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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71] 나에게는 그 누구보다 가장 본받을만한 아나키스트, 웬델 배리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71] 나에게는 그 누구보다 가장 본받을만한 아나키스트, 웬델 배리
  • 박홍규
  • 승인 2024.02.05 09: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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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 웬델 배리②
웬델 배리(1934~)

가상의 작은 켄터키 마을 포트윌리엄의 목가적인 연대기로, 주로 전통적인 유기농이 기계적 산업농으로 바뀌는 농업 관행의 근본적인 변화와 전통적인 가족농업 및 농장공동체 생활의 소멸을 다루는 배리의 소설이, 농업이 망해가고 있는 한국 현실에서 인기를 얻을 리가 없다. 

권선징악적 이분법은 아니지만 전통적 유기농과 기계적 산업농이라는 이분법이 배리 소설의 중심적 주제이므로 같은 주제를 다루는 8편의 장편이나 57편의 단편은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2000년에 발표된 여섯 번째 소설 『포트윌리엄의 이발사』 표지

우리말로 번역된 유일한 배리의 소설 『포트윌리엄의 이발사』

가령 우리말로 번역된 그의 유일한 소설인 2000년에 발표된 여섯 번째 소설 『포트윌리엄의 이발사』의 원제는 『제이버 크로우』인데, 제이버는 간판도 없는 이발소의 이발사로 자신이 ‘정신적으로’ 결혼했다고 믿는 부지런한 농부 애디 키스의 딸 매티를 은밀하게 짝사랑하며 살고 있지만 그녀는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애디가 죽고 나자 사위 트로이는 매티가 지켜온 삼림지의 나무마저 팔아치우는데, 숲이 불도저에 밀려나가는 끔찍한 모습을 목격한 제이버는 매티가 마지막 숨결을 몰아쉬고 있는 병원으로 달려간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할 때 시작되는 고아 출신 크로우의 삶은 격변의 세기를 상징하며, 진보에 대한 현대적 개념에 도전하는 것처럼 읽히지만 오늘의 한국인에게 과연 얼마나 감동을 줄지는 의문이다.

1988년에 발표된 배리의 네 번째 소설 『기억하기』에도 두 종류의 농부가 나온다. 하나는 전통적인 유기농을 하는 농부고, 다른 하나는 농기계와 화학제품으로 산업농을 하는 농부다. 시대는 양차 대전 사이로 소설은 그 중 하루를 다룬다. 
농사를 짓다가 사고로 오른손을 잃은 후 깊고 어두운 우울증의 밑바닥에 놓여있는 주인공 앤디 캐틀렛은 가족과 헤어져 농업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에 홀로 남아 긴 산책을 한다.

회의장에서 괴물 같은 기계의 경이로움을 찬양하면서도 평생 단 한 번도 농사를 지어본 적이 없는 농업 교수들을 경멸하며 고향의 농부들을 기억하는 앤디의 모습에서 현대 기술의 침해와 소규모 가족 농장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위협을 제기하는 베리의 분노가 느껴진다.

하루가 끝날 무렵 앤디는 다시 온전해지기 위해 고향으로 간다. 자본주의적 산업화 발전이 가져오는 압력에서 벗어나 지루함, 악덕, 궁핍이라는 세 가지 큰 해악을 막기 위해 땅을 경작하는 데 만족하는 겸손한 아미쉬 농부들의 비전이 제시된다. 

1979년부터 지금까지 ‘안식일 시’라는 작품을 써왔다

그나마 소설은 한 편이 번역되었지만 배리의 시집은 아직 번역되지 못했다. 1979년부터 지금까지 배리는 자신이 ‘안식일 시’라고 부르는 작품을 써왔다. 안식일이 없을 정도로 무한한 소동에 빠져 있는 미국인들의 끊임없는 분주함을 생명 자체에 어긋나는 것으로 비판하는 배리는 소로가 ‘원칙 없는 삶’이라고 비판한 것과 같다. 1979년에 쓴 초기 시를 읽어보자.

선조들이 그늘진 땅을 개간하고 
밝은 햇빛을 내려
들판과 밟힌 길을 비추던 
마을에 종소리가 울린다.
나는 듣고도 반대로 이해하고 
숲 속으로 들어간다.
나는 노동과 짐을 맡기고
다른 이야기를 시작한다. 
나는 불가사의와 비상업적 물품의
목록을 보관한다. 

배리는 땅을 연인으로 받아들여 사랑하고 결혼하는 것으로 바람직한 인간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일단 땅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자기보다 오래 살아남을 것을 씨뿌림으로
그는 자신의 장소와 결혼을 하기에 
그곳을 떠나면 돌아가고파 온몸이 저려온다 

이처럼 자연과 인간은 한 몸이 된다. 반대로 자연과 인간의 분리가 생태계의 위기를 가져온다. 그런 위기를 배리는 강간이라고도 극언한다. 그것은 피해자는 물론 가해자에게도 소외와 정신적 황폐를 초래한다. 자연과 인간의 본래적인 협력과 상생의 관계는 경쟁과 착취의 관계로 변했다.

이는 영혼과 육체를 분리하고 육체에 대한 억압과 경멸을 초래하며 외로움에 빠지게 하는데 이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지구와 다른 생물에 대한 폭력뿐이다. 따라서 배리는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을 반대한다.

『농사: 안내서』 표지

그래서 반대로 나아가는 ‘미친 농부’가 등장하는 시집 『농사: 안내서』(Farming: A Hand Book)가 쓰인다. 산업농에 중독된 사람들에게 유기농은 ‘미친 농부’일 수밖에 없다.  

재빠른 이윤과 해마다의 인상
그리고 유급휴가를 사랑하라. 기성제품을 
더 많이 원해라. 이웃 사귀기와 죽음을 
두려워해라. 그러면 네 머리에 창구멍이 나고
네 미래에는 더 이상 신비가 없으리라. 

최단기간에 최대이윤을 올려야 하는 효율만능주의의 농업과 축산업은 대지와 공기의 황폐를 초래한다. 

세상 속에서 살려면서 세상을 불태우는 것은 잘못이다
더불어 평화롭게 살기 위해 전쟁을
하는 것만큼이나, 탐욕의 과학으로
땅을 망치는 것만큼이나, 패스트푸드나
값싼 음식을 요구해서 몸의 건강과 즐거움을
망치는 것만큼이나 잘못이다—왜 그런지는 묻지 마라.

반대로 배리에게 농업은 땅을 살리는 치유이자 땅과 하나가 되는 화합이다. 그는 노동을 통해 외로움을 이기고 모든 피조물이 함께 하는 원무에 참여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미친 농부는 “저녁에는 저를 어둠과 하나가 되게 하시고/ 아침에는 빛과 하나가 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한다.   

배리의 절규는 『농사: 안내서』 제2부의 제사로 인용된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의 시 「양토를 일궈라」 (“Build Soil”)에 나오는 일인 혁명과 같다. 

나는 그대에게 다가오는 혁명인
유일한 일인 혁명을 명한다
(중략) 

우리가 너무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무리를 떠나
집으로 가는 것은
제 정신을 차린다는 말이다.

「미친 농부가 반대하는 것들」에서 배리는 “만일 반대의 길이 나의/ 유산이고 운명이라면, 그럴지어다. 나의 임무가/ 출구로 들어가고 입구로 나오는 것이라면, 그럴지어다”(FAB, 44)라고 노래한다. 그리고 자연을 다음과 같이 찬양한다. 

자연이
최고의 농부다, 자연은
땅을 보전하고 비를 보존하기
때문이다. 자연은 토양을 깊게 하며
아무것도 낭비하지 않는다. 게다가 자연은
다양하며 질서정연하다.
자연은 땅위에서
우리의 어머니이자 선생이고 최종 재판관이다.

자신도, 그 누구도 아나키스트로 꼽지 않지만...

이십여 년 전 나의 귀농은 참회였고 부활이었으며 재생이었다. 그러나 몇 해 못가 논밭을 아파트니 창고니 폐차장이니 쓰레기 소각장이니 축사 따위가 덮어버려 다시 이사를 가려고 했지만 주변에 그렇게 변하지 않은 곳은 거의 없어 그대로 눌러 앉았다.

그런 건물들 틈새에 논밭이 조금 남아있어도 비닐로 덮여 흙 내음을 맡기 어렵다. 유기농이라는 것도 하늘을 막은 비닐 속에서 온갖 유기약품으로 공장식으로 생산되고, 과일 나무도 최대 생산을 목표로 변조된 과일 기계처럼 도열해 있다. 하루 종일 사람은 거의 못보고 차들만 요란하다.

배리는 그런 농사는 농사가 아니라고 한다. 배리가 말하는 전통적인 방법 그대로 땅을 파고 씨앗을 뿌리며, 닭과 개와 함께 하루를 보내며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매일 다짐한다.

배리는 아나키스트를 자처한 적이 없고 아나키즘 측에서도 그를 굳이 아나키스트로 꼽지 않지만, 나에게는 그 누구보다도 가장 본받을만한 아나키스트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했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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