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7 23:10 (토)
천사는 환상 아닌 인간의 실제적 사건
천사는 환상 아닌 인간의 실제적 사건
  • 조정옥
  • 승인 2023.12.21 08:5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역자가 말하다_『변화하는 천사』 잉그리트 리델 지음 | 조정옥 옮김 | 세창출판사 | 232쪽

죽음은 완전한 암흑·허무 아닌 천사와의 합일
미완성 존재로서 자주 망각·착각하고 실수해

이 책은 마치 아동이 그린 듯한 파울 클레(1879~1940)의 선스케치 천사 그림들을 융 전문가가 해설하고 있다. 물질주의가 주를 이루는 현 시대에서 천사를 다룬 책이 영적 세계를 성찰하도록 자극하고 있다. 영혼의 존재는 죽음과 연결된 주제이므로 이 책을 통해서 죽음의 문제도 되돌아보게 된다. 

과학이 고도로 발달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영혼의 세계나 사후 세계를 밝히기에는 역부족이다. 문제는 과학으로 밝힐 수 없는 세계를 과학자가 잘 모르겠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이 없다고 부정하는 습관이다. 영혼 불멸을 믿음이라고 한다면 영혼이 오로지 두뇌 작용에만 의존한다는 과학자의 주장도 믿음이다. 후자가 증거가 없다고 하지만 오히려 전자에는 증거가 수백만 건에 이르고 있다. 임사체험이 그 증거다. 두뇌가 정지된 뒤에 일어나는 인식과 체험은 과학으로 설명이 절대 불가능하다. 전자 현미경이 모든 것의 존재 여부를 가리는 재판관이 될 수 없다.

이 책은 히틀러 시대 퇴폐미술로 낙인찍히며 수난을 겪은 화가 클레의 말년에 제작된 천사 그림시리즈에 대한 심리분석적 해설이다. 클레는 스위스 베른 근처 뮌헨부흐제에서 태어났다. 클레는 매우 독창적인 회화 언어로 사물의 본질적이고 정신적인 의미를 전하려고 한 천재적인 추상화가였다.

『변화하는 천사』의 저자는 심리치료가이며 융 분석가인 잉그리트 리델이다. 융은 표피적인 자아(Ich)와 심층적인 자기(Selbst)를 구분하며 본래적 자신은 자아가 아니라 인격의 핵심에 들어있는 자기라고 본다. 인간은 평생에 걸쳐서 본래적 자기에 도달하는 과정을 겪는다. 이 책은 천사의 다양한 모습과 무엇보다도 천사가 되고자 하는 노력이 실패로 돌아간 인간과 천사의 중간단계를 그린다. 저자는 융이 말하는 본래적 자기를 클레의 천사와 동일시한다. 

인간은 죽음으로써 비로소 본래적 자기로 돌아가고 천사와 합치된다고 본다. 융의 본래적 자기는 철학적으로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에 자리 잡은 인간의 본질이며 핵심인 인격이라고 할 수 있다. 인격은 인간의 신성한 부분이며 신적이거나 천사적인 부분이다. 천사의 밝은 이미지와는 달리 저자는 천사를 죽음과 직결시키고 있다. 그렇지만 천사 그림 해석의 분위기는 결코 어둡지만은 않다. 죽음은 완전한 암흑이나 허무가 아니라 천사와의 합일이기 때문이다.

인간 세상에서 가장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는 죽음이 클레에게는 오히려 천사와의 합일이 완성되는 단계이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처음처럼 느껴지고 익숙하지 않다. 

그래서 누구나 두려움을 가지고 있고 클레의 천사, 즉 죽음을 앞둔 인간의 본래적 자기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떠는 것이 사실이다. 클레는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이미지로 죽음의 과정을 그린다. 이것은 플라톤이 말한 인간의 탄생 과정에서 인간이 건너는 망각의 강과도 유사하다. 죽음 과정에서 건너는 강은 깨달음의 강일 것이다.

1926년의 파울 클레(1879∼1940)이다. 사진=위키피디아

클레가 대놓고 어떤 특정한 종교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보편적인 죽음의 관념을 대변하면서 우리가 죽음을 보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도록 돕는다. 저자의 해석에 따르면 클레는 고차원적이며 아름답다는 천사의 통념을 버리고 천사를 지상과 천상의 중간 단계로 끌어내리면서 천사를 죽음과 직결시키고 있다.

클레에게 천사는 인간과 동떨어진 저 높은 세계의 고상한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과 신성의 중간 단계에 있는 존재다. 클레의 천사는 다분히 지상적 요소를 지니고 있고 어리숙하고 미완성이며 자주 망각하고 착각하고 실수하며 자신의 한계에 부딪힌다. 천사는 인간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싹을 틔우고 성장하는 존재, 인간의 본래적 자기이기에 그런 모습은 아주 필연적이고 자연스럽다. 스웨덴의 과학자인 스베덴보리가 영계에서 본 바에 따르면 천상의 천사들은 영계에 온 지상의 인간들이 천사로 발전 성장한 것이다. 

영혼이 불멸이며 인간이 늘 자기실현과 완성의 도상에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클레의 천사 그림은 환상적 이미지가 아니라 오히려 모든 인간이 겪는 실제 사건의 묘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정옥 
성균관대 초빙교수
독일 뮌헨대 철학박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