 분명하다. 사실 요가의 본고장인 인도사람들의 대부분은 요가에 큰 관심이 없으며, 오늘날 인도에서는 우리나라에서 보는 ‘요가 붐’은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아직도 가난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물질적인 풍요를 성취하게 되면, 그 다음의 관심사는 자연히 정신세계로 옮겨 가기 마련이다. 물론 물질적인 풍요가 정신세계의 풍요를 위한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다. 갑작스러운 물질적인 풍요는 오히려 정신세계의 황폐로 이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질적인 풍요가 정신세계의 풍요를 위한 필요조건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이런 점에서 지금 우리는 정신문화의 풍요냐 황폐냐의 기로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국내에 요가가 전해진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물론 이미 통일신라시대에 瑜伽行派 불교가 전해지면서 요가가 전래됐다고 본다면 그 역사는 길다. 그러나 인도로부터 직접 요가라는 이름으로 국내에 전래된 것은 길어야 50년이다. 우선 학계를 중심으로 인도철학 전공자들이 요가를 배우고 가르쳤다. 빠딴잘리(Pata?jali)의 ‘요가수뜨라’(Yogas?tra)를 근본경전으로 하는 요가학파뿐만 아니라 인도사상의 모든 학파들은 요가를 수용했다. 인도사상의 궁극적인 목표는 '너 자신을 알라'는 것이 아니라 '너 자신을 실현하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존재 자체의 전환이 따르지 않는 공부는 다만 추상적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우리나라의 인도철학전공자들은 일찍이 요가수련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스스로 요가의 수련을 실천하고자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도철학 전공자들이 대체로 요가의 실천수행보다는 이론적인 측면에 기울어져 있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국내에서 일찍이 요가에 관심을 보인 다른 한 부류는 이른바 수행자들이다. 이들은 요가의 이론적인 측면보다는 실천수행에 초점을 두고 대개는 한국이나 동아시아 전통의 수련법과 관련해 요가를 수용했다. 요가의 본질이 삼매의 ‘체험’과 깨달음이라는 점에서 보면 이들의 접근은 상당히 긍정적이었지만, ‘요가수뜨라’, ‘하타요가쁘라디삐까’(Ha?hayogaprad?pik?), ‘게란다상히따’(Ghera??a-Samhit?), ‘쉬바상히따’(?iva-Samhit?) 같은 산스크리트어로 된 요가 원전을 직접 접하고 이해할 수 없는 한계를 보였다. 학자들은 요가 수련의 체험이 부족한 반면에 이른바 수행자들은 정통요가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원전에 대한 접근이 어렵다는 문제점이 있었던 셈이다. 따라서 체험에 바탕을 둔 요가의 학문적 연구는 거의 없었으며, 더욱이 사회현상으로서의 요가 붐에 대한 비판적인 분석이나 앞으로의 전망을 제시하는 연구는 시도되지 못했다. 물론 인도철학 연구자들 중에는 오히려 수련에 중점을 두는 학자들도 있지만 그 수는 많지 않다. 다행히 최근에 들어 이론과 실천을 겸비한 요가수련자/학자들이 증가하는 추세이며, 앞으로 체험에 토대를 둔 요가의 학문적 연구가 활발히 이뤄질 것으로 본다.

요즘 우리 주변에는 이름만 요가일 뿐 실상은 전혀 요가라 할 수 없는 정체불명의 수행법들이 난무하고 있다. 요가의 목적은 마음을 맑고 고요하게 해 삼매를 성취하는 것이지만, 요즘 유행하는 요가는 본래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르게 변질됐다. 물론 ‘원형’에 가깝다는 것과 그렇기 때문에 ‘보다 우수하다’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다시 말해 인도의 요가고전에서 가르치는 행법을 있는 그대로 가르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것이다. 시대와 장소에 맞게 얼마든지 창조적으로 계승될 수 있으며, 또한 그래야 참으로 살아있는 수련법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즘 접하게 되는 상당수 요가는 말이 요가지 실은 요가가 아닌 게 많다.
이 문제는 요가의 본고장인 인도나 서구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지만, 특히 최근 우리나라의 수련현장이 심각하다. 국내의 요가는 신체수련 중심의 ‘하타요가’(ha?hayoga)에 지나치게 집중돼 있다. 그것 또한 하타요가의 본질에서 완전히 벗어난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령, 아사나(?sana, 체위법)를 체조하듯이 하는 것이나 근육과 관절의 이완에만 초점을 두는 스트레칭, 그리고 호흡 수행을 등한시하는 것 등은 올바른 하타요가라 할 수 없다. 아사나가 극단적이고 자극적으로 변해가는 점, 일차적으로 서구에서 변질된 요가가 아무런 여과과정 없이 국내에 직수입되는 점 등도 심각한 문제다.

사실 인도에서도 요가는 13~17세기에 신체수련 중심의 하타요가로 변형되면서 대중화되고 서구에 널리 알려지게 됐으며, 이 과정에서 ‘마음작용의 지멸’(cittav?tti nirodha)을 통한 ‘해탈의 실현’이라는 요가 본래의 목적이 뒷전으로 밀려난 감이 없지 않다. 요가수련 형태의 변형과 대중화는 시대적인 요청이라 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 개별수행의 성격이 강한 요가수련이 오늘날처럼 집단화, 대형화되면서 나타나는 문제점도 적지 않다. 특히 국내의 경우 하타요가 중심으로 요가가 대중화되는 과정에 자격 미달의 요가지도자를 대량으로 양산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지난 몇 년 사이에 ‘요가원 창업’은 이른바 ‘뜨는 업종’이 됐으며, 급증하는 수요에 부응하기 위하여 단기간의 요가지도자과정이 아무런 자격기준이나 제한 없이 개설되고 있는 실정이다.

요가가 수련보다는 치유라는 측면에서 접근되고 있는 점도 반성의 여지가 있다. 인도에서도 이른바 ‘치유를 위한 요가’(yoga therapy)는 이미 오래 전에 ‘응용요가’의 주요 분과로 인식되고 있지만, ‘요가 치유사’의 자격 문제가 분명하지 않은 국내 실정에서는 심각한 사회문제를 야기할 가능성이 있다. 이미 자격 없는 ‘요가 치유사’들의 병폐가 날로 심각해지고 있으며, 이는 국내 요가 수련문화 전체의 이미지에 상당한 손상을 야기하고 있다. 치유를 위한 요가의 결과가 과대 포장되는 것도 문제다. 특히 다이어트나 미용과 관련해 심각하다.

요가수련 문화의 질적 향상을 위해 최근에는 인도의 요가지도자나 수행자들이 직접 와서 요가를 가르치는 사례가 많아지고 있다. 유명 인사의 일회성 특강뿐만 아니라 장기간(6개월~1년) 특정 수행처나 요가학과가 있는 대학에 머물면서 요가를 지도하는 등 그 유형도 다양해지고 있다. 아직 시작단계이긴 하지만 우리나라와 인도의 대학 간 요가관련 학점교환을 위한 국제교류협정을 체결하거나 인도 요가대학의 한국분교를 모색하는 경우도 있다. 이 같은 일들은 우리나라의 요가수련문화를 한 단계 끌어올릴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지만, 이에 따른 여러 가지 문제점도 적지 않은 것 같다.

요가는 시대와 장소에 따라서 늘 변해왔다. 이와 같은 변화는 당연하다. 5천여 년 전 인도에서 시작된 요가가 지금 이 시대의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그대로 적용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모든 수행전통에서 원형의 보존은 중요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의 실정에 맞게 원형을 창조적으로 계승 발전시키는 것도 이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요가는 궁극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체형 및 체질에 맞게 수용될 필요가 있으며, 이 과정에서는 우리민족 고유의 수련법이 참조돼야 할 것이다.

이거룡/ 서울불교대학원대·인도철학

필자는 델리대에서 ‘라마누자와 화이트헤드의 유기체적 세계관에 대한 비교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구도자의 나라’, ‘아름다운 파괴’ 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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