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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제 정당화의 심리학
체제 정당화의 심리학
  • 김재호
  • 승인 2024.01.17 15: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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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T. 조스트 지음 | 신기원 옮김 | 552쪽

사회심리학 실험으로 검증한 인간의 체제 정당화 욕구
억압적 체제를 수용하고 옹호하려는 인간의 강력한 경향성에 대한 25년 혁신적 연구의 결정판!

왜 가난한 노동자가 부유한 기업가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을 지지하는가
왜 여성은 남성보다 낮은 임금을 감내하는가? 왜 기후 위기 대응은 늦어지는가? 뉴욕대학교 교수이자 사회심리학자 존 조스트에 따르면, 이는 놀랄 일이 아니라고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 대가가 개개인에게 너무 크기 때문이다.

우리는 되도록 사회에서 바람직하게 여기는 방식으로(관계적 욕구), 안정감을 느끼면서(실존적 욕구)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인식론적 욕구) 기존 사회 체제를 정당화·합리화하곤 한다. 조스트는 불의한 체제의 정당화가 사회적 약자들에게 단기적으로는 심리적 진통제 기능을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체제를 공고화하고 그들의 심리적 안녕을 저해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25년 전 “왜 가난한 사람이 부의 재분배에 반대하는가”에 의문을 품은 예일 대학교 대학원생이던 조스트는, 현재 하버드 대학교 심리학 교수인 마자린 바나지의 격려에 힘입어 연구실 세미나에서 기말 보고서를 발표했고, 이것이 체제 정당화 이론의 출발점이 되었다. 대학원생들이 세미나를 연 ‘나폴리 피자’가 ‘월스트리트 피자’로 간판을 바꿔 달고 2016년 미 대선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백인 노동자 계층의 압도적 지지를 얻어 대통령에 당선되는 동안, 조스트는 동료들과 이론을 입증할 실험 연구를 이어갔고 이제 체제 정당화 이론은 조스트의 대표 이론이 되었다.

뉴욕대학교 교수이자 사회심리학자 존 조스트. 사진=뉴욕대

신 포도와 단 레몬의 심리학

“여우와 신 포도” 우화에서 여우는 닿을 수 없는 포도를 보며, ‘저 포도는 실 거야’라고 가치를 절하한다. 그러나 만약 먹을 것이 레몬밖에 없다면, 여우는 레몬이라도 있어 다행이라며 달게 받을 것이다. 가질 수 없는 것은 가치 없게, 피할 수 없는 것은 가치 있게 여기는 것이다. 끊임없이 가질 수 없는 것을 원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비참한 현실을 되새기는 괴로움을 계속 감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체제 정당화 이론의 핵심이다. 그래서 미국의 가난한 노동자들은 경제 체제의 모순을 지적하는 대신 기존 정부를 비난하며 트럼프를 지지하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여성 가사 노동자들은 인종 관계가 불평등하다고 생각하는 대신 부유한 백인 고용주와 상생할 수 있어 행운이라 여기며, 기후 위기 회의론자들은 기후 변화를 걱정하는 대신 그 증거를 부정하는 것이다.

인간의 체제 정당화 경향을 여러 심리학 실험과 통계 분석을 통해 과학적으로 검증한 이 책은 사람들이 자기와 자기 집단의 이익을 옹호하는 경향을 설명하던 사회심리학 이론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체제 보전을 옹호하는 경향도 있다는 것을 입증했다는 점에서 심리학 이론의 지평을 한층 넓혔다고 할 수 있다.

책의 내용

책 전체를 개관하는 1장에 이어, 2장에서는 체제 정당화 이론의 바탕인 사회 정의 개념과, 관련 사회심리학 연구 주제를 소개한다. 분배 정의, 공평·평등·필요의 원리 등 고전 연구와 함께, 세상이 정의롭다는 믿음, 권위주의적 성격, 사회적 지배 지향성 연구도 살펴본다.

3장에서는 체제 정당화 이론의 아홉 가지 전제를 설명한다. 개인과 상황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기존 사회·경제·정치 체제를 정당화하도록 동기화되어 있으며, 무력감이나 위협을 느끼면 더 그렇다. 체제 정당화의 수단에는 이념에 대한 직접 지지, 기존 관습 및 권위 정당화, 체제의 문제점에 대한 부정 및 합리화 등이 있다.

체제 정당화 동기는 주류 집단에서 자기 및 내집단 정당화 동기와 일관되므로 자존감과 안녕감을 높이는 데 반해, 비주류 집단에서는 두 동기가 서로 충돌해 자존감과 장기적 안녕감을 떨어뜨린다. 그런가 하면 대체로 사람들을 사회 변화에 저항하게 하지만, 변화가 불가피하거나 체제를 보전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지각하는 경우에는 훨씬 쉽게 받아들이도록 이끈다.

4장에서는 기존 사회 체제를 유지하는 이념(이데올로기)이, 사회적 고정 관념의 허위의식 강화를 통해 존속하는 원리를 밝힌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기존 사회 체제를 정당화하는 여러 고정 관념이 숨어 있다(예: 가난의 원인은 게으름이다). 이러한 고정 관념은 피지배 집단이 허위의식, 즉 스스로를 억압하는 거짓 믿음을 내면화하게 한다. 저자는 자기나 자기가 속한 내집단에 이익이 되는 고정 관념을 옹호한다는 자기 및 집단 정당화 이론에, 체제 정당화도 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5~11장에서는 저자가 체제 정당화 이론을 증명하기 위해 동료 연구자들과 수행한 다양한 실험 연구를 소개한다. 먼저 5장에서 (정치 성향, 성별 및 성적 지향, 인종, 학벌, 연령에 따른) 집단 권력 차의 효과에 대한 18개 가설과 검증 결과를 제시한다. 6장은 무력감이 체제 정당화를 촉진할 수 있다는 연구 결과 모음이다. 이를테면 2015년 연구에서 개인은 정치적 무력감을 느낄 때 정부를 더 정당하게 지각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7장에서는 부자와 빈자에 대한 보완적 고정 관념의 경제 체제 정당화 효과에 초점을 맞춘다. 보완적 고정 관념이란 집단의 불리한 지위를 다른 특성으로 보완해 평등의 환상을 유도하는 고정 관념을 뜻한다. 2003년 연구에 따르면 보완적 고정 관념에 맞게 ‘가난하지만 행복한’, 또는 ‘부유하지만 불행한’ 인물에 대한 글을 읽은 참여자들이, ‘가난하고 불행한’, ‘부유하고 행복한’ 인물에 대한 글을 읽은 참여자들보다 체제 정당화 척도 점수가 높았다고 한다. 이는 보완적 고정 관념에 부합하는 사람의 예시를 보면서, ‘역시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8장은 여성에 대한 보완적 고정 관념이 젠더 권력 체제(예: 가부장제) 정당화를 유도하는 내용이다. 여성에 대한 흔한 보완적 고정 관념은 남성보다 따듯하고 도덕적이지만 무력하고 남성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의 온정적 성차별주의에 노출된 여성 실험 참여자들은 체제 정당화 척도 점수가 훨씬 높았으며, 외모에 더 신경을 쓰고 자기 대상화를 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조스트에 따르면 종교는 체제 정당화의 한 형태이며, 9장에서 관련 연구 결과를 제시한다. 현실에 대한 만족과 감사를 강조하는 종교의 특성상, 체제 정당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주류 종교를 믿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체제 정당화가 높은 것을 알 수 있다.

10장에서는 인간이 변화에 저항하는 이유에 대한 심리학의 분석을 살펴보고, 이를 기후 변화 회의론에 적용해본다. 변화 거부에는 개인의 이익과 더불어, 내집단의 규준을 거스르거나 자기 이념 체계를 흔들지 않으려는 욕구도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체제 정당화 욕구는 기후 변화에 대한 회의론과 관련 있었다. 저자는 환경 보호 정책을 기존 가치(예: 애국심)를 지키는 것으로 설명하면, 사람들이 더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고 제안한다.

11장에서는 집단행동(예: 시위) 참여에 체제 정당화가 미치는 영향을 알아본다. 실험 결과 체제 정당화가 낮은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집단행동 참여 의사가 높았지만, 이는 행동이 효과적일 것이라고 믿을 때만 그랬다. 이 결과를 토대로 집단행동 참여에 영향을 미치는 심리 요인의 통합 모형을 제시한다.

마지막 12장에서는 체제 정당화 이론에 대한 비판에 반론을 제기하고, 이론의 미래 방향을 제시한다. 노동 계급의 보수주의 연구와 함께, 체제 정당화 성향의 개인차에 대한 뇌과학 연구 결과도 살펴본다.

체제 정당화가 비주류 집단의 정신 건강을 해치는 것을 막고, 궁극적으로 더 정의로운 사회를 추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조스트는 인류가 느리지만 분명 진보하고 있으며, 따라서 불의를 감지하고 정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복합적·다면적 사회 부정의를 이해할 때도 빨리 결론을 내고 싶은 인간의 욕구(인지 종결 욕구)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회적 고정 관념에 대한 인식(무의식 고취)이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조스트는 “이 주제에 관심 있는 독자에게 철학·사회 이론에서부터 정치·조직 행동까지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는 접근 가능하지만 깊이 있는 연구 개관을 소개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말한다. 체제 정당화와 관련한 사회심리학 이론을 심도 있게 탐구하려는 독자는 물론, 경제 및 젠더 불평등, 시민 참여에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 도움이 될 훌륭한 책이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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