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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귀찮은 글쓰기
이토록 귀찮은 글쓰기
  • 최승우
  • 승인 2023.12.28 10: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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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근우 지음 | 시대의창 | 208쪽

그럼에도 굳이 글을 쓰겠다는
그 마음에 대하여

글쓰기는 설거지와 다르다. 노동한 만큼 하나씩 쌓여가는 접시를 획득할 수 있는 설거지와는 달리, 얼마든지 허접하고 통찰력 없는 문장으로 종이와 바이트를 낭비하며 공백을 채워나갈 수 있는 게 글쓰기라는 점에서 그렇다. 게다가 잘 쓰겠다고 마음을 먹는다고 좋은 글을 쓴다는 보장은 없다. 써야 할 이유는 불확실하지만 시작하지 않을 이유는 선명하고도 다양하다. 그래서 “글을 쓰는 건 정말이지 너무나도 귀찮은 일이다”.

이 정도면 그냥 마음 편히 잘 읽으며 살아도 되겠건만(하지만 이 역시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굳이 글을 쓰겠다는 그 마음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딱히 탁월한 재능을 인정받은 적은 없었지만, 어찌어찌 하루를 살아가는 보통의 재능과 노력을 어쨌든 쌓아가다 돌아보니 칼럼니스트이자 마감노동자로 왕성하게 활동하게 된 작가 위근우가 지금까지의 자기 작업들을 돌아보며 ‘글쓰기에 관한 책’을 출간하였다. 논쟁적인 문화비평 글로만 구성된 10만 팔로워 인스타그램 계정 역시 운영 중인 그의 ‘글’과 ‘글쓰기’ 그리고 ‘글 쓰는 삶’에 관한 이야기를 여섯 개의 키워드(재능, 트레이닝, 실전, 논쟁, SNS, 멘탈)로 풀어냈다.

글쓰기 기술부터 멘탈 관리까지 재밌는 내용을 다뤘다. 무엇보다도 때론 미루고 회피하다 어느 순간 온 힘을 다해 마감하고 하루 정도 축배를 드는, 관성과 고단함과 잔꾀와 애정이 교차하는 우당탕탕 인생 속 작고 멋진 순간들에 관한 이야기다.

세상을 지탱하는 건 대다수 게으른 사람들(우리들!)의 일말의 자부심, 향상심 그리고 책임감의 퇴고 같은 누적물이다. 글과 말로 공론장의 영역에서 일하고 생활하는 사람들도 그 속에 자리 잡고 있다. 한 마감노동자의 글쓰기 이야기가 또한 보통의 삶에 관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러니 누구도 이토록 귀찮은 글쓰기를 놓아버릴 수는 없다. “한 번 마음먹었던 거 두 번은 마음먹게, 망한 것 같아서 포기하고 싶을 때 그래도 완성은 해볼 수 있게.” 평범하고 흥미로운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게 되는 이유다.

지은이_ 위근우

2008년 대중문화 비평 웹진 《매거진t》에 입사해 대중문화 전문 기자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후 웹매거진 《아이즈》 팀장으로 재직하다 현재는 비정규 마감노동자로 활동 중이다. 쓴 책으로 《다른 게 아니라 틀린 겁니다》, 《뾰족한 마음》, 《프로불편러 일기》, 《젊은 만화가에게 묻다》가 있다.

차례
들어가며

1. 고만고만한 재능도 재능이다 - 글쓰기와 재능
2. 기분만 내지 말고 진짜 연습을 해봅시다 - 글쓰기 트레이닝
3. 마감, 희노애락 아니 노애노애의 드라마 - 글쓰기 실전
4. 남들은 싸움박질이라 부르고 나는 대화라 말한다 - 논쟁으로서의 글쓰기
5. ‘관종’ 경제와 공론장 사이에서 - SNS 시대의 글쓰기
6.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도 없지 욕은 먹지 - 글쓰기와 멘탈 관리
나가며

출판사 서평

매혹적인 노애노애怒哀怒哀의 드라마를 향한 열정과 욕망

17년차 마감노동자이자 칼럼니스트의 글쓰기는 꿈을 향해 정진한 자아실현의 과정이자 뛰어난 발상을 통해 ‘글빨’을 휘날리는 휘황찬란한 과정일까. 사람에 따라 다를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저자에게는 그렇지 않다. 여전히 마감을 위한 글감 찾기, 글쓰기, 퇴고의 과정은 지난하고 힘들다.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것은 단지 시작일 뿐이며, 한정된 지면 내에서 독자의 눈길을 끌면서도 여론과 분위기에 편승하지 않는 직업적 윤리를 견지해야 하고, 각종 즐거운 삶의 기제들과 잠까지 포기하며 쓴 글이 공론장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무엇일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한다.

그럭저럭 좋은 글을 쓰더라도 일부의 동의와 그 수배에 달하는 반론(타당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을 접해야 한다. 게다가 그것이 비판적인 글쓰기라면. 과연 글쓰기는 희노애락보다는 ‘노애노애’의 드라마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왜 글을 쓰는가? 저자는 말한다. “글쓰기에 대한 매혹은 언어를 통해 세계를 나의 관점으로 재조립하는 것에 대한 막연한 동경”이면서 “그 작업을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해냈을 때 따라오는 상징 권력에 대한 욕망”이라고. 거기엔 “정치적이고 공적인 열망”과 “불순물 같은 허영심”이 분리하기 어려울 정도로 뒤섞여 있다고. 중요한 것은 “스스로를 기만”하지 않으면서 “공론장이 글쓰기에 선행한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자의식을 줄이되 큰 책임감을 가지”고 나의 글을 쓰는 것이라고. “왜 독자들이 나를 사랑하지 않느냐”는 질문 따위는 버리고 “최선을 다해 좋은 글을 타협 없이 쓸지”를 고민하자고. 나 자신의 명예욕을 인정욕구로 떨어뜨리지 말고 “공적인 명예와 사적인 애정을 개념적으로 구분”하라고. 사실은 “우당탕탕 여기까지 온” 삶이지만, “산만한 일상 속에서 각각의 삶의 궤적을 자원 삼아 어떻게든 모순을 줄여보기 위해 아등바등”하면서 쓰고 또 써나가는 것이 결국 글쓰기이고 삶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저자는 그렇게 우당탕탕 지난 17년을 직업적으로 글쓰기를 해오며 살아왔다. 

키워드: 재능, 트레이닝, 실전, 논쟁, SNS, 멘탈 관리

저자는 여섯 개의 키워드를 바탕으로 글, 글쓰기, 글 쓰는 삶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거기에는 글쓰기의 기술도 있고,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마음가짐도 있으며, 독자와의 소통, 세계와의 관계 맺음에 대한 진솔한 고민도 있다.

1장(재능)에서는 직업적 글쓰기 전선에 뛰어들게 된 과정을 담았다. 사실은 고만고만한 재능으로, 별다른 특별한 계기 없이 갖게 된 직업이지만, 그 지지부진함이야 말로 어쩌면 일반적인 보통 사람들이 겪는 멋진 성장 과정일 수도 있을 것이다.

2장(트레이닝)에서는 글쓰기 실력을 높일 수 있는 방법들을 안내한다. 필사, 구조 모방, 위트, 인용, 길티플레저, 루틴 등의 세부적인 내용을 글쓰기와 연결하여 살필 수 있다.

3장(실전)에서는 칼럼을 기준으로 문단을 구성하고 마감까지 진행하는 과정과 그 안에서 중요하게 짚어야 할 사항들을 살펴보았다. 잠도 안 자며 썼다 해도 시원찮은 글이 언제나 나올 수 있는 이 세계에서, 어떻게 자신을 지키고 최대한 좋은 글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진솔한 이야기들을 담았다. 

4장(논쟁)에서는 타인이 본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 사회적 성격을 획득하는 ‘나의 글’을 어떻게 공론장 속에서 이해할 것인지, 논쟁하는 글쓰기가 왜 궁극적으로는 진정한 대화와 발전을 향하는 글쓰기인지 설명했다. 진정한 겸손함은 “상대의 논리를 굴복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할 때” 비로소 말할 수 있는 것이라는 저자 특유의 관점을 밝혔다.

5장(SNS)에서는 저자 10만 인스타그램 팔로워 계정의 허와 실, ‘좋아요’의 단맛에 취하지 않고 최대한의 공적인 독자와의 거리를 지키기 위한 저자의 노력 등을 담았다. 특히나 자기 PR과 브랜딩이 주목경제라는 이름으로 작가-지식인-셀럽 세계를 흡수하는 지금의 상황에서 (누군가에게는 꼬장꼬장한 꼰대로 보일지 몰라도) 글의 성격과 직업적 위상을 지켜내기 위해 선택한 방법을 밝혔다.

6장(멘탈 관리)에서는 기이한 “명예욕”을 지닌 작가라는 직업군의 한 사람으로서, 논쟁적인 글쓰기 속 수많은 분쟁들에서 어떻게 작가적 정체성과 정신의 건강을 지켜왔는지 밝혔다. 저자는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자기 스스로의 글쓰기 동력을 직시하고 솔직해지는 것이며, 불특정 다수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것에 대해 의연”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바꿔서 말하면 “사랑받을 수 있을 것 같은 방향으로 기울어”지지 않는 것). 이는 또한 작가에 대한 사랑을 독자에게 강요(또는 갈구)하지 말고, 자신의 더 큰 삶 속에서 소중하게 가꾸라는 말이기도 하다.

공감 그리고 도움: 망한 것 같아서 포기하고 싶을 때 그래도 완성은 해볼 수 있게

이 책의 존재 가치는 다른 모든 글들처럼 미리 존재할 수 없다. 그럼에도 저자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건 “작은 공감과 도움”이다. “이토록 귀찮은 글쓰기를 그럼에도 하겠다고 마음먹은 이들”에게, “한 번 마음먹었다 포기할 거 두 번은 마음먹을 수 있게, 쓰다가 망한 것 같아서 포기하고 싶을 때 그래도 완성은 해볼 수 있게”. 17년이나 끊임없이 일감을 구해 글을 썼고 작지도 크지도 않은 명성을 얻고 여러 논쟁 속에서 꽤 자주 회자된 저자가 “보통 사람의 글쓰기”를 이야기하는 것이 어색해보일 수도 있지만, “어제와 똑같아 보이는 오늘을 사는 재능과 노력”으로 “시시하지만 만만치 않은 긴 일상과 짧은 성취의 순간이 반복”되어 모여 그의 지금이 생겨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인생이란 대개 그런 모양새”고, “글 쓰는 삶도 별다를” 게 없다. 이 책이 글쓰기 그리고 삶에 대한 작은 공감과 도움을 말할 수 있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책 속으로

이 책의 제목과도 연관된 건데 나는 글 쓰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대중문화평론가가 되겠다고 했던 대학생 때도, 직업적 글쓰기를 하는 지금도 그러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건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다. 글 쓰는 걸 좋아하는 것과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건 전혀 다른 개념이다. 아마 글 쓰는 걸 좋아하는 것도 글쓰기의 재능이리라 짐작은 하지만, 나로선 알 수 없는 일이다. 단지 일 자체를 좋아할 수 있는 것처럼, 좋아하지 않아도 하는 것 역시 굉장히 중요한 동기가 될 수 있다고 증언할 수 있을 뿐이다. 17쪽

더 좋은 건, 내가 왜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걸 좋아하느냐는 질문을 파고드는 과정에서 나 자신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길티플레저에 대해 써본다는 건 스스로에게 그 어느 때보다 솔직해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무언가를 놓기 어렵다고 할 때, 거기엔 정말 포기하기 어려운 취향이 있을 수도, 내 안의 어떤 병리적인 결핍과 욕망이 있을 수도, 나만의 독특한 사적 윤리관이 있을 수도 있다. 스스로 이것을 아는 건 매우 중요하다. 높은 수준의 자기 이해를 가져야만, 앞으로 내가 무엇을 쓸지에 대해, 또 무엇을 쓰고 싶은지에 대해, 또 내가 실제로 어떤 의도로 글을 쓰고 있는 것인지에 대해 인식할 수 있다. 59쪽

가장 쓸데없는 짓은 반성이다. 반성이 나쁘다는 게 아니다. 이미 부정적 감정이 스스로에게 쏟아져 들어올 때 굳이 짐을 하나 더 얹을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원고가 망한 이후 바로 떠오른 그 이유와 그에 대한 반성이라는 건 높은 확률로 옳지만 대단한 성찰은 아닐 것이다. 좀 더 좋은 글감을 미리 찾지 못해서, 글의 방향이 정해지기 전에 좀 더 사전조사를 하지 않아서, 등등등. 맞는 얘기지만 다음에 안 그러면 되는 일일 뿐이다. 반성은 언젠가 해야 하지만, 자괴감에 빠졌을 때의 반성이란 사고의 진전보다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부정적 감정의 순환을 만들어낼 뿐이다. 무엇보다 이런 식의 패턴은 반성을 습관화한다. 88쪽

서로의 옳음을 인정하자는 상대주의적 태도와 진정성이라는 가치의 대두는 서로 착종되어 있는 셈이다. 너무나 많은 미디어와 자기계발의 언어뿐 아니라 글쓰기에 대한 조언에서도 진정성을 강조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다시 말하지만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진정성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선 부정하지 않겠다. 다만 진정성이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의 두 배 세 배 이상, 객관적 진실과 도덕적 옳음에 대한 요청이 있어야 한다. 세상에 도덕적으로 옳은 개소리는 없지만, 진정성 있는 개소리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105쪽

‘좋아요’의 단맛을 조금 보고 독자와의 공적인 거리를 포기한다는 건 본말이 뒤집힌 일이다. 공과 사를 구분하기 너무 어려운 세상이 됐다는 것이, 그걸 그냥 놔버려도 된다는 뜻이 될 수는 없다. 오해를 피하자면, 나는 자신의 삶을 콘텐츠로 제공하거나 친목을 포함한 소통을 하는 인플루언서들이 그릇된 길을 가고 있거나 자신의 팬을 고객으로만 본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콘텐츠의 성격과 팔로워와의 거리다. 공적이고 비판적이고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 글쓰기가 나의 콘텐츠라면 그 콘텐츠를 제대로 만들기 위해 독자를 포함한 세계와 억지로라도 공적인 거리를 확보하는 게 맞다. 그것이 SNS와 자기 PR의 시대에 내가 선택한 생존 방식이다. 새로운 기회를 창출하진 못해도 멍청한 짓을 할 확률은 최대한 제거하는 것. 166쪽

글을 쓰는 사람들은 ‘왜 날 미워하지?’라는 질문이 아니라 ‘왜 날 사랑하지 않지?’라는 질문에 더 쉽게 비뚤어진다. 전자의 경우 이해하긴 어렵지만 어쩔 수 없는 불가해한 사건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는 마치 내 정당한 몫을 누군가에게 뺏긴 부당한 사건으로 이해한다. 정당한 내 몫을 얻지 못했다는 기분은 내가 생각하는 나와 실제 세상에 받아들여지는 나 사이의 간극을 만들어내고, 그 간극은 가장 안 좋은 의미의 비대한 자의식으로 이어진다. 그럭저럭 멀쩡한 글을 쓰다가 망가진 이들은 거의 대부분 이 과정을 통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다. 나와 내 글을 사랑해주는 건 독자의 의무가 아니다. 그러니 실망할 필요 없다. 얼마나 최선을 다해 좋은 글을 타협 없이 쓸지만 고민하면 된다. 201쪽

“죄송합니다. 젤다가 너무 꿀잼이었습니다.” 이번 책 원고의 진행 상황을 묻던 편집자에게 이실직고하며 메일에 썼던 문장이다. 〈젤다의 전설: 왕국의 눈물〉이 올해 5월에 발매되지만 않았다면 이 책은 2~3개월 정도 일찍 나왔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쩌겠나. 글을 쓰는 건 귀찮은 일이다. 반면 하이랄 대륙에서 광물을 캐고 보물을 찾고 메뚜기를 잡고 퍼즐을 풀고 고블린 무리에게 시비를 거는 게임 속 일거수일투족은 매 순간 환희와 즐거움으로 가득했으며 무엇보다 보람찼다. 젤다 공주의 헌신을 되짚어가며 마왕 가논을 쓰러뜨리고 하이랄의 평화를 되찾는 여정이란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

다른 모든 것은 하찮아졌다. 하물며 이토록 귀찮은 글쓰기 따위야. 게으름을 정당화하려는 건 아니다. 단지 17년차 마감노동자에게 꾸준한 글쓰기란 결국 그보다 훨씬 큰 삶의 작은 일부이자 종종 후순위로 밀리는 일이며, 매일매일의 성실함과 사명감보다는 때론 미루고 때론 회피하다 그럼에도 어느 순간 온힘을 다해 마감하고 다신 꼴도 보기 싫다는 마음으로 하루 정도 축배를 드는 그런 과정의 연속이라는 걸 말하고 싶을 뿐이다. 출근하기 전부터 퇴근 시간만 기다리는 만년 과장이 그럼에도 자신의 일을 곧잘 하고 그럭저럭 커리어를 유지하는 것처럼, 글 쓰는 삶 역시 관성과 고단함과 잔꾀와 일말의 애정이 교차하는 중에 그래도 글쓰기를 놓지 않는 것에 가깝다. 205쪽

최승우 기자 kantmani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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