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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빛들
먼 빛들
  • 김재호
  • 승인 2023.12.11 09: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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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유안 지음 | 앤드(&) | 224쪽

현재의 삶과 여전한 자리에 
고민하고 몰두하는 세 사람,
이들을 비추는 
밝고 깊은 빛.

소설가 범유진, 문화예술기획가 유경숙 추천
최유안 작가 신작 연작소설

사회적인 관계망과 일의 의미를 조망하며, 그 안의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촘촘하게 엮어온 작가 최유안이 앤드에서 출간하는 첫 소설. 최유안 작가는 특히 오피스를 중심으로 조밀한 서사를 풀어내는 강점을 《먼 빛들》에서 명료하게 발휘한다. 서로 다른 세 여성의 ‘자리’와 삶에 대한 고민과 그들이 몰두하고 어쩌면 목표하는 것에 대한 태도, 그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연결과 연대의 이야기를 3부작의 연작소설로 구현했다.

대학교수인 은경, 문화예술 행정기관 센터장인 민선, 비엔날레 예술 감독인 초희는 일반적인 사회적 기준에서 지위가 높은 인물들이다. 중간관리자 이상의 여성을 문학에서나마 접하기 어려웠는데, 이들의 상향된 지위는 언뜻 높아진 여성의 사회적 진출과 지위의 상승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세 여성은 각자 일과 삶에 나름의 만족을 느끼고 성취를 경험하며 몰두하는 듯 보인다. 사실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것은 이들을 대하는 사회적 시선이 때때로 답보 혹은 회귀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들을 비추는 한낮의 밝고 깊은 빛이 세 사람이 나아갈 방향이 그것으로 그치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걸 전망한다. 
 
최유안 작가는 인물들의 ‘자리’를 여과 없이 보여준다. 사회적 자리, 삶의 자리, 마음의 자리. 그 자리는 때때로 그저 괜찮고, 어느 때엔 불편하거나 혹은 편안하다. 불편함과 편안함 어디쯤에 모호하게 머무르기도 한다. 상황이기도 감정이기도 한 자리를 작가는 온전히 드러내면서 어떤 자리에서고 나아갈 수 있다고, 나아가면 희미하게나마 나직이 찾아드는 ‘긍정’이 있을 것을 보여준다. 은경과 민선, 초희 사이를 유영하는 밝고 깊은 빛은 그들을 슬며시 비추고, 느슨히 묶는다. 그렇게 빛은 세 사람을 연결한다. 이들은 알지 못하지만, 각자의 자리에서의 쉼 없는 노력으로 지금의 여성을, 사람을, 관계를 그리고 일과 사회를 연대한다. 

차례 

여은경.

최민선.

표초희.

은경에게는 자신감이 있었다. 학교 밖에서는 직장인으로서 경력을 꾸준히 쌓았고, 진로를 틀어 학교에 들어와서도 열심히 일했다. 타지에서 혼자 일하고 지내며 모르는 새 근육처럼 쌓여 간 것들도 있었다. 전장에 나가 일하지 않으면 쌓을 일 없는 근육. 그것은 은경의 체력을 키우고 살을 단단하게 했다. (53p) 

은경의 휴대폰 위로 새로운 글자들이 비슷한 진동 소리를 내며 떠오르기 시작했다. 은경은 그렇게 글자들이 떠오르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었다. 낯선 자음과 모음들 위로 새로운 자음과 모음이 올라올 때마다 화면이 새로고침 되면서 글자가 폭죽처럼 쏘아졌다. 그 모습이 마치 전쟁터의 폭격처럼 느껴졌다. (73p)

아무래도 요즘 민선에게 문제가 있는 걸지도 모른다. 아니면 조직이라고 이름 붙여진 사회에 적응해 가는 자체가 딜레마일지도 모르지. (85p)

민선은 그 점을 자주 허탈하게 생각했다. 10년 넘게 일했지만 뭐 하나 제대로 깊이 있게 아는 것 같지 않았고, 그렇다고 뭐든 두루 잘하는 것도 아니었다. 제너럴리스트와 스페셜리스트. 민선은 자신이 그 두 단어의 경계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87p)

군더더기 없고 매섭지 않은 평안. 수초든, 수분이든, 혹은 얼마의 시간이든 의심 없이 존재하는 안온. 그것은 아마도 결혼이 줄 수 있다던 안정의 순간에 가까웠다. (183p)

그러나 그 순간에, 단 한 사람 윤재가 두 사람 사이에 막 피어나기 시작한 시간의 형체를 들여다보고 있다는 사실이 초희를 안심시켰다. 초희에게 그것은 용기였고, 의지였으며, 그런 마음이라면 괜찮다고, 초희는 생각했다. (213p)

그 빛을 마치 작품인 것처럼 감상하는 두 사람을 표초희가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곳의 공기를 함께 들이켜며, 천장에서 쏟아지는 빛을 받으며, 같은 시간을 사는 80억 인구 중 어떤 우연에 이끌려 이렇게 함께 서 있는 줄 모른 채, 그렇게 겨든당 한쪽에 서서 그들은 숨을 나눴다. (217p)

작가의 말

이 책의 초고를 쓸 때 말 그대로 정말 재미있던 기억이 난다. 책의 큰 줄기가 정리된 뒤에 다른 원고들을 쓰는 사이사이 이 책에 실릴 소설을 한 부 한 부 써 나갔는데, 이 원고를 잡을 때마다 속도가 너무 잘 붙은 탓에 쓰면서 내심 걱정했다. 진짜 좋은 소설은 한 땀 한 땀 쓰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소설 쓰기가 이렇게 재미있어서야. 그럼에도 아침에 눈을 뜨면 어제 쓰다 멈춘 부분의 다음을 얼른 잇고 싶어 책상 앞으로 달려갔다. 쓰는 내가 이토록 재미를 느끼는 소설을 써도 될까 싶었고, 이런 글을 쓰다가 누군가에게 혼이라도 날 것 같았다. 

책을 다 쓴 이 순간에 돌이켜 보면 소설을 쓰는 일은 늘 내게 그랬다. 억척스러운 생활인인 나를 능청스러운 괴짜나 멋진 외톨이로 만들어 주는, 내게는 다만 경험하는 것으로 충만한 일. 이런 마음이면 소설을 책으로 묶어내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이야기의 주제를 밖으로 꺼내 놓을 수 있는 인물들은 일하는 사람들이었는데, 이왕 일하는 사람들을 무대 위로 올릴 거라면 굵직한 경계에 서 있는 사람들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내가 불러낸 이들은 고위직, 권력을 지닌 여성이 되었다. 이미 특별한 사례가 아닌데도 그들은 여전히 안줏거리가 된다. 나는 어째서 그들의 대부분이 권력을 밖으로 분출하지 않고 기꺼이 초연해지는지 궁금했고, 소설의 인물과 함께 실험해 보고 싶었다.

추천의 말

치앙마이의 사원에서 창가에 서 있던 한 여자를 떠올렸다. 어둑한 사원 안에서 기도하듯 눈을 감고, 창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빛 안에 우두커니 서 있던 여자. 나는 그 여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그가 어떤 경로를 거쳐 그곳에 있는지, 어떤 바람을 가졌는지. 그러나 잠시간 빛 속에 녹아들고 싶은 그 마음만은 어쩐지 알 것 같았다. 

《먼 빛들》의 인물들은 치열하다. 때로 삶은 다정함조차 날카롭게 갈아 치열해지라고 외친다. 그렇게 갈아 낸 조각들을 갑옷처럼 두르고 바쁘게 뛰어야만 한다고. 그러나 아주 사소한 순간, 바닥에 맺힌 빛의 웅덩이를 발견하는 그런 때면 멈춰 서서 빛 속에 발끝을 가만히 넣어 보게 될 때가 있다. 한 박자 늦게 웅덩이 안으로 들어온 누군가의 발끝과 끝이 닿을 때, 빛은 각자의 것이자 모두의 것이 된다. 《먼 빛들》을 읽는 것은, 멀지만 사라지지 않는 빛을 손톱 끝에 새기게 되는 일이다.

                                                                                  작가 범유진

《먼 빛들》은 소설이자, 문화계를 구성하는 전문가·행정가·실연자의 각기 다른 입장과 시각을 예리하고도 차분하게 묘사한 리얼 다큐이다. 조용하지만 담대하게 현실을 밟아 가는 대학교수, 정치적 조직 논리와 평범한 직업인 사이에서 고민하는 행정가, 자유로운 창작을 꿈꾸지만, 관가의 행정 논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전시기획자. 문화계 사람이라면 누구든 자신의 이야기라고 할 법한 현실의 한 토막을 기가 막히도록 사실적이고 설득력 있게 끄집어낸다. 

《먼 빛들》을 읽다 보면 어느 순간 책에서 빠져나와 현실적 자아를 만나게 된다. 여성으로서, 평범한 직업인으로서 세상에 먼저 틀을 세우고 포진한 사람들이 제 마음대로 구축해 놓은 기준에 어긋나는 순간, 그저 불순물 같은 존재가 된 것 같은 그런 느낌. 여성 직업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겪어 보았을 정중하지만 무례하고, 부당한 폭력적인 현실을 그대로 옮겨 놓은 이 책은 바로 지금의 이야기다.

                                                                         문화예술기획가 유경숙 

저자 소개 

최유안
201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지은 책으로 『보통 맛』, 『백 오피스』가 있고, 함께 지은 책으로 『집 짓는 사람』, 『페페』, 『우리의 비밀은 그곳에』 등이 있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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