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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말하지 않는 법
고통을 말하지 않는 법
  • 김재호
  • 승인 2023.12.05 18: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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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 투마킨 지음 | 서제인 옮김 | 을유문화사 | 432쪽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다고 믿는
우리의 선한 교만을 뒤흔드는 논픽션 실험

많은 사람은 누군가와(특히 약자와) 연대하기에 앞서 그를(그들을) 이해해야 한다고 믿는다. 이해하지 못하는 상대에게는 그에게 적합한 것을, 즉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을 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에 따르면 이해를 우선하지 않는 연대는 일방적인 호혜에 가깝고, 이는 결국 결례와 오만을 내보이는 행위로 변질될 수 있다.

하지만 마리아 투마킨은 그 이해조차 ‘이해해 주려는 사람’이 섣부르게 베푸는 호혜일 수 있다고 말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해하려는 노력 자체는 타인을 향한 태도로써 합당하다. 그러나 투마킨에 따르면 타인을 이해하게 되었다는 행복한 결말은 결코 다다를 수 없는 (자기 만족적인) 환상이다.

내가 아닌 타인을, 나를 둘러싼 세계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결론에 다다를 수 없는 영원한 과정일 뿐이다. 게다가 그 과정은 성공보다는 실패와 좌절을 더욱 자주 마주하게 된다. 따라서 타인과의 연대는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만 지속될 수 있다. 상대를 완전히 이해하게 되는 날은 영영 오지 않을 것임을 인정하면서, 수없이 좌절하면서 기어코 계속 시도하는 것.

이 책은 이러한 주장을 설명하거나 이론화하지 않고 글의 구조 자체를 통해 자연스럽게 보여 준다. 인간 각자의 고통을 통해 부서진 기억들은 이 책 속에서 실제로 부서진 형태로 나타난다. 즉 여러 에피소드가 순차적으로 배열되지 않는다.

두세 가지의 다른 이야기가 섞여 등장하기도 하고, 여기에 시간 순서까지 뒤섞여 있다. 심지어 몇몇 에피소드의 조각은 백 페이지가 넘게 떨어진 곳에서 갑자기 발견되기도 한다. 그래서 이 책을 처음 시작한 독자는 ‘그래서 그 얘기가 어떻게 됐다는 거야, 갑자기 나온 이 사람은 누구야’라고 생각하며 당황할 수 있지만, 곧 이런 서술 방식이 한 인간의 내면을 쉽사리 추적할 수 없다는 ‘사실’을 디자인적으로 구현하고 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하나의 장이 끝날 때쯤이면 그동안 그러모은 파편들이 머릿속에서 조립되는 독특한 경험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즉, 이 책 속의 이야기-사건들은 이해되기 전에 구성된다. 혹은 이해를 거부하면서 발생한다. 몇몇 평론가들이 이 책을 읽고 W. G. 제발트를 떠올렸던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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