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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스탄
트리스탄
  • 김재호
  • 승인 2024.01.11 14: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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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트프리트 폰 슈트라스부르크 지음 | 차윤석 옮김 | 문학과지성사 | 488쪽

시대를 앞서간, 중세 독일 문학의 아방가르드 『트리스탄』

『트리스탄』은 중세 독일 문학의 백미로 손꼽히지만, 중세 기사문학에서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영웅적인 기사와 귀부인의 아름답고 고귀한 사랑이 아닌, 그리스도교 문화에서 금기시되던 비윤리적인 소재, 즉 금지된 사랑인 불륜과 그 무엇도 막을 수 없는 사랑의 강력함을 다룬다.

고트프리트의『트리스탄』은 그 시대 다른 궁정 장편소설과 같이 예전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소재를 바탕으로 쓴 작품으로, 작품 속 화자의 이야기에 따르면 약 1160년에 고대 프랑스어로 쓴 토마스 폰 브리타니아의 앵글로 노르만 버전을 바탕으로 재창조한 것이다. 그러나 고트프리트는 자신의 성찰이 담긴 사랑에 대한 해석과 주석 등을 달아 독자적인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그려냈다. 고트프리트의 ‘트리스탄 에피소드’는 중세 문인들을 매료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로도 계속 변주되며 끊임없이 새로운 시각에서 재해석되었다.

그러나 고트프리트의 『트리스탄』은 트리스탄 문학의 전통에서 특별한 지위를 지닌다. 『트리스탄』은 비록 미완의 작품이긴 하나 전체 트리스탄 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간주되며, 오늘날의 시각으로 볼 때도 다른 트리스탄 작품들보다 훨씬 미학적으로 정제된 아름다운 형식을 보여준다. 또한 내용의 측면에서도 사랑의 ‘행복과 고통’이라는 정반의 대립 구조와 여기서 도출되는 대칭적 병렬 구조를 띠고 있어서, 다층적이고 복잡한 상징이 발생한다. 그는 동시대 및 옛 민중어로 쓰인 문학뿐만 아니라 고대 라틴어로 쓴 고전, 종교문학으로부터 받은 영향들을 재가공하여 시적으로 독자적이고 통일된 틀을 만들고, 그 안에 다의적이고도 비극적인 연애 소설을 만들어냈다.

또한 이 작품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당시 기준으로 금기시된 연인들의 사랑을 사회적 관심사로 만들었다. 작품 곳곳에서 피력하는 저자의 사랑론 · 문학론 · 정신분석학적 주석은 트리스탄 소재를 다룬 다른 작품들과 구별되는 특징인데, 고트프리트는 이를 통해 금지된 사랑 이야기를 ‘육체의 본성’과 ‘도덕으로서 명예’에 대한 성찰로 승화시켰다. 이렇게 작품의 주제를 심화했다는 점에서 고트프리트의 『트리스탄』은 중세 장편 운문 소설의 아방가르드 역할을 했다.

21세기에 『트리스탄』 읽기 ― 최초의 한글 완역본

고트프리트의 『트리스탄』은 발표 당시, 고차원적인 언어 예술과 뛰어난 미학적 작품 구성으로 라틴어 문화로 대변되는 식자층이나 이런 문화를 모범으로 삼던 작가들에게는 큰 호평을 받았지만 비윤리적인 내용으로 인해 그리스도교 문화에 살던 청중에게는 거부당했다. 하지만 중세에 걸쳐 고트프리트의 『트리스탄』의 수용은 광범위했으며, 고트프리트의 문체와 언어 예술은 동시대와 후대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중세 이후에도 여러 작가, 조형 예술가, 작곡가가 트리스탄 소재를 다루었는데, 특히 18세기 낭만주의 작가들은 『트리스탄』의 주요 장면과 모티브(신의 심판, 추방, 사랑론)를 활용하고, 고트프리트의 작품을 새로 구성하거나 재가공했다. 그중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1865)는 지금까지도 널리 사랑받는 예술 작품이다.

독일 중세 문학작품 중 현재 우리말로 완역된 것은 『니벨룽족의 노래』와 볼프람 폰 에셴바흐의 『파르치팔』 두 작품밖에 없다. 『트리스탄』 역시 우리말 완역본은 이 책이 최초이다. 사실 중세 독일어 텍스트 번역은 원본 텍스트의 이해를 도울 뿐이지 운율이나 단어의 뉘앙스를 살리며 원문을 대체하는 번역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래서 이 책 역시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운문을 산문으로 바꿔 번역했으며, 또 독자들이 중세 유럽 세계를 이해하기 쉽도록 낯선 용어나 지명, 사회적 맥락은 각주를 달아 설명했다. 다소 어색할 수 있으나 독자가 아닌 청중을 대상으로 하는 구술문학의 특성을 살리기 위해 작중 화자의 어투는 다르게 번역했다.

이번에 출간된 대산세계문학총서의 『트리스탄』은 최초의 한글 완역본으로 그간 역사 속 지식으로만 접하던 중세 궁정 문화와 기사도에 관한 추상적인 설명을 좀더 구체적으로 볼 수 있으며, 현대 유럽 문화의 원형을 제대로 이해하고, 복잡하고 다차원적인 중세 문화를 살펴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더 나아가 몇백 년 동안 세계문학의 소재가 된 중세 유럽의 고전이 지닌 가치를 느끼는 계기가 될 것이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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