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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향기
제국의 향기
  • 김재호
  • 승인 2023.11.28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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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슐뢰겔 지음 | 편영수 옮김 | 마르코폴로 | 240쪽

모던한 정사각형의 디자인, 중앙의 금색 장식 등 1922년에 출시된 코코 샤넬의 No. 5는 향수계에 혁명이었다. 한 세기를 주름잡았던 이 향수는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도 전시되었고 우리시대의 아이콘이 되었다. 그러나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샤넬이 어떻게 향기를 찾아 냈는지에 관한 것이다.

카를 슐뢰겔은 서방을 대표하는 향수인 샤넬 넘버 파이브와 사회주의를 대표하는 향수 레드 모스크바의 기원이 하나의 향수에서 출발했다는 흥미로운 주장을 하고 있다. 모스크바에서 유학할 때 백화점이나 외교관 공간 그리고 국경을 넘어설 때마다 코끝을 자극하는 향기는 슐뢰겔의 후각에 하나의 기억을 자리잡게 만들었다.

마침내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진 후, 파리에 도착해서야 그 향기의 진원지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국적을 불문하고 잘 차려 입은 여인들의 주변을 감도는 향기였던 것이다. 소련을 비롯해서 폴란드나 체코 같은 동유럽에서 가장 인기 있던 향수가 바로 레드 모스크바였고 샤넬의 넘버 파이브는 서유럽에서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향수였다.

이 두 향수는 황후(카테리나 II)가 가장 좋아하는 향기라는 공통된 기원을 가지고 있었다. 이 향기는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의 기념일을 위해 1913년 모스크바의 랄레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러다가 1917년 10월 혁명이 일어났고 모든 것이 바뀐다. 이 랄레의 조향사 중 한 사람인 프랑스 출신의 오귀스트 미셸은 혁명의 혼란 속에서도 러시아를 떠나지 않았다.

그는 결국 향수 공장의 책임자가 되었으며, 새로운 레시피를 실험해서 제국의 향기를 창조했다. 한편 그의 동료였던 에르네스트 보는 혁명으로 들끓던 모스크바를 떠나서 파리로 돌아와 샤넬의 향수를 개발한다. 샤넬은 여러 개의 샘플 중에서 다섯 번째 샘플을 골랐고 이 향수가 우리가 알고 있는 ‘NO.5’가 된 것이다.

저자는 프랑스의 코코 샤넬을 드라마의 한 축으로 그리고 러시아의 젬추지나 몰로토바를 또다른 축으로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샤넬의 삶을 통해서 그녀의 향수가 어떤 방식으로 20세기의 아이콘이 되었는지를 살피면서 젬추지나의 인생을 따라 소비에트 향수산업의 흥망성쇠를 노래한다.

약 240페이지의 이 책은 한 방울의 향수를 통해 20세기 정치사회를 돌아보게 만든다. 서로 다른 사회의 체제에도 불구하고 후각이라는 감각의 세계에 열려있는 놀랍도록 다채로운 파노라마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결국 제국의 향기는 샤넬의 넘버 파이브와 젬추지나의 레드 모스크바로 환원되었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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