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9 00:10 (월)
황해문화 (계간) : 겨울 [2023년]
황해문화 (계간) : 겨울 [2023년]
  • 김재호
  • 승인 2023.12.05 18: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새얼문화재단 편집부 | 새얼문화재단 | 408쪽

전문가 중심주의를 넘어서 시민 참여의 과학으로

2023년 8월 24일 일본 도쿄전력이 후쿠시마 제1원전 내 오염수를 바다에 방류하기 시작하면서 오염수 방류를 둘러싼 국내외의 뜨거웠던 논란은 일단락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겉보기에만 그럴 뿐, 오염수 방류를 둘러싼 쟁점은 결코 사라진 것도 아니고 사라질 수도 없다.

일본이 다핵종저감설비ALPS로 방사성 동위원소를 처리한 후 희석하여 후쿠시마 오염수를 방류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한 2021년 4월 이후 오염수 방류를 둘러싼 논란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지만, 허용할 것이냐 아니면 반대할 것이냐 하는 쟁점을 중심으로 전개되어왔다.

이 과정에서 방류를 허용해야 한다는 쪽은 대체적으로 도쿄전력의 오염수 방류가 과학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처리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이 과정을 거친 이후에 방류된 ‘처리수’는 인체를 비롯한 생태계에 거의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을 정도로 안전성을 확보한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보여왔다.

일본 정부는 물론이거니와 국제원자력기구IAEA도 이런 이유로 오염수 방류에 정당성을 부여했으며, 윤석열 정부도 오염수 방류에 반대하는 이들을 ‘비과학적인 괴담’을 퍼뜨리는 무지몽매한 이들로 비난하면서 오염수 방류는 ‘과학’에 따라 합리적으로 진행되는 과정이기 때문에 당연히 허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요컨대 오염수 방류 결정은 ‘과학’이라는 이름 아래 이루어졌고, 그 결정을 찬성하는 이들(일본 정부, IAEA, 한국 정부 등)도 바로 ‘과학’의 이름으로 자신의 견해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그런데 우리가 또 하나의 ‘비과학적인’ 세력으로 낙인찍힐 위험을 무릅쓰고 이번 호에서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문제를 특집으로 다루고자 하는 것은 과연 여기서 말하는 ‘과학’이 어떤 과학이며,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과학인가 하고 묻기 위해서이다.

서양에서 과학은 고대 그리스 이래 참된 인식의 대명사처럼 간주되어왔으며, 특히 17세기 과학혁명 이래 과학은 진리에 대한 배타적인 독점의 권리를 부여받아왔다. 칸트 철학이 잘 보여주듯 근대 철학은 과학(칸트에게는 뉴턴)의 진리 인식의 근거를 정당화하는 것을 자신의 소명으로 삼았고, 갈릴레이, 뉴턴, 라부아지에, 다윈, 아인슈타인 같은 근대 과학의 거장들은 진리의 순수한 사도로서 존경을 한몸에 받아왔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는 갈릴레이의 말만큼 진리 탐구의 결정체로서 과학을 상징하기에 적절한 문구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20세기 후반부터 새로운 학제 연구로 발전해온 과학기술학STS이 잘 보여주었고, 국내에서도 김동광, 김명진을 비롯한 훌륭한 연구자들의 노작(勞作)으로 잘 알려졌듯이, (그 이전 시기에도 어느 정도 적용되는 것이지만) 20세기에,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본격화된 냉전 시대에 이러한 과학 및 과학자 상은 신화에 가깝다.

왜냐하면 테크노사이언스technoscience로서 현대 과학 연구의 주요 행위자는 더 이상 개별 과학자가 아니라 정부, 기업, 대학이며, 오늘날의 과학 연구는 주로 거대 기업의 주도로 진행되는 대규모 프로젝트의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이것은 물론 헌신적이고 진실한 과학 연구자들의 존재와 중요성을 부정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대규모 프로젝트로서 과학 연구를 대표하는 것이 원자폭탄 제조 계획이었던 맨해튼 계획이나 소련과의 우주개발 경쟁 과정에서 탄생한 아폴로 계획 같은 것이었으며, 오늘날 생명공학이나 인공지능 연구 역시 테크노사이언스로서 현대 과학 연구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대규모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다.

테크노사이언스로 전개되는 과학 연구의 본질적인 특징 중 하나는 불확실성이나 위험이 존재한다고 해도 지속적으로 수행된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서로 연결된 이유들이 존재하는데, 맨해튼 계획이나 아폴로 계획이 잘 보여주듯 전쟁에서 승리하거나 막강한 적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국가 안보적인 동기가 작용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신자유주의 세계화 이후 더 노골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과학기술의 상업화에 따른 경제적 이익 추구(특허나 지적재산권의 확보 등)도 본질적인 이유로 작용하고 있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에 대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찬성하고 있는 쪽이 한국원자력학회 및 그 구성원들이라는 사실은 원자력 연구가 대표적인 테크노사이언스 중 하나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으며, 현 정부가 이전 정부의 기조와 달리 오염수 방류에 관한 일본 측 입장을 적극 두둔하고 심지어 홍보하고 있는 상황은, 소형모듈원전SMR 개발이라는 경제적 동기를 넘어 한·미·일 동맹의 추구라는 군사 안보적인 동기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오늘날 이러한 경제·정치·군사안보적인 동기들에서 자유로운 테크노사이언스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을 감안한다고 해도, 이번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결정 및 그에 대한 우리나라 정부의 대응 방식은 자못 놀라운 것인데, 오염수 방류 결정이 초래할 보건적·환경적 위험성에 대한 다양한 방식의 문제제기를 무시할 뿐만 아니라, 대통령과 총리를 비롯한 정부의 최고위 당국자가 그것을 ‘비과학적인 괴담’으로 몰아붙이면서 과학이라는 이름 아래 일체의 반대와 비판을 막무가내로 억압하고 있기 때문이다.

1992년 환경과 개발을 위한 유엔각료회의에서 제출된 리우 선언이나 1998년 환경운동가들 및 과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윙스프레드Wingspread 선언에서는 “어떠한 행위가 인간의 건강이나 환경에 위해를 일으킬 수 있다면, 인과관계가 과학적으로 충분히 확립되지 않았다 할지라도 사전주의적 조치를 취해야 한다.

이 맥락에서 대중이 아닌 그 활동의 지지자들이 증명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취지의 사전주의 원칙precautionary principle이 정식화된 바 있다. 이 원칙에 따르면 역사상 유례가 없는 사고 원전 오염수 방류 문제는 일본 내 피해 예상 지역 주민들을 비롯한 국내 당사자들만이 아니라 한국과 중국 및 태평양 연안 도서국들을 비롯한 주변국들과 그 시민들과의 충분한 사전 협의와 최대한 신중한 검증 과정을 거쳐서 결정되었어야 한다.

또한 우리나라 정부는, 단순한 민족주의 감정을 넘어, 무엇보다도 이 방류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피해자들의 관점에서 최대한 비판적이고 신중한 검증 및 대응 방식을 채택했어야 하지만, 속전속결로 일본 정부의 결정을 받아들였으며 그 결정의 정당성을 스스로 홍보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것은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문제가 인식론적 측면에서 이해된 과학적 합리성과 객관성을 넘어서는 문제라는 점을 극명하게 드러내준다. 실로 오염수 방류 결정을 둘러싼 그동안의 전개 과정은 현재의 사태가 과학이라는 미명 아래 냉전반공주의를 정당화하고 그 이념 아래 결속한 카르텔의 최대 이익을 추구하려는 계산의 결과가 아닌지 의심해보게 만든다.

흥미롭게도 우리나라 정부는 물론이거니와 일본 정부도 자신의 비판 세력을 ‘괴담’을 유포하는 불순분자로 치부하는데, 환경사학자 케이트 브라운의 『플루토피아』나 제이콥 햄블린의 『저주받은 원자』 같은 냉전 시대 핵개발 역사에 관한 비판적 저작들은 이러한 공통적인 태도가 사실 맨해튼 계획 이후 전개된 핵개발 역사에서 좌우 양 진영을 막론하고 각국 정부와 그에 협력하는 과학자들이 일관되게 견지한 태도였음을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과학’이라는 이름을 한껏 내세우면서 오염수 방류를 결정하고 그것을 정당화한 도쿄전력이나 IAEA의 보고서를 비판적으로 평가해보는 일이며, 더 나아가 왜 역사 속에서 이러한 일들이 반복되는지 그 연원을 따져보는 일이다. 그것은 이번 사태가 일회적이거나 역사상 미증유의 사건인 게 아니라, 핵개발이 시작되면서부터 지속적으로 되풀이되어온 보건적·생태적 재앙의 한 단면임을 이해하게 해줄 것이다.

더 나아가 경제·정치·군사안보 카르텔에 묶인 ‘전문가 중심주의’ 과학을 넘어 시민참여적 과학을 모색하는 길은 어떻게 가능한지 사고해볼 필요가 있다. 특히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집회나 가습기 참사 이래로 오만한 과학의 이름으로 피해자들의 정당한 요구를 ‘괴담’으로 묵살하는 것이 관행이 되어왔다면 더 그럴 것이다. 이번 특집은 이런 의도 아래 기획되었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