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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다시 외로워질 것이다
너는 다시 외로워질 것이다
  • 김재호
  • 승인 2024.01.30 12: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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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영 지음 | 해냄출판사 | 340쪽

3년 전 서울을 떠나 하동군 평사리에 정착한 소설가 공지영. 그 무렵 작가로서의 번아웃에 시달리며 더 이상 글을 쓸 수 있을까, 심각한 회의에 빠진다. 고독 속에 스스로를 유폐하고, 그것에서 평화와 행복을 되찾아가던 어느 날, 작가는 문득 순례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목적지는 예루살렘, 예수의 탄생과 성장,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역사가 고스란히 새겨진 곳, 평온한 일상을 살면서 잊고 있던 그곳으로.. 

『너는 다시 외로워질 것이다』는 2022년 가을에 떠난 순례의 여정 속에서 만난 깨달음의 기록으로,『그럼에도 불구하고』이후 3년 만에 발표하는 공지영 작가의 신작 산문이다. 그의 대표 에세이 중 하나인『수도원 기행 1, 2』를 잇는 영성 고백과 삶에 대한 절절한 통찰이 담겨 있다. 각 순례지가 작가에게 던져준 삶의 메시지를 자신의 현실로 가져와 묵상하고, 현재와 과거, 하동과 예루살렘을 교차하며 또 한 번의 진한 감동을 전한다. 

홀로 있으라, 스스로를 직면하라, 그리고 선택하라 
순례기인 동시에 치열한 자기 성찰의 기록 

길을 떠난 작가는 요르단 암만을 시작으로 갈릴래아 호수, 요르단강, 쿰란, 나자렛, 베들레헴, 예루살렘 등을 차례로 순례한다. 이는 지금까지 주로 유럽의 수도원과 성지를 순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경험으로, 낯선 중동의, 그것도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분쟁 지역을 방문하게 되는 것이다. 요르단과 이스라엘 국경은 물론, 곳곳에 세워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가르는 높다란 장벽과 철조망, 그리고 총을 든 군인들의 적의에 찬 눈빛을 마주한다. 실제로 작가가 방문하고 난 1년 뒤인 2023년 가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쟁이 발발한다. 

느보산의 모세 기념 성당을 시작으로, 예수의 탄생이 예고된 순간부터 그가 부활하는 순간까지의 흔적이 담긴 성소를 직접 방문해 걷는 동안, 작가는 그 과정이 담긴 성경의 내용들을 묵상하되, 그것을 자신의 삶에 대입하여 치열하게 성찰한다. 예루살렘은 성경의 중심지이며 그리스도 공인 성지인 만큼 그 울림이 더욱 깊고 생생하게 전해진다. 고독, 옳고 그름, 침묵, 고통, 믿음, 친절, 사랑, 악, 변화, 고통, 성장 등 보편적인 삶의 주제를 천착하기에, 종교를 넘어서 누구라도 깊숙이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이 과정 속에서 작가는 무엇보다 ‘내가 틀릴 수 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들이 도처에 존재한다’는 진실을 겸허히 받아들이게 된다.  

함께 순례했던 일행이 떠나고 예루살렘에 홀로 남은 작가는 샤를 드 푸코 성인의 흔적을 찾아 나자렛과 예루살렘의 글라라 봉쇄 수녀원을 방문한다. 화려한 세속 대신 사막의 고독을 택하고, 안정된 수도자의 길이 아닌 가장 가난하고 열악한 상황에서 오직 예수를 닮고자 했던 푸코는, 오랫동안 작가의 영혼을 사로잡은 대상이었다.

그의 혁명 같은 삶을 깊이 만나고 난 뒤, 작가는 긴 여정을 마무리한다. 
평사리에서 예루살렘, 그리고 다시 평사리로 돌아오는 순환의 여정은 작가가 직접 촬영한 수십 편의 사진을 통해 더욱 생생하고 입체적으로 다가온다. 솔직한 인생 고백과 자기 반성, 고통 속에서 길어올린 깊은 깨달음을 특유의 매혹적인 문장에 담아내어 독자들과 나누고 진중함 속에서도, 작가만의 위트가 여전히 빛난다. 

고통과 상실, 상처로 얼룩진 시간

홀로 자신만의 광야를 밤새 헤맨 이들에게 건네는 가슴속 이야기 
그 즈음 자신의 ‘환갑 파티’를 열어준 후배들에게 그는 말한다. 자신이 조금이라도 성장했다면, 그것은 그저 나이가 주는 선물이 아니라, 피눈물 흘리는 고통을 견디고 넘어온 노력의 과정이 주는 것이라고. 나이가 든다고 그냥 나아지는 것은 없다고. 작가는 자신을 비롯한 자기 세대에 대한 뼈아픈 반성과 지난날 자신이 지녔던 편협함과 미숙함에 대한 반성을 통해 회복과 새로운 출발을 다짐한다. 

순례를 통해 그는 마침내 동백나무가 죽은 잎을 떨어뜨리듯, 자신의 죽어 있던 시간을 떨구고 다시금 일어선다. 드라마 <토지>의 배경이기도 한 평사리로 돌아와, 한평생 자신의 고통을 정면으로 응시하기 위해 글을 썼던 소설가 박경리를 떠올리며 다시 펜을 든다. 

작가는 삶에 대한 달콤한 환상을 냉정히 거둬내고, 고요하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한다. ‘외로움’은 단순한 고립과 단절이 아닌 낡은 과거와 이별하고 진정한 자유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임을, “언제라도 고통이 오면 우리는 이 고통이 내게 원하는 바를 묻고, 반드시 변할 준비를 해야” 함을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누구나 또다시 ‘외로워질’ 것이라고. 오늘도 흔들리고 치이고, 실수하고 무너진 이들, 고통과 상실로 얼룩진 채 자신만의 광야를 밤새 헤맨 이들에게 이 책은 깊은 위로와 지혜를 전해줄 것이다. 수많은 독자들의 영혼을 울리며 독보적인 세계를 구축해 온 ‘공지영표’ 산문의 진수를 다시 한 번 깊이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결국 그분의 바람대로 광야에 혼자 서 있을 뿐 아니라, 서 있어보니 좋은데요, 계속 이렇게 살다 죽고 싶어요, 뭐 이러기까지 하고 있는 것이다.
―<광야에서> 중에서

약간 깨달은 것 가지고는 삶은 바뀌지 않는다. 대개는 약간 더 괴로워질 뿐이다. 삶은 존재를 쪼개는 듯한 고통 끝에서야 바뀐다. 결국 이렇게, 이러다 죽는구나 하는 고통 말이다. 변화는 그렇게나 어렵다. 가끔은 존재를 찢는 듯한 고통을 겪고도 바뀌지 않는 사람이 있는데, 대신 고통을 거부하려고 헛되이 싸우던 그가 망가지는 것
을 나는 여러 번 보았다.
그러므로 고통이 오면 우리는 이 고통이 내게 원하는 바를 묻고, 반드시 변할 준비를 해야 한다. 이것은 그동안 우리가 가졌던 틀이 이제 작아지고 맞지 않음을 알려
주는 것이다.                                  ―<지금 너는 어디로 가느냐?> 중에서

“저에게는 서울이란 온통 고생과 긴장뿐인 도시였는데 아주 뜻밖의 일이었지요. 집에 갈 때가 다 되어서 받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제가 조심스레 여쭈었어요. ‘제게 왜 이런 걸……’ 하고요. 사장님께서 웃으시며 제게 자신의 지갑을 열어 돈을 보여주며 대답하셨어요.
‘누군가 너에게 이런 걸 해주라고 이 돈을 주셨단다. 그러니 아무 염려 말아라.’
말도 안 되는 소리였죠. 그냥 사장님께서 나 미안해하지 말라고 하시는 소리인 줄만 알았어요. 그래서 대답했죠.
‘그런 좋은 분이 계시다니 믿을 수 없네요.’
저는 그냥 웃으려고 했어요. 그런데 말씀이 이어졌죠.
‘그 사람이 궁금하니? 만일 그렇다면 그게 어디든 네가 가는 길에 있는 성당에 들어
가보거라. 거기 그분이 계시단다.’”
―<“거기 그 사람이 있을 겁니다”> 중에서

그러니 수많은 성인들, 수많은 현자들이 인간 세상을 떠나 사막으로 간 것이었으리라. 거기에는 우리 감각을 미혹시키는 배경들이 가장 최소화되어 있기 때문이리라. 그 모든 감각을 지워버리고 나면 인간은 하는 수 없이 자기 자신을 만난다. 그리고 통곡하는 것이다.
대답은 간단해졌다. 마치 몇십 년 만에 만난 어머니를 붙들고 울듯이, 어쩌면 그것보다 더 간절히 그리워하며 내 밖에서 찾아 헤매던 그 사람을 만나게 되니까. 결코 잊
어버리지 않았으나 잊은 줄만 알았던 첫사랑의 기억과도 같은 나 자신. 사람은 신의 모상을 닮게 만들어졌으니 그 나 자신 속에 사랑의 원천인 신의 모습이 들어 있으니까 말이다. 인간에게 그보다 더한 그리움이 있을까.
―<무의 황홀, 사막으로 가고 싶었다> 중에서

한때 나도 아이들에게 집착한 적이 있었다. 내가 불행했기에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아이의 성적을 위해 밤늦도록 매를 때려가며 가르치려고 한 일도 있고, 사람들 앞에서 버릇없이 굴면 가차 없이 벌을 주었다. 나중에는 엄격함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 방식을 바꾸었다. 방황하는 사춘기 아이를 위해서 그 애 학교 운동장 담벼락을 돌며 몇 시간이고 기도를 한 일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게 그 유명한 집착이라는 것이구나, 이게 그 유명한, 남을 내 마음대로 하고, 아이에게 내가 몸소 하느님이 되어 그 애의 고유한 생김새대로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대로 하고 싶은 교만의 죄구나, 싶었다. 내 긴 긴 기도도 실은 집착의 다른 포장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 그걸 깨달은 나는 몹시 아팠다.

마리아가 십자가를 지고 가다 넘어진 상처투성이 아들을 보고 그 자리에서 울거나 소리쳤다는 기록이 없다. 하늘을 향해 “제발 제 아들을 살려주세요” 하고 기도했다는 말도 없다. 그녀는 침묵하며 아들의 길을 그저 따라갈 뿐이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모성을 완성한다. 내 맘에 들지 않고 이해도 할 수 없고 남들 보기에도 엄청나게 부끄럽지만, 그러나 아들에게 아들이 원하는 길을 가게 함으로써.
―<비아 돌로로사> 중에서

어린 시절 엄마가 말하곤 했었다.
“자라. 자고 나면 나아 있을 거야.”
자고 일어나면 신기하게도 많은 것이 달라져 있기도 했다. 자고 일어나면 내 바지가 껑충해지고 옷소매가 짧아져 있기도 했다. 비단 인간에게만 그런 것은 아니어서, 하동에 와서 살다 보니 자고 일어나면 아랫집 감나무가 초록초록 했고, 자고 일어나면 길가 은행나무가 노랗게 물들어 있기도 했다.
해가 있어야 싹이 튼다고 생각하지만 어둠 속에서야말로 싹이 트고 꽃이 피어난다는 것, 이것은 정말 위대한 일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밤에 자랐고, 고통 중에 성숙했고, 아프고 나서야 키가 반 뼘쯤 자란 것일까.  
―<놓아줌으로써 사랑은 완성된다> 중에서

천사가 일러준 대로 그분은 거기 계시지 않았다. 그분은 살아나셨고 우리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셨다. 예수가 거룩하게 변모해서 초막을 지어서라도 머물고 싶은 타보르산이 아니고 갈릴래아, 권력층이 사는 예루살렘이 아니고 갈릴래아, 어부들이 그물을 손질하고 물고기가 잡히지 않아 허탕을 치고 목동들이 양을 모는 그곳, 그러니까 이곳, 걸어가는 강아지를 낚아채고, 욕설을 하고 싸움이 일어나고 시비를 걸고 이 시골에서 뒷담화해서 말도 안 되는 소문을 퍼뜨리고 폭력을 당해 간 경찰서에서 “폭력을 당한 건 아니지요?”라고 묻는 이곳, 여기 갈릴래아.
―<‘깨달은 후의 빨랫감’> 중에서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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