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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 새끼 잡으러 간다
오빠 새끼 잡으러 간다
  • 최승우
  • 승인 2024.01.10 14: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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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기원 지음 | 문학세계사 | 236쪽

한국 문단의 전무후무한 괴물 같은 작가
2년 동안 미친 듯이 집필한 8편의 장편소설을 들고 드디어 세상에 나왔다
제5회 황산벌청년문학상 수상 작가 염기원의 신작 장편소설

“염기원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탄생”
                                      ─고은주(소설가)

“우리 문학사에 너무 늦게 도착한 작가”
                                             ─류보선(문학평론가)

“시대가 주목해야 할 하드보일드 구라꾼”
                                      ─장강명(소설가)

오빠 새끼 잡으러 간다

염기원 작가는 지난 2년 동안 오로지 장편 집필에만 전념했고, 그 고된 시간을 스스로 ‘창작의 행군’이라 부른다. 행군 기간에 쓴 소설 중 가장 최근에 집필한 작품 『오빠 새끼 잡으러 간다』를 세상에 먼저 내보냈다.

저자는 창작의 행군을 시작하며 큰 변화를 시도했다. 한 번 집필을 시작하면 초고를 마칠 때까지 아무런 예외 없이, 매일 글을 쓰기로 한 것이다. 목표량을 채우면 대개 새벽이었고, 날이 밝기 시작한 뒤에야 잠든 적도 많았다. 작품 하나를 끝내고 퇴고하다 보면 어김없이 다음 작품 소재가 떠올랐다. 호수공원을 달리다가, 윗몸일으키기를 하는 중에, 샤워하다 말고, 섬광 같은 것이 머릿속에 번뜩였다. 그걸 빨리 쓰고 싶다는 욕구가 퇴고의 고통을 압도했다. 퇴고를 마치면 곧바로 작업에 들어갔다.

염기원 작가는 강원도의 동굴, 등대가 있는 어촌마을, 짐바브웨의 마나 풀스 국립공원, 심지어 우주 공간까지, 다양한 배경에서 펼쳐지는 장편소설 여러 편을 연달아 썼다. 쉬지 않고. 십 대 청소년부터, 중년의 우주인, 수상한 연극배우, 복싱하는 여고생, 등장인물도 다양했다. 아프리카 들개나 외계인, 귀신마저 등장했다. 저자는 자신의 이야기에 깊게 빠져들었다. 독한 몰입 덕분에 창작과 루틴이라는 똑같은 일만 매일 되풀이하는, 극도로 단순하고 따분한 하루하루를 이겨낼 수 있었다. ‘이 작품까지만 쓰고 휴식 기간을 갖자’라는 다짐을 번복하기 수차례, 차곡차곡 글이 쌓여갔다.

『오빠 새끼 잡으러 간다』 역시 우연히 내뱉은 한 문장에서 시작됐다. 어느 일요일 저녁, 함께 영화를 보던 동생 얼굴이 저자의 눈에 새삼스러웠고, 순간 “오빠 새끼 잡으러 간다”라는 문장이 저자의 입 밖으로 불쑥 튀어나왔다. 저자는 곧바로 몇 분 만에 세운 이야기 뼈대를 네 줄짜리 메모로 정리해서 휴대폰에 저장했다.

오빠 새끼 잡으러 태백에서 왔다
피지컬 만렙녀의 오빠 검거 작전!

이후 이야기 뼈대에 태백이라는 살을 입혀나갔다. 대학 시절, 저자는 사업을 그만두고 글을 쓰겠다며 홀연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그때 가장 깊은 인상을 주었던 태백으로 향했다. 밤이 되면 황지 근처에 있는 페투페에 가서 생맥주를 마셨다. 옆 테이블에 있던 여자가 ‘채하나’였다는 걸, 그때는 저자도 몰랐다.

“내가 태백을 좋아하는 이유를 이 책에 모두 담았다. 최근까지도 이사를 놓고 고민을 했을 정도다. 조만간 다시 들러 소설 속 장소들을 방문하고, 황지 꼴통스 멤버들과 어울릴 생각이다. 페투페에서 만났던 그 아가씨는 지금쯤 내 말대로 소설을 쓰고 있을까?”

─작가의 말 중에서

저자는 눈앞에 생생한 태백을 소설 배경으로 담으며 희열을 느꼈다. 회룡포부터 시작해 태백 곳곳을 돌아다니며 보고 들었던 장소와 말글을 그대로 담았다. 특별한 취재는 필요하지 않았다. 팟캐스트 방송을 진행하며 수많은 사기꾼을 취재했고, 강의 시장과 스타트업 업계에도 오랫동안 몸을 담았으니까. 결정적으로, 저자에게는 서로 끔찍이 아끼는 여동생이 있다.

오빠라는 새끼는 인생에 한 번도 도움이 된 적이 없다. 매번 원치 않는 시점에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훼방을 놓곤 한다. 왜 하필 오늘이란 말인가!

“‘경력 사기 / 매출 조작 / 사기꾼 신동O의 실체를 고발한다’라는 제목의 동영상이었다. 혹시나 해서 섬네일 버튼을 누르니 익숙한 얼굴이 화면의 반을 채웠다. 역시나 오빠 새끼였다. 좀처럼 평정심을 잃지 않는 내 혈압을 급상승시키는 존재는 왜 다 혈육인가. 이건 또 대체 무슨 일인가. 이 원수가 또 무슨 미친 일을 벌인 것인가. 내 모든 계획이 틀어진 건 이때부터였다.”

─본문 중에서

유튜브를 보는데 집 나간 오빠 새끼가 나온다. 1년 반 동안 연락도 없더니 베스트셀러 작가, 스타트업 대표, 교수를 가르치는 인기 강사, 이 사기꾼 3관왕 타이틀을 달고 최강천재라는 이름으로 나타나다니. 친구 미주를 불러 하소연하자 오빠 편을 든다. 21세기 허생이라나. 허생은 무슨, 사기를 당한 게 분명하다. 하루하루 투포환을 내던지듯 힘을 쥐어짜며 살아가는 청춘 채하나. 사기꾼(?)이 된 오빠를 구하기 위해 서울로 간다.

“딱 기다리라고 그래. 오빠 새끼 잡으러 간다!”

─본문 중에서

사기꾼 전성시대,
온 세상이 사기꾼 천지다

재미, 유쾌, 몰입, 사이다 같은 청량함, 그리고 여운까지… 
우리 시대의 웃픈 자화상을 그린 『오빠 새끼 잡으러 간다』는 등장인물의 변신과 반전, 아이러니한 상황 전개로 단숨에 독자를 이야기의 세계로 빠져들게 한다.

『오빠 새끼 잡으러 간다』는 저자의 소설 중 알레고리 요소가 거의 없는 유일한 작품이다. 남매가 서로 화해하는 이야기 골자를 시간순으로 따라가며 읽으면 그만이다. 물론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 거 같냐’라는 남매의 대화처럼, 중간중간 독자에게 던지는 질문이 있긴 하다. 어쩌면 하나는 그 질문 하나에 붙들려, 내내 그 답을 찾으며 살았는지 모른다.

강천 역시 마찬가지였다. 99년생 채하나는 건강하고 평범하며 젊은 여성이다. 투포환 선수를 하다가 공장 노동자로 일하는 특이한 이력을 가졌다. 오빠가 하는 일이라면 색안경을 끼고 보는 모습이 초반부터 나오는데, 걱정되기 때문이다. 오빠를 죽도록 싫어하면서, 또 그만큼 사랑하니까. 가족이나 연인, 특히 형제간에는 서로에 대한 사랑과 증오가 동시에 작동하기도 한다. 같은 발원지에서 상반된 것들이 용출되는, 역설과 모순이다.

작중 인물이 갈리는 지점은 시대 질서에 순응하느냐, 아니면 거부하느냐에 있다. 하나와 강천 남매는 세상의 관성에서 벗어난 사람들이다. 궤도에서 이탈해 자신이 가고 싶은 길을 택했다.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걸 모를 리 없기에 ‘용감한 남매’라고도 할 수 있겠다.

하나는 운동을 스스로 포기했다고 얘기하지만, 경쟁만이 유일하고 절대적인 질서인 승자독식 시스템을 거부한 것이기도 하다. 남들의 욕망을 내 기준으로 삼지 않는 인물이라는 건 그녀의 음식 취향에서도 나타난다. 그녀가 선택한 직업 역시 그렇다. 정직하게 일해 정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공장 일을 좋아한다. 그래서 그곳에서 일하는 것에 불만이 없다.

강천의 생각은 달랐다. 오히려 사랑에 힘이 있다는 증거라면서, 자신을 잡으러 온 동생을 향해 그는 반박한다. 두 사람의 말 중 무엇이 옳은지 가려낼 수는 없는 이유는 그것이 검증 가능한 명제가 아니라 선택의 차원이기 때문이다. 

강천은 천민자본주의에 순응하는 걸 거부하고 시대와 불화하는 뾰족한 인물이다. 작중에 나오는 ‘책기꾼’ 정도는 사기꾼이 아니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그는 단호하다. ‘만인에 대한 만인의 사기 행위’를 조장하는 시스템을 방치하고 심지어 조장하는, 플랫폼 사업자들 역시 사기를 조장하거나 사기를 치고 있다고 본다. 이용권을 지급해 호의적인 리뷰가 쌓인 식당이 맛집이 되고, 각종 체험단을 운영해 별점을 높이면 인기 상품이 되기 때문이다.

“포털에서 맛집이라고 해서 찾아간 식당은 대개 형편없다. 가성비가 좋다는 리뷰를 보고 구매한 제품이 오프라인 상품보다 더 비싸고 조악한 경우가 많다. 강천은 그런 현실을 푸념하는 선에서 멈추지 않고 변화를 추구한다. 단번에 뒤집어엎을 수는 없더라도, 한 발짝씩 나아가면 세상이 나아질 것이라고 믿는다.”

─작가의 말 중에서

숨 가쁜 전개, 사이다 같은 청량함 그리고 반전(전체 줄거리)

여자 투포환 국가대표 상비군까지 했던 ‘나’는 태백에 있는 공장에서 조장으로 일하고 있는 고졸 노동자다. 구내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유튜브를 보던 중이었다. 베스트셀러 작가이며 스타트업 대표이자 교수를 가르치는 인기 강사라는 사람의 얼굴이 낯이 익다. 단짝 미주에게 문자를 보낸다. “오빠 새끼 잡으러 간다.” 

태백 시내에서 멀리 떨어진 허름한 연립주택으로 돌아왔다. 아빠가 집안을 말아먹는 바람에 이사 온 곳. 동영상 몇 개를 이어서 보니 대졸 백수인 오빠, 채강천이 ‘최강천재’라는 이름을 달고 요사스럽게 혀를 굴린다. 친구에게 사기를 당한 것도 모자라 카지노에 재산을 탕진한 아빠가 그랬듯, 별안간 집을 떠났던 오빠가 사기꾼 3관왕 타이틀을 달고 나타난 것이다. 

다음 날 아침, 아빠와 마주치기 싫어 일찍 집에서 나와 돌아다니다가 황지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탄다. 아파트 경비원인 아빠의 뒷모습이 보여 뒤를 쫓으니 여자 입주민에게 갑질을 당하면서도 좋다고 헤헤거리고 있다. 노래방을 하던 과부의 기둥서방까지 했던 아빠, 그런 아빠 때문에 고생만 하다 화병으로 죽은 엄마가 떠올라 화가 난다. 

미주가 퇴근하기를 기다리며 공원에서 캔맥주를 마시다 동동주 집에 들어갔다. 벽을 채운 낙서 중에 오빠 글씨가 보인다. “오 년을 작정했으나 겨우 삼 년. 이제 풍운을 품고 서울로 간다. 채강천.” 단골 카페에서 만난 미주는 오빠가 21세기 허생 같다고 한다. 

‘황지 꼴통스’ 모임의 핵심인 미주는 강원랜드 호텔에서 일하고 있다. 금수저 아버지에 의사 오빠를 둔 녀석이 우리 오빠를 왜 좋아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미주에게 하소연하자 오빠 편을 든다. 21세기 허생이라나. 미주 폰을 뺏어 오빠에게 전화하니 아직 대업을 이루지 못했다며 조금만 기다리란다. 자고 나서 일찍 서울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선릉역에 도착했다. 오빠가 만들었다는 회사 이름은 주식회사 럭셔리브레인. 이름부터 사짜 냄새가 물씬 풍긴다. 사업자등록번호로 조회하니 대표이사는 진동호, 오빠 이름이 아니다. 그러면 그렇지. 회사 주소로 찾아가니 공유오피스. 역시 사기를 당한 게 분명하다. 성공한 사업가가 그런 곳에서 일할 리 없다. 

기지를 발휘해 사무실에 잠입하니 럭셔리브레인 사무실은 텅 비어있고 젊은 여자가 내게 말을 건넨다. 명함을 보니 신수진, 내 기억이 맞는다면 오빠가 태백 집에 데려왔던 부잣집 딸이다. CFO에 CPA가 된 그녀는 오빠가 고객의 장례식장에 갔다며, 올해만도 여러 번째란다. 겁이 덜컥 난 나는 반장 언니에게 전화해 여름휴가를 쓰기로 한다. 

자초지종을 들은 미주가 자기도 휴가를 냈다며 서울에 온다. 꼴통답게 택시비 25만 원을 들여서. 고등학교 동창이었던 우리는 졸업을 앞두고 급속도로 친해졌다. 의대 본과생이었던 미주의 오빠를 보자마자 나는 사랑에 빠졌고, 미주도 우리 오빠를 짝사랑했다. 넷이 여행도 다녀올 정도로 친해졌다.

미주를 만나 술을 마신 뒤 특급 호텔에서 잔 다음 날, 진동호 대표를 만난다. 사전 약속 없이는 오빠를 만날 수 없다며, 올해 연말까지 일정이 꽉 찼다고 한다. 저녁이 되어 황지 꼴통스의 창립 멤버인 하연 언니를 만나 술을 마신다. 그녀는 각종 사기 사건을 들려주며 세상이 온통 사기꾼 천지라고 한다. 오빠가 ‘책기꾼’으로 의심된다며 나를 도와주겠단다.

다음 날 아침, 오빠와 인터뷰를 한다며 하연 언니에게서 연락이 온다. 간밤에 이메일을 보냈는데 답장이 왔단다. 미주와 함께 강남에서 불금을 보낸 뒤 하연 언니와 술을 마신다. 직접 만난 오빠는 책기꾼을 잡는 사람이었다며 진짜 멋진 오빠를 두어 좋겠다고 한다. 그럴 리가 없다. 미주는 오빠가 사기를 당한 게 아니라 사기를 치는 것 같단다. 혼란스럽다.

SNS를 통해 오빠의 행적을 추적한 나는 미주와 함께 북 콘서트가 열리는 곳으로 향한다. 드디어 만난 오빠는 미주를 먼저 보낸 뒤 해장국집으로 나를 이끈다. 난생처음 보는 진지한 얼굴이다. 술잔을 기울이며 허심탄회한 얘기를 한다. 오빠는 그동안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들려주며 사기를 예방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여전히 오빠 말을 믿을 수 없다. 

오빠가 동동주 집에 낙서를 남긴 날, 나도 그 자리에 있었다는데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서울행을 놓고 고민하던 오빠에게 내가 남자답게 큰일 하라는 말을 했고, 오빠는 그 길로 서울에 올라가 진동호 대표를 만나 럭셔리브레인이라는 회사를 설립했단다. 진동호, 신수진, 럭셔리브레인, 내가 의심했던 존재들에 대한 오빠의 얘기는 앞뒤가 척척 맞는다. 

인간은 무엇으로 사느냐고 오빠에게 물었다. 예전에 둘이 술을 마실 때 오빠게 내게 한 질문이다. 오빠의 답을 들은 나는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사랑에는 힘이 없다며 울먹이는 내게 오빠는 사랑에는 힘이 있다며 엄마의 죽음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들려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아득해진다.
태백에 돌아온 나는 또 미주를 만나 술을 마신다. 다음날 출근 준비로 미주는 먼저 집에 가고, 혼자 동동주 집에 들렀다. 오빠가 남긴 낙서 밑에 나도 한 줄을 남긴다. “오 년을 작정했고 드디어 일 년 남았다. 채하나.”

가을이 되었다. 공중파에 연달아 출연하며 유명인이 된 오빠가 삼 년 만에 태백에 돌아오는 날이다. 미주네 아버지가 불러서 오는 것인데, 정작 미주는 앞으로 운영하게 될 호텔 리모델링 때문에 서울에 있다. 

저녁때가 되어 오빠에게 연락이 온다. 미주네 아버지가 자신이 활동하는 정당 대표의 딸을 소개해주겠다고 했단다. 그 사실을 미주에게 알리자 번개같이 답장이 온다. 내가 요즘 쓰고 있는 소설의 제목과도 같은 내용이다. 오빠 새끼 잡으러 간다.

급진적 혁명가를 꿈꾸던 소년, 괴물 작가로 변신하다

처음 쓴 장편소설로 5,000만 원 상금이 걸린 문학상에 당선된 신인 작가 염기원. IT업계에서 잔뼈가 굵은 그는 사실 열세 살 때 《작은손작은글》이라는 제목의 책을 낸 이력이 있다. 아동문학가 윤수천 선생님의 추천으로 글짓기 대회 수상작만 모아 책으로 엮었다.

이후 그가 겪은 삶의 편력은 평생 쓸 소설을 위한 취재였고, 글 곳간에 담을 소재를 채집하는 일이었다. 지독한 불운도 겪었지만, 나중에 꼭 글로 쓰리라 다짐하며 버텨냈다. 그리하여 그의 소설에는 이 시대의 청년, 특히 온갖 시련과 마주하는 이들이 등장하곤 한다.

그가 꼽는 소설의 첫 번째 미덕은 재미다. 주인공이 재난에 가까운 일을 겪는 와중에도 독자의 입꼬리를 올리는 유머가 나온다. 우울하고, 슬프고, 아프고, 날카로운 얘기들을 펼쳐놓으면서도 해학을 잃지 않는다. 부드러우면서도 딱딱한 식감이 공존한다. 궤도에서 이탈한 평균 이하의 인물, 그들이 겪는 잔혹한 현실을 서사로 풀어놓는 그의 시선은 늘 따뜻하다. 절망을 보여주면서도 희망을 말하는 걸 주저하지 않는다.

독자들의 서평 중에는 유독 “하이퍼리얼리즘 재난소설 같다”, “어떤 스릴러보다 무섭다” 같은 표현이 자주 눈에 띈다. 몰입감이 좋아 순식간에 다 읽게 되었고, 소설 속 주인공이 된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는 평이 줄을 잇는다. 사실주의 작가로서 그는 핍진하면서 개성 있는 캐릭터를 구성하고, 무섭도록 구체적인 묘사로 독자의 마음을 후벼판다.

화자의 입을 빌린 화려한 드리블은 읽는 이로 하여금 정신을 차릴 수 없게 만든다. 독서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작중 화자를 실제로 만나 긴 얘기를 듣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과거와 현재, 주인공과 주변 인물, 단조와 장조를 오가는 빠른 변주로 사람의 혼을 쏙 빼놓는다.

바탕에는 자신만의 두꺼운 철학과 세계관을 깔아두었다. 그의 소설의 특징 중 하나, 알레고리다. 이를 모르고 읽어도 충분한 효용을 주지만, 텍스트 뒤에 살며시 숨겨놓은 작가의 의도를 발견하는 재미가 있다. 때로는 전복적인 결론에 다다르게도 한다. 소년 시절 급진적 혁명가를 꿈꾸던 그는 이제 견고한 체제에 작은 균열 하나를 일으키려 한다. 위험한 인물인 건 여전하다.

2년에 걸쳐 무려 8편의 장편소설을 쓰는 동안 그는 매일 엑셀로 집필 진도를 관리했다. 자신의 기질과 몇만 광년 거리가 있는 줄 알았던 농업적 근면성을 발휘했다. 글 쓰는 것 외에 피아노, 근력운동, 달리기만 했다. 자신만의 호흡을 유지하기 위한 루틴이다. 오늘도 그는 흰 건반과 검은 건반을 오가는 변주를 한다.

최승우 기자 kantmani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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