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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말린 날들
휘말린 날들
  • 김재호
  • 승인 2023.11.28 15: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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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보경 지음 | 반비 | 488쪽

나영, 오혜진 추천!
“나는 고통과 사랑의 감염력에 의지해 이 이야기들을 내놓는다.”
먼저 휘말린 사람들이 들려주는 감염과 바이러스가 품은 희망과 미래의 이야기

감염은 무엇보다 공동체의 일이다
의료인류학자가 길어낸 감염병의 표정과 목소리와 몸짓

‘감염’은 이제 낡은 화두가 된 것 같다. 팬데믹에서 엔데믹까지를 경험하며 한국 사회는 그간 다루지 못한 담론을 많이 얻었다. 재난은 어떻게 불평등하게 배분되는가, 왜 ‘돌봄 사회’로 전환해야 하는가부터 출발해 질병과 장애에 관한 담론도 확장되었다.

그렇지만 한국 사회가 정말로 감염이라는 화두를 온전히 소화한 걸까? 엔데믹으로의 전환, 일상으로의 복귀 속에 우리가 제대로 다루지 못한, 눙치고 지나온 것들이 있지는 않을까. 팬데믹 초기, 확진자에 순서대로 번호를 붙여 사생활의 동선이 전국민에게 공개되던 당시의 공포는 분명 질병에 대한 것만이 아니었다.

오히려 나도 ‘몇 번 환자’가 되어 동선이 공개된다면 비난당하고 공동체로부터 격리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 더 컸다. 여전히 감염은 개인의 잘못된 행동의 결과로 여겨지고, 감염병에 걸린 사람 개개인은 질병 그 자체보다 낙인과 싸워야 한다.

『휘말린 날들』은 어쩌면 가장 그러한 낙인이 공고하게 찍혀온 HIV/AIDS를 바탕 삼아 이 같은 문제들을 다시 돌아보자고 제안하는 책이다. 의료인류학자이자 HIV/AIDS 인권운동 활동가인 서보경은 ‘앞줄에 선 사람들’, ‘먼저 휘말린 사람들’의 목소리를 전한다.

HIV 감염인 당사자와 그 주변 사람들이 ‘평범한’ 사람들과 다른, 특수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 혹은 숨거나 도망쳐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감염이라는 사건을 한발 앞서 겪은 사람으로서 우리 사회에 들려줄 이야기가 있는 존재라고 보는 것이다.

저자는 불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 숨겨진 상실과 함께 나누지 못한 애도의 기억, 그리고 어떻게 다른 세상을 열어갈 것인가에 대한 대담한 통찰이 깃들 이 이야기들을 문화기술지의 형식, 분야를 넘나드는 연구, 그리고 무엇보다 저자 스스로 마주하고 겪어온 경험들을 경유해 길어낸다. 그럼으로써 감염이 무엇보다도 ‘공동체의 일’임을, 그리고 우리의 존재 조건임을 논파한다.

자신 역시 “앞줄에 선 사람들에게 휘말리면서 직업으로서 인류학자가 되었”다고 말하는 서보경의 글쓰기는 인류학적 글쓰기의 전범임과 더불어 나아가 인류학의 외연을 넓히는 글쓰기이기도 하다.

저자는 자신의 마음을 붙든 ‘표정과 목소리와 몸짓’을 놓치지 않고 그 의미를 찾아나가기 위해 여러 번 생각하고, 질문하고, 다가가는 동시에, 감염이라는 개념을 형성하는 문법, 어조, 비유를 섬세하게 고찰한다. 이 조심스럽고 사려 깊은 글쓰기, 감염인들의 숨겨져야 했던 이야기를 가장 가까이에서 들어온 이야기꾼의 기록 속에서 독자들 역시 온 몸과 마음으로 타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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