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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래의 미학
갈래의 미학
  • 김재호
  • 승인 2024.01.02 19: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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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윤정 지음 | 교유서가 | 84쪽

2023 경기예술지원 문학창작지원 선정작

2018년에 단편소설 「린을 찾아가는 길」로 [경인일보] 신춘문예에 당선, 2019년에 단편소설 「로마, 로마, 로마」로 제19회 ‘김포문학상’ 대상을 수상한 소설가 황윤정의 신작 소설집 『갈래의 미학』이 교유서가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은 인생의 전환점을 맞닥뜨린 사람들에게 주목한다. 그들은 뒤늦게 깨닫는 사람들이다. 어쩌면 삶을 뒤바꿨을지도 모르는 우연하고 결정적인 옛 순간을 돌아보며 오늘날의 갈림길에서 주춤한다. 해독될 수 없는 비밀로 가득한 인생에서 그들이 해답을 찾을 수 있을까? 이 책은 미스터리를 품은 두 소설로 그 질문에 다가간다.

삶에서 비극이 반복될지라도
마음의 본질은 달라지지 않으니까

세라는 말했다. 이제는 연극이나 문학 등에도 쓰이는 개념인 라이트모티프가 우리의 인생 속에도 있을지도 모른다고, 우리가 무심코 겪는 사소한 에피소드부터 심각한 사건에 이르기까지 일상의 모든 순간이 어쩌면 우리의 인생을 결정짓는 일종의 중심 악상일지도 모른다고. _10쪽

표제작 「갈래의 미학」은 운명을 스스로 만들려는 사람의 이야기다. 어느 날 화자는 버스에서 옛 친구 ‘세라’의 딸인 ‘재이’를 만난다. 그 순간이 제 인생의 ‘라이트모티프(leitmotiv)’라고 생각한다. 라이트모티프는 악극에서 반복되는 중심 악상을 뜻한다. 어떤 오페라에서는 죽음을 암시하는 선율이 반복·변주되는데 그 짧은 선율 단위가 라이트모티프다. 그 용어는 세라가 애용하는 단어였다. 화자는 세라와의 라이트모티프를 되돌아본다. 20대 때 두 사람은 나이아가라폭포를 보러 갔다가 오직 두 사람만의 결정적 순간을 만났다. 두 사람은 여행에서 무슨 일을 겪었을까?

그래도 같은 폭포인 건 변하지 않잖아.
보는 방향이 완전히 다른데도?
나는 어쩐지 울고 싶은 마음이었다.
세라는 그런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차분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관점에 따라 본질을 다르게 규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
세라의 그 말은 나에게는 폭포 이야기로 들리지 않았다.
어젯밤에 우리에게 있었던 일들을 부정할 수 없다는 이야기처럼 들렸다. _31쪽

두 사람의 해외여행은 완벽했다. 빌린 자동차로 타임스스퀘어, 자유의 여신상, 센트럴 파크 등에 찾아가며 자유를 만끽했다. 절정은 나이아가라폭포였다. 그들은 함께 폭포를 바라보며 동질감을 느꼈다. 그 순간이 두 사람을 멀어지게 한 계기가 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이 소설은 삶의 중요한 변곡점에서 서로 엇갈린 두 사람의 과거와 현재를 그린다. 그들은 서로 다른 점이 많았다. 세라는 일상의 사소한 순간들이 인생을 결정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세라의 운명론을 거부했다. 취업 실패, 가족과의 불화, 불투명한 현재를 미래의 전조로 인정할 수 없었다. 라이트모티프를 받아들인다면 제 삶도 비극처럼 변할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나’는 상대와의 차이라고 여겼던 부분들이 실은 사랑의 이유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감정적 진실이 중요한 이 소설에서 그 깨달음은 변화 없는 내일의 전조가 아니다. 이제는 운명을 제 손으로 결정지으려는 사람이 변화의 계기로 삼는 마음이다. 화자와 세라가 함께 지켜보았던 폭포는 고트섬에 의해 나이아가라폭포와 호스슈폭포로 나뉜다. 잠시 서로 갈라질 뿐 두 폭포는 이내 다시 만난다. 같은 방향으로 흐르는 아름다운 폭포에서 화자가 본 형상도 세라와 함께하는 내일일지도 모른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보름 만에 달라진 인생을 회복하고
폭력이라는 견고한 벽을 무너뜨리려면

「보름」은 동생 ‘우진’에게 벌어진 일로 불안한 서술자 ‘우현’이 등장한다. 「갈래의 미학」의 서술자가 폭포에서 어떤 징조를 발견했던 것처럼 「보름」의 주인공 우현은 불안한 마음을 가족사진에 투영한다. 오래전 우현의 가족은 태국에 놀러갔을 때 코끼리 트래킹을 하며 사진을 찍었다. 언젠가 우진은 그 사진을 보며 ‘파잔(phajaan)’ 의식을 이야기했다. 파잔은 학대로 아기 코끼리의 정신을 파괴하는 의식이다. 그 끔찍한 과정이 끝나고 겨우 살아남은 코끼리만 관광 자원에 투입된다. 파잔 이야기를 떠올리며 우현은 어쩌면 우진의 인생이 달라질지도 모른다고 불길하게 예감한다.

우현은 우진의 보름에 관해 생각했다. 우진이 S를 처음 만나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보름. 봄이 느릿느릿 움직이는 것처럼 보여도 이십 일 만에 온 나라를 삼키는 것처럼, 우진의 일상을 서서히, 그러면서도 순식간에 집어삼켰던 그 보름이라는 시간을. 단지 보름 만에 모든 게 엉망이 될 수 있다는 것이, 그렇게 짧은 시일 안에 그토록 많은 게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_69쪽

우현은 보름 만에 인생이 달라진다는 사실에 경악한다. “세 살짜리 아기가 찬찬히 걷는 속도”로 이십 일 만에 세상이 봄으로 가득해지는 것처럼 한 사람의 삶도 순식간에 뒤바뀐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무력감에 휩싸인 우현은 우진이 시달리는 폭력에 어떻게 대항할지 고민한다. 동시에 왜 자신과 동생이 그런 끔찍한 일을 겪어야 하는지 생각한다. 그런 일을 겪게 될 것이라고 과거에 예상하지 못했다고 좌절한다. 그런데 과연 정말 예상하지 못했을까? 어쩌면 눈앞에서 폭력을 목격하고도 자신과 무관한 일이라며 외면했던 것은 아닐까?

이 소설은 방관자와 피해자의 경계를 허물어뜨린다. 과거에 학교 선배가 부당한 일을 겪었을 때 우현은 침묵하고 방관자들의 생각에 동조했다. 그때만 해도 선배의 이야기가 자신과 무관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 소설은 우현이 지켰던 침묵이 가해의 굴레를 견고하게 한다고 암시한다. 우현의 학교 선배가 겪는 폭력과, 우진이 직면한 폭력을 교차시키는 플롯은 방관자도 언젠가 범죄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내비친다. 침묵을 깨고 이야기를 시작할 때 우리는 폭력이라는 “상호작용의 견고한 흐름”에서 벗어날 수 있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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