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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출된 弱者들…드라마인가 다큐인가
노출된 弱者들…드라마인가 다큐인가
  • 박수진 기자
  • 승인 2006.10.30 17: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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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체비평]장수하는 휴먼다큐 ‘인간극장’(KBS 2TV)

36살 초로기 치매에 걸린 아내이자 엄마를 둔 가족의 이야기(‘사랑해, 기억해’ 편), 늙은 어머니를 위해 발바닥에 땀나도록 뛰어다니는 앞 못 보는 아들의 이야기(‘어디가세요, 봉삼씨’편) 등 보통 사람이지만 아픔을 간직한 이들의 삶의 진솔한 모습이 주는 감동이 매일 밤 9시부터 25분 간 텔레비전 브라운관을 채운다.

매체비평가인 전규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가 “눈물을 흘리며 본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라고 고백하는 프로그램 KBS ‘인간극장’은 2000년 5월 첫 방송을 시작해 6년이 넘도록 프로그램을 지속하고 있다. 일일시청률도 꾸준히 ‘탑10’에 든다. ‘다큐’ 프로그램으로서는 고무적인 시청률이며 지속성이다. 전규찬 교수는 “주변부, 혹은 그 경계에 있는 인물들에 관심을 두는 시선과 이 시선을 유지하며 방송을 지속해왔다는 점이 가장 평가할 만하다”라고 말했다.

정체된 내용, 정형화된 형식 탈피해야

‘인간극장’이 많은 이들의 호응 속에 장기 방영될 수 있었던 요인은 뭘까. 많은 이들은 그 ‘드라마적 속성’을 꼽는다.

우선은 ‘내러티브’ 상에 극적인 요소가 많이 포함돼 있다. 10월 23일 1부를 방송한 ‘사랑해, 기억해’ 편에는 초로기 치매에 걸린 주인공의 친정 어머니가 방문해 때마침 사위에게 이혼할 것을 권유하는 등 적절한 타이밍에 ‘사건’이 등장한다. 9월 4일부터 8일까지 5부작으로 방영한 ‘돌아와요 선옥씨’ 편에서는 8년 전 이혼한 부부가 딸들의 도움, 또 서로의 노력으로 재결합하는 과정이 방영된다. 서현석 연세대 교수(방송·영상)는 “이러한 서사적 구조를 갖고 있기에 보는 사람이 감정이입하기 쉽다”라고 설명한다. 드라마를 좋아하는 이유와 같은 이유로 ‘휴먼 다큐’를 좋아한다는 것.

시청의 호흡이 짧아진 경향을 고려해 30분씩 끊어 5부작 형태로 방영하는 것이나 다음날 내용의 ‘하이라이트’를 미리 보여주는 예고편도 시청자의 시청 경향을 고려한 ‘인간극장’의 특징이다.

영화적 기법도 많이 사용된다. 한 장소에서 ‘샷(shot)’을 나누어 찍는다거나, 동시에 일어나는 상황을 카메라 두 대로 같은 시간에 찍어서 교차편집을 하는 것 등은 영화적 기법이다. ‘미워할 수 없는 그녀, 낸시 랭’ 편에서는 시간 순서를 뒤바꿔서 편집하기도 했고, ‘돌아와요 선옥씨’ 편의 연출된 듯한 설정과 대화내용, ‘지선아, 사랑해’ 편에서 엄마와 지선씨의 대화 장면이 두 개의 샷으로 구성된 점 등도 연출의 예다. 이호은 청운대 교수(영상커뮤니케이션)는 “‘연출’된 부분은 수없이 많다”라며 “수업시간에 ‘인간극장’에서 연출된 부분 찾기’라는 과제를 내기도 한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영화적 기법, 드라마적 방법의 차용에 대해서는 ‘사실의 조작’이라고 보기보다는 ‘다큐멘터리의 진화’라고 보는 추세다. 이 교수는 “요즘은 ‘드라마’, ‘다큐멘터리’라고 장르 구분을 하기 보다는 다큐멘터리를 영화의 하위 장르에 집어넣고 ‘픽션’과 ‘논픽션’을 구분한다”라고 말한다. 영화적 기법을 통해 현실을 더 잘 전달할 수 있다면 ‘조작’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MBC ‘포토에세이 사람’ 등을 연출한 프리랜서 프로듀서 김원중 씨도 “피터 왓킨스(P. Watkins)의 ‘퍼니시먼트 파크’ 같은 경우 보는 사람이 이야기 전체가 ‘사실만을 찍은’ 다큐멘터리 상황인 줄 알다가 프로그램이 끝나고 자막이 올라갈 때에야 모두가 출연자와 짜고 연출한 사실임을 알게 되는데 이 때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세상에 진정한 진실이란 건 없다’라는 진실을 보여주는 것이고 이는 대표적 다큐멘터리 장르로 분류된다”라고 말한다. 김원중 씨는 “인간극장이 이런 식의 실험적 시도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연출적 요소를 통해 오히려 더 진실된 현실태를 전달할 수 있는 부분도 있으므로 그런 촬영기법 자체를 비판할 이유는 없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인간극장’은 지금 정체된 형식으로 인해 ‘위기’의 징후를 보인다는 진단이 많았다. 김원중 씨는 “‘인간극장’의 문제는 드라마적 기법이라기 보다는 정체된 형식이다”라고 말한다. 다큐멘터리라는 장르는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독특한 관점이 드러나야 하는데 ‘인간극장’은 형식은 일정한 채 ‘서민’이라는 같은 범주의 다른 내용을 지닌 소재만 바꿔 끼우고 있으며 그 대상을 바라보는 시점, 관점은 한 치도 변화가 없다는 것. 김원중 씨는 “한국에서 방송 다큐가 독립 장르로 정착되지 못하고 저널리즘 속에서 형성됐기 때문이다”라고 이유를 설명했다.

서현석 교수도 “다큐멘터리는 ‘무엇을 찍느냐’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찍느냐’ 역시 중요하다”라며 “‘인간극장’이 지금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려면 제작자들이 ‘어떻게’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지금은 대상이 있고, 이 대상이 부닥치는 문제가 있고 이를 해결하는 과정으로 마무리되는 기승전결 구조가 동일하게 반복되고 있다. 또한 “주제별로 휴먼 다큐, 건강 다큐, 자연 다큐 등으로 분류했을 때 시청자들이 인식하기 쉬워 시청률 형성에 유용하겠지만 이런 분류를 뛰어넘는 시도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인간극장’에 대한 초기의 학계의 관심은 ‘참여관찰자적 태도’를 새롭게 시도하는 등 제작자의 역할 등에 대해 성찰하는 모습이 보였지만 지금은 기계적으로 소재만 찾는 모습이 많아 ‘휴먼 다큐’라는 상업적 장르로 안주하는 것이 아쉽다는 것.

‘총을 들지 않는 사람들’, ‘708호 이등병의 편지’ 등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대상으로 다큐 영화를 만들어온 김환태 감독은 “‘인간극장’이 이렇게 정형화된 다큐를 생산해냄으로써 결국 수용자에게 ‘다른’ 다큐멘터리를 고민하지 못하게 하거나 다큐멘터리의 형태를 고착시키는 의도하지 않은 문제점도 있다”라고 말했다.

사회적 약자를 주되게 다루지만 그 시선의 보수성도 문제다. 김 감독의 작품 ‘708호 이등병의 일기’의 주인공은 이라크 파병을 반대하며 양심적 병역거부를 선언하고 결국 구속된 이등병 강모 씨였다. 이 때 한 지상파 방송 휴먼다큐 팀도 함께 그 과정을 촬영해 30분짜리로 방영을 했는데 “개인이 이런 결심을 하게 되기까지의 진지한 고뇌, 결정과정을 다루기보다는 그 병사 어머니의 눈물, 어머니와의 관계를 다루는 데 더 중점을 둬서 아쉬웠다”라고 김 감독은 말했다. 현행법상 ‘범법자’를 긍정적으로만 다룰 수 없는 지상파 방송의 한계이기도 하고 30분이라는 시간의 한계이기도 하다는 것이 김 감독의 설명이다.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 내레이션”

‘어떠한 역경도 가족의 힘으로 헤쳐 나갈 수 있다’라는 가족주의적 가치관이나 ‘어떠한 장애도 개인의 노력으로 해결할 수 있다’라는 메시지 등도 ‘휴먼 다큐’의 고정된 가치관이다.

보는 이의 해석의 여지를 닫아버리는 과도한 내레이션도 진부한 다큐멘터리적 형식 중의 하나이지만 변하지 않고 지속되어 온 것 중 하나다. 특정 상황에 대해 “○○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모른다”라거나 “○○는 마음이 아팠다”는 식의 제작자 마음대로 해석하는 내레이션은 단편적인 시선을 주입하는 걸 넘어 관찰하고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다.

‘통로’ 등의 작품을 찍어온 거장 다큐멘터리 감독 크리스 마르케는 같은 장면에 대해 세 개의 내레이션을 씀으로써 똑같은 장면에 대해 다양한 입장을 전달하기도 했다. ‘시청률’을 감안해야 하는 텔레비전 다큐로서 이런 식의 시도가 힘들 수는 있겠지만 적어도 형식에 대한 고민은 필요하다는 것.

전규찬 교수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같은 역사 다큐물은 제작자들 스스로 토론회도 열면서 역사 다큐의 형식 등에 대해 학술적으로도 고민을 하는데 학자들도 ‘휴먼 다큐’를 저급한 다큐 쯤으로 여겨 연구하지 않는 경향이 있고 제작자 스스로도 ‘형식적 전환’에 대한 고민을 하지 않는 것 같다”라며 “6년이라는 지속성은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으므로 이제라도 형식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박수진 기자 namu@kyosu.net

□ 인간극장 '사랑해, 기억해' 편(10.23~30 방송). '초로기 치매'에 걸려 단어도, 자신의 이름도 잊어 완전한 말을 하기도 힘들어진 서른 여섯 나연씨의 일상, 그런 엄마를 웃게 하고 약 안 먹는 엄마를 달래는 다섯살짜리 꼬마의 엄마되기, 남편의 안타까움과 고민 등을 담은 내용이 시청자들의 마음을 적시고 있다.

□  '돌아와요, 선옥씨' 편. 8년간 떨어져 산 부모님의 재결합을 위해 머리를 짜는 충북 충주 세 자매 이야기. “다큐멘터리는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독특한 관점이 드러나야 하는데 ‘인간극장’은 형식은 일정한 채 ‘서민’이라는 같은 범주의 다른 내용을 지닌 소재만 바꿔 끼울 뿐 관점은 한 치도 변화가 없다는 비판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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