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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자 70% 부실 학술지 1~2회 투고 경험…‘권고 저널’ 공개 예정
연구자 70% 부실 학술지 1~2회 투고 경험…‘권고 저널’ 공개 예정
  • 임효진
  • 승인 2023.12.22 08: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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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수학회 ‘학술활동 건전성 강화’ 포럼
손재범 연세대 교수(수학과)는 지난 15일 열린 포럼에서 수학분야 논문을 중심으로 '학술단체의 자율적 학술활동 건전성 강화 실천방안 연구'에 대해 주제 발표를 했다. 사진=임효진

대한수학회는 지난 15일 한국과학기술회관에서 2023 수학분야 학술활동 건전성 강화 포럼을 열었다. 주제는 ‘건전한 학술활동 문화의 확산’. 이날 ‘부실 학술지’ 대응 방안에 대한 논의가 주로 이뤄졌다. 

대한수학회가 부실 학술지 게재 문제에 주목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학계에 건강한 생태계가 조성돼야 젊은 연구자들이 훌륭한 연구를 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박종일 대한수학회 회장(서울대 수리과학부)은 “내가 노력한 만큼 인정을 받는 환경이 조성돼야 힘들어도 계속 연구할 수 있는 동력이 된다”며 “젊은 연구자들에게 한국의 연구 생태계가 건전하다는 걸 인지시켜 주는 게 굉장히 중요한 사명”이라고 밝혔다. 

연구자들이 부실 의심 학술지에 논문을 투고하는 이유는 뭘까. 이날 손재범 연세대 교수(수학과)는 ‘학술단체의 자율적 학술활동 건전성 강화 실천방안 연구’ 주제발표에서 “연구자들은 수학의 학문적 특성이 고려되지 못하고 수학과의 승진 기준이 심사 기간에 비해 지나치게 높아 이 기준을 넘기기 위해 부실 학술지에 게재했다”라고 밝혔다. 또한 연구업적 평가와 인센티브 가 저널의 임팩트 팩터(IF)와 연관돼 IF를 기형적으로 올린 부실 학술지에 게재하는 사례가 늘게 됐다고 했다. 

“수학은 인용횟수 적어 IF 평가 불리”

수학 연구자가 더 어려움을 토로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IF는 인용 횟수로 논문을 평가하는데, 생명·화학·물리 등의 학문분야는 유기적인 영향을 주고받으며 인용하는 횟수가 많지만, 수학은 다른 분야에 비해 인용되는 사례가 적다. 수학은 수학자만이 인용하고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 연구업적을 인용 횟수를 바탕으로 정량적으로 평가했을 때 수학과 같은 기초 학문은 적절한 평가를 받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실제로 ‘전국 대학 수학관련 학과 연구업적 평가 조사’ 결과, 대부분 대학에서는 부실 학술지에 대한 필터링이 없고, 정량적 수치로 연구업적을 평가해 승진, 인센티브, 박사졸업 요건 등에 반영했다. 응답 학과의 86%가 IF를 근거로 인센티브를 차등 지급한다고 답했고, 50%는 박사졸업 요건에 SCIE 저널 논문에 게재 승인을 요구한다고 밝혔다. 

대학에서 교수를 평가할 때 논문의 IF지수를 토대로 평가하기 때문에 ‘약탈적 학술지’라고 알려진 부실 학술지를 양산하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분석이다. 

중앙대, ‘투고 주의’ 학술지 평가 시행

하지만 모든 대학이 이 문제에 대해 손을 놓고 있는 건 아니다. 이날 토론자로 나선 강창희 중앙대 교무처장은 “중앙대는 2021년부터 ‘투고 주의’ 학술지를 차등 인정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중앙대는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에서 학술지 리스트를 추천 받아 ‘부실’, ‘주의’로 분류된 학술지는 일체 인정하지 않고, ‘논쟁 중’으로 분류될 경우 한시적으로 재임용과 승진 평가에서만 인정하고 있다. 

중앙대는 ‘투고 주의’ 학술지 정책을 시행한 후, 부실 학술지로 거론되는 특정 출판사에서 출판하는 사례가 급격히 감소했다고 밝혔다. 2021년에 20%까지 최고점을 찍은 이후, 2022년에는 10%, 올해는 9.4%로 절반 이상 감소했다.

한국연구재단도 이 문제를 심각하게 인지하고 있다. 한국연구재단은 지난 1년간 ‘부실 의심 학술지 대응 TF’를 만들어 논문을 질적으로 평가하기 위한 방안을 찾기 위해 고심했다. 지난해 하반기 중견 연구자 평가 때 평가위원에게 부실이 의심되는 학술지에 논문이 게재됐다면 좀 더 주의 깊게 봐달라는 안내문을 송부했다. 내년에는 한국연구재단에서 지원하는 기초연구사업 과제 신청서에 IF를 쓰는 칸을 삭제하기로 했다. 

박숙미 한국연구재단 디지털혁신본부장은 “질적 평가를 위해 내년도 중견 연구자 평가부터는  연구 평가자에게 논문 수가 아니라 논문이 얼마나 피인용이 잘 됐는지, 과제는 얼마나 많이, 또 꾸준히 수행했는지 여부를 알 수 있는 참고 자료를 제공하려고 계획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지난 15일 한국과학기술회관에서 열린 2023 수학분야 학술활동 건전성 강화 포럼에 참석한 연구자들이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임효진

대한수학회, ‘권고 저널’ 공개 예정

대학과 한국연구재단에서 부실 학술지에 게재된 논문을 걸러 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보다 근본적인 문제해결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됐다. 

손재범 연세대 교수가 대한수학회 정회원을 대상으로 진행한 ‘부실의심 학술지 출판에 대한 인식 및 개선방향 설문조사’에 의하면, 응답자의 90% 이상이 수학 분야 학술지의 블랙리스트와 우수학술지 명단을 마련해야 한다고 답했다. 그 중 3분의 1이상은 학술지 명단을 공표하는 게 필요하다고 응답했다. 

하지만 강순이 한국여성수리과학회장(강원대 수학과)은 부실 학술지 공개 방안에 대해 조심스러운 입장을 내비쳤다. “블랙리스트를 만드는 것에 찬성했으나 최근에 생각이 바뀌었다. 제가 아는 분 중에 평생을 성실하게 연구한 분이 있는데, 부실 학술지에 논문을 투고했다. 왜 그랬냐고 물어보니 SCIE 학술지의 IF가 높아서 일체 의심하지 않았다고 했다. 부실 학술지라는 인식을 못하고 한 일인데, SNS에서는 비난이 이어진다”라고 말했다.

실제 손재범 교수는 주제 발표에서 연구자의 70% 가량이 부실 학술지에 1~2회 투고한 경험이 있다고 했다. 대다수는 부실 학술지라는 것을 모르고 투고했다는 것이다. 

한국 학계와 비슷한 내홍을 겪고 있는 중국은 중국과학원 문서정보센터에서 총 65개의 저널 경고 목록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노르웨이도 화이트리스트와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제공하며, 전 세계 학술지를 4등급으로 분류하는 자체적인 기준을 마련했다. 이탈리아도 259개 저널에 등급을 부여하고 있다. 

손 교수는 “블랙리스트를 만드는 건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고, 괜찮은 저널을 추려 발표하려고 준비하고 있다”라고 밝혔다. 중국에서 발표한 부실 의심 학술지를 제외했고, SSCI 저널 Q3(상위 50~70%) 수준으로 명단을 만들고 있다. 대한수학회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할 예정이다.

박종일 대한수학회 회장은 “선진국은 학회 스스로 자정 능력을 갖췄다. 한국도 커뮤니티에서 동료평가 형태로 연구업적을 평가할 수 있는 단계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엄창섭 대학연구윤리협의회 회장(고려대 의과대학)은 “대한수학회가 추천 학술지 목록을 공개하겠다는 시도 자체가 굉장히 큰 의미가 있다”며 “다른 학회에도 영향을 미쳐 바람직한 방향으로 좋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임효진 기자 editor@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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