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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의 화장법
적의 화장법
  • 최승우
  • 승인 2024.01.31 21: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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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멜리 노통브 지음│박철화 옮김│문학세계사│140쪽

프랑스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 아멜리 노통브Amelie Nothomb

잔인함과 유머가 탁월하게 어우러진 작품으로 현대 프랑스 문학에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벨기에 출신의 작가. 본명은 파비엔 클레르 노통브이며 1967년 일본 고베에서 태어났다. 외교관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일본, 중국, 미국, 방글라데시, 미얀마, 영국, 라오스 등지에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냈다. 스물다섯 살에 발표한 첫 소설 『살인자의 건강법』(1992)이 ‘천재의 탄생’이라는 문단의 찬사를 받으며 단번에 10만 부가 팔리는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발표하는 작품마다 화제를 낳았고 지금까지 노통브의 작품은 전 세계 1천6백만 부 이상 판매되었다. 『두려움과 떨림』(1999)이 프랑스 학술원 소설 대상을 받으며 작가로서의 입지를 굳혔고 그 외에도 르네팔레상, 알랭푸르니에상, 자크샤르돈상, 보카시옹상 등 수많은 상을 받았다.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매년 거르지 않고 한 편씩 작품을 발표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2015년 벨기에 왕국 남작 작위를 받았으며, 현재 브뤼셀과 파리를 오가며 작품 활동을 이어 가고 있다. 최근 노통브는 『갈증』(2019)으로 공쿠르상 최종 후보에 오르고 『첫 번째 피』(2021)로 르노도상을 수상해 대중성과 더불어 그 문학성을 다시금 인정받고 있다. 아멜리 노통브는 단연 출판가에서 “하나의 현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중자아Le double 사이의 불편한 모노드라마

『적의 화장법』을 번역한 문학평론가 박철화는 아멜리 노통브의 『적의 화장법』이 소설이라기보다 모노드라마에 가깝다고 설명한다. 실제로 대화체의 서술방식도 드라마에 가깝다. 그런데도 이 작품이 소설일 수 있는 점이 바로 작가로서 노통브의 재기와 존재에 대한 통찰이 빛나는 대목이다. 모노드라마는 자칫 지루하고 단조로울 수 있다.

그런데 노통브는 이런 형식의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면서 이중자아Le double 사이의 대화로 이야기를 변주한다. 독자는 예고도 없이 처음부터 불편함과 낯섦에 부딪친다. 텍스토르 텍셀이란 이름의 화자는 공항에서 출발이 미뤄진 비행기 탑승을 기다리는 한 남자에게 다가가 불쑥 대화를 시도한다. 대화라고는 하지만 상대는 그것을 원치 않았기에 집적거림이었으며, 둘 사이의 대화는 차츰 텍셀의 일방적 스토킹과도 같은 폭력으로 변한다.

처음에는 그저 편집증적 미치광이의 비규범적 일탈인 줄 알았던 이야기는 강간과 살인의 고백으로 폭력적 변모를 겪는데, 독자에겐 이 순간이 고비다. 대체 이런 더러운 이야기를 왜 계속 듣고 있어야 하나? 라는 질문에 시달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작품 속에서 텍셀의 대화 상대가 처해 있는 상황이기도 하다. 그는 텍셀과의 대화를 한사코 거부하며 넌덜머리를 내지만 그러면서도 조금씩 그의 이야기에 동참하게 된다. 사실 인간은 이중적 존재다. 천사의 환한 면모와 악마로서의 어두운 속성을 함께 갖기 때문이다. 텍셀의 대화 상대가 진저리를 치면서도 그의 강간과 살인에 호기심을 느끼며 이야기에 빠지는 이유가 그것인데, 독자도 마찬가지로 이 더럽고 끈적한 이야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힘겹게 끌려간다. 

노통브가 짜놓은 이야기는 독자가 정교하게 준비된 극적 퍼즐을 하나씩 채워나가다 어느 순간 존재의 심층에 대한 발견에 닿도록 이끈다. 둘 사이의 대화가 한 인간의 머릿속에서 벌어진 모노드라마였다는 점이 형식의 차원이라면, 지극히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내면에 강간과 살인을 저지를 위험, 심지어는 그 범죄를 합리화하고 동경하는 악마적 속성마저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는 내용 차원의 깨달음이 그것이다. 

인간이 강인한 천사인 동시에 악마적 유혹 앞에서 쉽게 무너지는 연약하기 짝이 없는 이중적 존재라는 이야기가 새로운 것은 아니다. 다만 노통브는 서양 기독교 문명의 이 오랜 주제를 모노드라마 형식에 담아, 태연하지만 짓궂은 목소리로, 당혹스럽게 불쑥 우리 앞에 들이미는 데 성공했다. 따라가기 불편하지만 그래서 한편으론 흥미로운 드라마이다.

옮긴이 박철화는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파리8대학에서 석사를, 파리10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마쳤다. 1989년 월간 《현대문학》에서 평론을 발표하며 평론가로 등단하여 『감각의 실존』, 『관계의 언어』, 『문학적 지성』, 『관계의 시학』 등의 평론집을 냈다. 중앙대학교에서 문학이론과 평론을 가르치기도 했다. 

전체가 대화로 이어지며,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소설!

아멜리 노통브의 열 번째 작품 『적의 화장법』은 전체가 대화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자전적 소설 『두려움과 떨림』과 『튜브의 형이상학』 이후, 그녀는 이번 작품을 통해서 『살인자의 건강법』과 『반박』의 맥락을 다시금 되살리고 있다. 대화는 그녀의 관심사다.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줄줄이 꿰고 있는 이 소설가에게 수사학은 아무런 문제가 안 된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은 명료하고 정확하며, 어떤 문장도 허술한 구석이 없다. 그런 점에서 그녀는 프랑수아 사강의 일면을 갖추고 있다.

마치 레고를 가지고 놀듯 그녀는 말을 가지고 누르고, 들어 올리고, 뒤집으며, 때로는 끼워 넣는다. 거침없는 대화체 문장들이 연속해서 이어지는 모습은 마치 권투 시합에서 선수끼리 서로 치고받는 반격의 연속처럼 느껴진다. 또는 소크라테스의 대화처럼 옳고 그른 진영의 치열한 공방전과도 같다. 다만 이 소설에서는 그 옳고 그른 진영이 서로 혼동이 되고, 끝내 피아彼我가 뒤섞인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한마디로 전체가 대화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범상한 통념에서 시니시즘이 번득이는 아이러니한 단장에까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언어의 결투장이 된다.

“그렇죠. 당신에겐 그가 적이죠. 아마도 적은 당신의 외부에 따로 존재하진 않을 겁니다. 당신은 그 적이 지금 당신 곁에 앉아 있다고 여기겠지만, 아마도 그는 당신의 독서를 방해하면서 당신의 내면에, 머리와 뱃속에 이미 들어가 있을 겁니다.”
─본문 중에서

냉소 가득한 이 대화를 끌어가는 기술이 대단하다. 하지만 아멜리 노통브의 이 아이러니컬한 냉소는 단지 그녀의 심정적 강렬함을 포장하는 수단일 뿐, 그 안에 담긴 이 책의 정서라는 것은 뜨겁고 또 빨갛다. 독자는 이 의식의 드라마의 마지막 장을 펼치기 전까지는 두 사람의 갈등의 의미를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 강간과 살인 등의 섬뜩한 얘기가 줄을 잇지만 비행기가 출발하기 전까지는 독자의 ‘경악’은 끝나지 않는다.

하나의 작은 철학 콩트로도 볼 수 있는 이 소담한 책은, “타자는 곧 지옥이다”라는 사르트르의 유명한 명제가 거의 낙천적으로 들릴 정도로 섬뜩한 지옥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왜냐하면 아멜리 노통에 있어서 지옥은 타자가 아니라, 우리 자신의 내부에 있기 때문이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차근차근 피해자의 목을 조여오는 가면 쓴 존재가 마침내 그 가면을 벗어던지는 순간 독자는 “아!”하는 탄성을 금치 못할 것이다.

추천사

“이 소설은, 대화로 이루어지는 언어의 결투를 보는 듯하다. 제롬 앙귀스트와 텍스토르 텍셀 사이의 불꽃 튀는 언어의 공방전! 노통브의 작품 속 인물이 거의 그렇듯, 여기서 등장인물의 이름은 많은 함의를 간직하고 있다. 불안(앙구아스, angoisse)에 찌든 앙귀스트는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들지만, 순전한 텍스트texte의 구성물, 혹은 앙귀스트의 머릿속에서 짜여지는 텍스트로서의 텍스토르 텍셀의 발화행위 속에 휘말려 들어간다.”

―《르 스와르》(Le Soir)

“저자의 요설은 철학적 콩트의 수준으로까지 치닫는다. 범상한 통념에서부터 시니시즘이 번득이는 아이러니한 단장에 이르기까지. 이야기 대부분이 대화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전체를 이해하는 방법으로 무슨 영화의 장면처럼 상상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 읽기보다는 대사를 듣는 것처럼 말이다. 모르긴 몰라도 이번 작품 역시 영화제작자들이 눈독을 들일 게 분명해 보인다.”

―《리르》(Lire)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 속에는 『지킬박사와 하이드』의 향기가 묻어난다. 사실 그 향기는 에드거 앨런 포의 『윌리엄 윌슨』에 비교될 만큼 더욱 극단적으로 치달은 독기로 드러나며, 처음엔 둘인 듯한 사람이 결국 하나로 입증되는 분열증 이야기의 독특한 유형으로 탄생한다. 하지만 노통브의 『적의 화장법』이 그런 이야기들의 단순한 리메이크가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그녀는 프랑스 문학에서 그 독창성이 분명히 드러날 만큼의 독자적 재능과 풍자적 감각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 리베르테》(La Liberté)

옮긴이 박철화

서울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파리8대학에서 석사를, 파리10대학에 서 박사과정DEA을 마쳤다. 1989년 월간 《현대문학》에 평론을 발표하며 평론가로 등단하여 『감각의 실존』, 『관계의 언어』, 『문학적 지성』, 『관계의 시학』 등의 평론집을 냈다. 중앙대학교에서 문학이론과 평론을 가르쳤다. 요즘은 주로 바이크 라이딩과 트레일 러닝을 하고 있다.

최승우 기자 kantmani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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