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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니체가 내 삶을 흔들었다
어느 날 니체가 내 삶을 흔들었다
  • 최승우
  • 승인 2024.01.31 20: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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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 지음│문학세계사│288쪽

니체와 함께하는 철학 산책

『어느 날 니체가 내 삶을 흔들었다』는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시인·비평가·독서광인 장석주 작가가 읽은 최초의 철학책이자 최고의 철학책인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통해 니체 철학이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철학을 통해 배우는 삶의 방식은 무엇인지 알려주는 책이다.

니체는 철학자를 넘어선 철학자다. 우리는 그를 무어라고 불러야 하는가? 그는 문명 치료사, 의사이자 환자, 사유의 무정부주의자, 철학의 테러리스트, 서양의 붓다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니체는 현대 철학의 실험실이다. 니체는 하나의 경계선이다. 현대의 이전과 이후로 나뉘는 경계선. 니체는 제 실험실에서 철학의 특이점들, 반시대적 통찰들, 이전에 없던 무수히 많은 철학의 새로운 개념을 창안한다. 그것을 무어라고 불러야 좋을까? 그것을 서양의 불성(佛性)이라도 불러도 좋은가? 니체는 인도가 낳은 붓다에 필적하는 서양의 붓다가 되려는 기획을 최초로 세웠던 철학자가 아닌가? 

『어느 날 니체가 내 삶을 흔들었다』는 니체 철학의 정수를 맛보려는 사람을 위해 쓴 게 아니다. 니체를 철학의 체계 안에서 진지하게 이해하려는 사람은 부디 다른 책을 찾아 읽기를 권한다. 이미 많은 것을 가진 자, 성공을 거머쥐고 우쭐한 자, 스스로 영웅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에게 이 책은 줄 게 없다. 이 책은 겨우 철학의 가난을 보여 줄 뿐이다.

세계와 불화하는 자들, 살아 있음의 불편함을 야윈 정신으로 버티는 자들, 승리보다 패배하는 자유를 더 옹호하는 자들, 주류에서 세계의 변방으로 내쳐진 채로 길고양이처럼 하염없이 떠도는 자들, 세계에 대한 환멸로 괴로워하며 사막의 별 아래서 잠을 이루는 자들을 위해 쓰였다. 이 책은 단순한 삶의 해결책이 아니라 자신만의 살아가는 지혜를 찾고자 하는 이에게 권하는 책이다. 니체의 말과 생각을 시인의 눈으로 관통하며 방향을 잃고 방황하는 현대인에게 삶의 지표를 제시한다.

오직 세계와의 싸움에서 패배하고 낙담하는 자들, 하지만 여전히 삶에 대한 사랑을 포기할 수 없는 자에게 이 책이 한 움큼의 위로와 용기, 꿈의 작은 조각을 건네주기를 바랄 뿐이다.

자, 이제 니체와 함께 철학의 숲으로 산책을 떠나보자.

등 푸른 고등어 같던 스무 살 때, 니체를 만나다

‘춤추는 별이 되기 위해서는 그대 스스로의 내면에 혼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_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장석주 시인은 가난한 집 5남매 중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런 주제에 낙후된 가정 경제를 일으키는 대의에는 무관심한 채 쓸데없는 시에 빠져 빈둥거리니, 주변 인물이 다들 뜨악했다. 그는 풍차를 향해 창 들고 돌진하는 라만차의 기사 돈키호테와 같은 동류 취급을 받았다. 이웃들은 꿈도 대의명분도 없이 빈둥거리는 나를 손가락질하며 비웃었다.

부모 형제들과 불화는 아니지만, 얼굴 마주치면 불편해서 외면했다. 그럼에도 그는 뻔뻔하게 청계천 헌책방을 순례하며 사들인 책을 읽고, 밤새워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시를 쓰곤 했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날 수도 없고 일어나지도 않았다. 시인의 스무 살 푸른 영혼은 바닷속을 달리는 등 푸른 고등어 떼처럼 싱그러웠다. 하지만 그의 스무 살은 비루하고, 비루하고, 또 비루했다.

스무 살 무렵, 직장을 가져 본 적 없이 남루한 동복 하나로 1년을 버티며 음악 감상실 등지를 떠돌며 책을 읽고 글을 쓰던 장석주 시인은 피의 본성인 듯 시와 철학에 이끌렸다. 무지몽매와 혼돈 속에서 허우적대던 장석주 시인은 철학에서 필요한 것을, 무엇보다도 젊음의 약동하는 피를 수혈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랬으니 헌책방을 순례하며 시집과 철학책을 구해다 읽고, 시립 도서관에 처박혀 늘 먼 곳을 생각하며 하염없이 책 읽기에 빠져들었을 것이다. 철학을 향한 열정과 지속적인 독서가 그에게 영향을 끼쳤고, 삶을 긍정적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그때, 프리드리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만났다. 장석주 시인은 그 책을 여러 번 읽었다. 니체의 철학은 방황하던 스무 살의 말랑말랑한 청년의 뇌에 벼락처럼 꽂혔다. 

‘나는 얼마나 나태하게 살아왔는가! 나는 내 앞에 펼쳐진 전쟁을 회피하느라 바빴다. 내가 원하는 것은 전쟁이 아니라 평화라고 말하면서 전쟁을 피해 도망을 다녔다. 하지만 그것은 나르시시즘에 빠져 사는 자의 비겁한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고 회고하는 장석주 시인은 “평화가 아니라 승리를 갈망하라.”고 말하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으며 여러 번 탄식했다. 니체의 책들이 굶주린 짐승처럼 그르렁거리는 인식 욕구를 채워 주는 한편 시인의 절박한 내적 필요에 응답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런 면에서 니체와의 만남은 운명이 된 사건이 되었다.

환자이자 의사이고, 붓다이자 명민한 제자인 니체에게서 장석주는 많은 것을 배웠다. 웃는 법, 춤추는 법, 운명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고향을 떠나 사는 법, 고독을 견디는 법, 병(病)이라는 불안과 맞서 싸우는 법을 배우고, 괴물과 싸우면서 괴물이 되지 않는 법, 낙타처럼 순응하는 길은 거부하고 사자처럼 ‘아니오!’라고 말하는 법, 내면에 혼돈을 품고 어린아이처럼 순진무구한 놀이 속에서 삶을 긍정하고 기쁨을 얻는 법을 배웠다.

니체는 평생 한곳에 머무르지 못한 채 여기저기를 떠돌았다. 유럽의 고산 지대를 떠돌고, 호수를 산책하며, 지중해의 도시에 머물렀는데, 장석주 시인은 니체가 방랑의 흔적으로 남긴 철학의 미로를 헤매었다. 그런 삶을 살았기 때문에 니체는 자기를 “방랑하는 자이자 산을 오르는 자”라고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니체는 속삭인다. “나는 너의 미로다.”라고.

그는 굶주린 자가 젖과 꿀에 탐닉하듯이 니체 철학의 정수를 정신없이 들이키며 철학이 건네주는 황홀과 도취 속에서 부정의 정신에서 긍정의 정신으로 돌아섰다. 그러자 어느 순간 삶의 얽힌 매듭들이 주르륵 풀렸다. 청년 장석주는 더 이상 삶을 버거워하며 우울감에 빠지거나 주눅 들지 않았다. 그건 다 니체에게서 오는 “높은 곳의 공기”, “강렬한 공기”가 내 정신에 미친 좋은 영향 때문이었다.

지금, 니체를 읽어야 하는 이유

이 세상에 너무 일찍 온 철학자 니체는 누구보다도 살아 있음을 기뻐하고 생을 사랑한 사람이다. 지금 우리가 니체를 읽어야 한다면 저자는 그 이유를 백 가지도 넘게 말할 수 있다고 말한다.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꼽자면, 니체 철학이 우리 내면의 삶과 의지를 비춰 볼 수 있는 거울이라는 점이다. 자기 삶을 분쇄하고 그것을 뭉쳐서 만든 거울이란 어떤 기물인가? 나는 일찍이 ‘거울’에 대해 이렇게 썼다. “자기의식으로서의 거울, 내면적 삶이 시작되는 지점으로서의 거울, 건강과 육체를 돌보는 자아로서의 거울, 여명과 번개로서의 거울.” 이 혼돈의 시대에 필요한 것이 바로 그 거울이 아닌가? 니체는 자기라는 거울에 비친 세계를 보여 준다.

니체는 거울-세계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것, “힘과 힘이 만나는 파장의 유희로서 유일한 것이기도 하고 여러 개이기도” 한 것, “몰려오는 힘과 흘러넘치는 힘의 바다”인 것, “자기 모습의 밀물과 썰물”인 것, “결코 만족하지 않고 싫증 내지 않고 지치지 않는 생성”이라고 말한 바 있다. 세계가 바로 권력에의 의지이고, 우리 자신이 바로 그것이라고 말한다.

세계의 거대한 불모성에 머리를 쿵 박은 뒤 청년 장석주는 이 세상에 쓸모가 없는 존재라는 결론을 내린다. 내 나이 19세 때다. 삶과 농담을 버무리고, 아무 야심도 품지 않은 채 떠돌던 그 시절 한 청년에게 벼락처럼 내리꽂힌 니체를 의심하고, 의심하고, 또 의심했다. 그의 사유와 철학을 의심하고, 그의 고독과 순수함을 의심했다.

‘니체는 기괴한 환상을 조합해서 늘어놓는 사기꾼이 아닐까? 그는 전대미문의 가짜 우상 파괴자가 아닐까?’ 하지만 천둥벌거숭이로 세상에 팽개쳐진 그가 ‘차라투스트라’를 만나 한 줄기 영감과 모종의 힘을 얻었다는 사실조차 부정할 수는 없었다. 긍정이라는 축복 속에서 웃고 춤추는 차라투스트라! 장석주 시인은 미래는 어둡고, 불안은 늘 내면의 가장 연약한 곳을 찌르던 그때 차라투스트라를 보고 웃음을 배웠다. 그는 웃음의 화관을 씌워 준 니체 – 차라투스트라에게로 개종을 결심한다.

니체는 자기 빛 속에 사는 자, 춤과 웃음을 가르치는 자, 인간을 넘어선 인간이다. 초인, 바로 ‘차라투스트라’라는 초유의 존재를 빚어낸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 세상에 가장 완전한 ‘혼’이다. “가장 긴 사닥다리를 가지고 있는 혼, 가장 깊숙한 곳까지 내려갈 수 있는 혼―자기 자신 속에서 가장 멀리 달리고 방황하며 방랑할 수 있는 혼, 기꺼이 우연 속으로 뛰어드는 가장 필연적인 혼”이다. 제 안에 격류와 역류, 건강과 병을 동시에 품은 ‘혼’을 나는 얼마나 사랑했던가! 차라투스트라는 오랫동안 장석주 시인에게 ‘내가 되고자 하는 궁극의 푯대, 내 앞길을 비추는 별’이었다.

니체라는 ‘낯선 정신’과의 우연한 만남 이래 니체라는 별을 바라보며 어두운 길을 헤쳐 지금 여기에 도착했다. 왜 니체의 책을 이토록 오랫동안 읽어 왔던가? 시인은 그저 니체 철학이 좋았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시인의 안에 피에 대한 기질적 이끌림, 혹은 니체를 향한 동경이 있었을 것이다. 장석주 시인은 지금까지도 니체의 철학책을 머리맡에 두고 읽는다. 늘 다른 깨달음을 느끼면서.

최승우 기자 kantmani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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