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러스틴의 세계체제 미래구상
월러스틴의 세계체제 미래구상
  • 교수신문
  • 승인 2001.08.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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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8-28 15:29:37
김경일(한국정신문화연구원 사회학)

19세기 중후반 유럽의 전제 정치와 러시아의 짜르 체제는 유럽 혁명과 소비에트의 건설을 위한 지식인과 혁명가들을 낳았고, 1960년대 미국의 민권운동이나 프랑스의 5월 혁명이 그에 대항하는 지식인과 사회운동가들의 출현을 가져 왔으며, 20세기 말에 지구화와 신자유주의의 추세는 초국적 자본과 국제기구에 반대하는 반세계화 시위자들의 출현을 가져 왔다. 월러스틴은 이 세기의 중간에 해당하는 시기에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대표적인 지식인의 하나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지식인으로서 그의 위상은 자신이 처한 이러한 시대적 조건을 반영한다. 아프리카 지역연구자로 출발하여 세계체제론을 정립하면서 분과학문은 말할 것도 없고 사회과학 일반에서 이론가로서의 입지를 굳힌 그는 포스트모더니즘과 미시적 접근의 유행에도 불구하고, 푸코나 하버마스에 이어 여전히 거시 이론과 거대 담론의 시각을 고수하고 있다. 또한 그는 학문 연구의 객관성과 경험적 증거의 설득력과 학자의 가치중립성에 회의적이다. 이에 따라 톰슨이나 촘스키처럼 학문 연구의 가치중립성을 부정하면서 지식인의 지적이고 도덕적인 책임과 아울러 적극적인 현실 개입을 주장한다.
최근 번역되어 소개된 '우리가 아는 세계의 종언'(이하 '종언')은 그의 또다른 저서인 '유토피스틱스'와 함께 가장 최근의 저작에 속한다. 비록 한국에서는 먼저 번역, 출간되었지만 '유토피스틱스'가 가장 최근 저작이라면, '종언'은 바로 직전의 시기인 1996∼7년 사이에 세계사회학회장으로 활동하면서 발표한 글들을 수록하고 있다. 만일 "21세기의 역사적 선택들"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유토피스틱스'를 금세기 초에 발간된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에 견줄 수 있다면, '종언'에 대응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그보다 10여 년 늦게 저술된 '제국주의론'일 것이다. 후자의 레닌 저작은 "자본주의의 최종 단계"라는, 그리고 월러스틴의 전자는 "21세기를 위한 사회과학"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객관적 실재로서의 자본주의/제국주의로부터 현실 인식과 관련된 사회과학으로 패러다임으로의 변이는 두 저작이 간행된 거의 1백년에 이르는 시기에 진행된 세계 정세와 지적 세계의 변화를 반영한다.

레닌의 이론이 한때 시대를 풍미하였던 것과 대조적으로 월러스틴의 영향은 상대적으로 제약되어 있으며, 그것도 다분히 학계에 한정된 것이었다. 서구 학계에서의 영향에 비해 볼 때 한국의 지성계에서 월러스틴에 대한 관심은 오히려 과도할 정도이다. 대표작인 '세계체제론'은 그만두고라도 1980년대 말 - 90년대에 쓰여진 대부분의 그의 저작들은 국내에 번역 소개되어, 무려 10여 책을 헤아린다. 왜 그의 저작들은 한국의 지성계에서 많은 호응을 불러일으키고 있는가. 아마도 그것은 한국의 지성계와 지식인이 현실인식과 전망의 설정에서 당면한 고뇌와 모색에 대한 일정한 답변을 제공하기 때문일 것이다.

레닌의 '제국주의론' 대 월러스틴의 '종언'

확실히 헤게모니 국가의 한가운데에서 들려 오는 목소리가 중심부보다 변방에서 오히려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것은, 그의 '세계체제 분석'이 주류적 세계관을 전복하고 그것을 대치하는 새로운 인식과 시야를 제공하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보편적이라고 믿어 왔으며, 또한 후쿠야마가 '역사의 종언'을 들어 그것의 지속과 영원을 찬미하였던 자본주의가 서구에서 우연히 발생한 일회적 사건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은 이러한 점에서 자못 흥미롭다. 자본주의가 유럽에서 돌파구를 만든 다음 팽창하여 전지구적으로 되었다고 해서 결코 이것이 불가피했다거나 바람직했다거나 또는 진보적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그는 주장한다. 흔히 근대로의 이행에 장애물이 된다고 생각되어 왔던 전통의 제도적 집단들은 자본주의라는 "바이러스를 막는 항독소"였다는 언급은 마치 브로델이 그러했듯이 통념이자 진리로 받들어 왔던 우리의 자본주의관을 한순간에 전도시켜 버린다.

자본주의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서구중심주의에 대한 새로운 해석으로 이어진다. 그는 서구중심주의를 비판하기 위한 논리가 오히려 그것을 강화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가 "반서구중심적 서구중심주의"라고 일컬은 사고방식은 자본주의 맹아론이나 최근 제기되고 있는 식민지 근대화론에 대한 재성찰의 여지를 제공한다. 한국사회에 대한 의미함축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1989년 이후 시기 보수주의의 또다른 변형으로 파악한 신자유주의에 복지국가 프로그램을 결합시키는 것의 모순에 대한 지적이나 시민권의 배타적이고 예외적 특권에 대한 논의, 또는 동아시아의 경제 발전에 대한 설명 등에서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쟁점과 현안들에 대한 비판적 성찰의 자원들을 끄집어 낼 수 있다.

자본주의 분석과 사회과학의 전망

월러스틴의 이러한 시각은 그가 인간과 자연에 대한 탐구에서 目的因 대신에 과정인에, 그리고 기능적.형식적 합리성 대신에 실질적 합리성에 주목한 결과이다. 매우 비관적이고 암울한 시각에서 분석되고 있는 수십 년에 걸쳐 다가올 이행의 시기에 그는 자유의지와 주체성, 헌신, 그리고 도덕적 판단과 같은 주관적 요인들의 역할을 강조한다. 물론 '유토피스틱스'에서 대안적 체제의 가능한 기초로서 탈집중의 비영리단위들을 설립하자고 제안한다거나 또는 현존체제의 피억압자들의 투쟁 수단으로 공개적인 폭력, 선거와 입법투쟁, 공개적 호소 등을 언급하는 데서 보듯이 자원론적 편향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의 주요한 관심의 축이 지식 구조내에서의 이론적 토의에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종언'이 자본주의 세계에 대한 인식과 지식에 대한 이해라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서 논의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점에서 이해된다.

비록 형식적으로는 따로 논의되고 있다고 하더라도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분석과 사회과학에 대한 논의는 월러스틴의 이론 체계에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사회과학에 대한 그의 논의는 제국주의에 대한 레닌의 관심에 비견될 수 있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종언' 이외에도 '사회과학으로부터의 탈피'나 '사회과학의 개방'을 통한 그의 문제 제기는 이미 우리 학계에서도 어느 정도 알려진 것이 되었지만, 개성기술과 법칙정립, 미시와 거시, 지구적인 것과 지역적인 것, 구조와 행위, 그리고 진리의 추구와 선의 추구라는 이율배반들은 그의 체계에서 오히려 동일한 사물의 '음과 양'으로 설명된다. 지식은 항상 추구 과정으로 남고 결코 종착점에 이르지 못하겠지만, 양자는 모두 단일한 우주의 통합 부분이기 때문에 근본적인 모순이 없는 단일한 기획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적이면서 구조적인 시각에서 월러스틴이 제기하고 있는 거시적이고 포괄적인 쟁점과 문제들은 그것이 간결하고 근본적인 것만큼이나 알게 모르게 목적인에 근거하여 사실들의 선후관계나 정밀한 인과의 연쇄 고리들을 추적하는데 익숙해 있는 우리에게 때때로 혼란과 아울러 당혹감을 불러일으킨다. 아울러 그가 말하는 복잡성의 과학이나 비결정의 결정에 의거하여 세계체제 분석의 미래를 전망한다고 할 때, 그가 지적하듯이 궁극적으로는 자유주의로 포섭되어 갔던 1945-1970년의 구좌파와 같은 역사적 운명의 전철을 밟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실한 것은 사회적 평등에 대한 노력을 레닌의 투쟁으로 요약할 수 있다고 한다면, 월러스틴은 과학에서 평등주의를 달성하기 위한 투쟁과 사회에서 그것을 위한 투쟁이라는 두 개의 전선에서 싸우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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