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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보일 때까지 ‘과학사’ 한 장면을 파다
사람이 보일 때까지 ‘과학사’ 한 장면을 파다
  • 남영
  • 승인 2023.11.29 08: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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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말하다_『휘어진 시대 1·2·3』 남영 지음 | 궁리 | 1,356쪽

통사적 강의 지양하고 인물 중심의 과학사 조명
대학생과 20년에 걸친 소통의 결과물

이 책은 상대성이론·양자역학·원자물리학 등이 태동하는 20세기 전반기 과학의 역사를 다룬 책이다. 하지만 이 책을 제대로 소개하려면 책의 내용보다는 책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을 소개하는 것이 더 적절할 듯하다.

20년 전, 대학에서 과학의 역사에 대해 처음 가르칠 때가 생각난다. 통사적인 과학사는 언제나 그리스 자연철학에서 시작한다. 중세는 과학사에서 분량이 있으나 마나 한 수준이고, 곧 과학혁명기 지동설과 생리학 등에서의 혁명적 변화들을 다루고, 필자도 거의 이해하지 못 하는 18세기를 간신히 지나간 후, 19세기 열역학이나 전자기학, 그리고 진화론이라는 강을 건너고, 20세기 상대성 이론과 양자역학을 지나면, 이후는 생색내기용의 현대과학 정리로 마무리되기 마련이다. 

처음 필자는 상대성 이론이나 양자역학을 어떻게 하면 내가 이해하는 선에서 쉽게 알려줄 수 있을지를 걱정하고 고민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첫 수업을 시작하면서 여지없이 깨졌다. 처음 그리스 자연철학부터가 문제였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탈레스·데모크리토스·아리스토텔레스 등 수많은 ‘~레스’와 ‘~토스’를 외우면서 절망하고 지치고 흥미를 잃기 시작했다. 과학혁명기로 넘어가 갈릴레이와 뉴턴 등의 매력적인 인물들을 배울 때면, 이미 수강생의 절반은 내 길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시작한 뒤였다. 

학부 수업이라고 통사적 역사 전반을 한 학기 동안의 짧은 시간 동안 가르쳐야 할 필요가 있는가? 정보의 양이 중요한가? 나에게는 재미있는 것이 왜 학생에게는 재미가 없는가? 근본적 의문을 던졌다. 어차피 2~3학점의 16주의 강의에서 다룰 수 있는 양은 한계가 있다. 이 시간을 학생에게 가장 도움이 될 만한 형태로 만들어 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답은 간단했다. 역사는 인간의 이야기인데, 인간이 보이지 않으면 당연히 재미가 없다.

비유해 보면, 필자가 썼던 방법은 초등생 조카에게 황건적의 난에서 시작하는 2세기에 걸친 삼국지 이야기를 요약해 하루 만에 모두 알려주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방법을 바꿔야 한다. 차라리 유·관·장 3인이 의리와 제갈량의 책략을 잘 버무려 적벽대전 하나만 맛깔나게 알려주면, 조카는 삼국지에 매료되고 스스로 전과 후의 내용을 찾아볼 것이다. 그래서 통사적 과학사 강의는 포기하고, 적벽대전에 비견될만한 매력적인 과학사적 사건을 최대한 인간으로서 과학자의 모습이 보이도록 자세히 가르친다.

그렇게 시작한 고민의 결과물이 필자가 개발한 「혁신과 잡종의 과학사」(2010~)와 「과학자의 리더십」(2013~) 수업이었다. 「혁신과 잡종의 과학사」는 철저하게 과학혁명기 150여 년 가량의 지동설 혁명의 이야기만으로 한 학기를 채운다. 「과학자의 리더십」은 20세기 전반기 상대성·양자·원자 등의 단어가 물리학의 전반에 등장하던 반세기 간의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사람이 보일 때까지’라는 목표로 설계된 이 두 과목의 운영은 성공적이었다고 자평한다. 

학생들로부터 ‘한양대 5대 명강’하는 식의 오글거리는 찬사도 받아보고, 강의평가도 눈에 띄게 좋아져 학교에서 저명 강의교수 타이틀도 받는 등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내가 쓸모 있는 일을 하고 있구나 하는 뿌듯함에 당연히 강의를 책으로 옮겨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그래서 「혁신과 잡종의 과학사」를 『태양을 멈춘 사람들』(2016)로, 「과학자의 리더십」을 『휘어진 시대』(2023)로 출간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 책들의 특징을 꼽자면, 연구나 논문이 아닌 철저하게 교육의 경험에 기초한 책이라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대학생들과 근 20년에 걸친 소통의 결과물이며, 매 학기 계속해서 주고받은 질의응답의 경험이 녹아있다. 휘어진 시대』가 어떤 책인지는 이렇게 책이 탄생한 전반적 맥락을 알면 쉽게 내용을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책의 내용과 의미에 대해서는 머리말에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 있다.

“이 책의 배경은 20세기 전반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그리고 원자물리학이 자리를 잡던 시기다. 하지만 이 책은 상대성이론, 양자역학, 현대원자이론 자체가 주인공이 아니다. 분명히 그것들을 만든 과학자들과 그들의 시대를 다루고자 한 책이다....... 필자가 다루고자 하는 핵심은 과학자들의 업적보다는 그들이 답에 도달하는 과정과 난관과 고민들이다.”

“「과학자의 리더십」은 주로 현대물리학자들의 사례를 통해 현대과학기술을 이해하고 오늘날 새롭게 대두되는 올바른 과학기술자상을 고민해보기 위해 설계했던 교과목이다. 20세기 과학자들의 이야기에는 새로운 덕목들이 떠오른다. 과학이 집단화되고, 공공에의 봉사가 미덕이 되었지만, 동시에 큰돈이 필요해졌고, 비전문가는 더 이상 과학의 구체적 내용에 접근하기가 힘들어졌다. 현대의 과학자들은 집단연구를 위한 고유의 리더십, 후원을 이끌어나가기 위한 다양한 노력이 필요해졌고, 경쟁상황에 대처하면서, 거대한 힘을 가지게 된 과학적 업적과 연구결과를 어떻게 사용하고 도덕적 딜레마들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과거의 과학자들보다 훨씬 더 많이 고민해야 한다. 그래서 ........ 가시밭길을 홀로 걸어가는 과학자들의 모습보다는, 충돌하고 어울리고 후회하면서 함께 움직여간 과학자 사회의 모습이 떠오르길 바라며 수업을 진행했고, 이 책 역시 그러한 목표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졌다.”

대학생들에게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여러분은 자신이 과학자들을 잘 모른다고 생각할 것이다. 아니다. 전혀 모른다.” 많은 학생들이 과학 자체를 철저하게 오해하고 있다. 초등교육과정 이후 과학자의 인생에 접근해 보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대학생들의 과학에 대한 이미지는 아동용 위인전의 수준을 넘지 못한다. 일정한 시점이 되어 어른을 위한 과학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이 마땅한데, 대부분의 경우 중등교육과정과 이후의 사회생활에서 그 기회 자체를 박탈당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최소한 학생들에게 그들이 존경하는 과학자에게 진정 본받고 흉내 내야 할 것이 무엇인지만큼은 제대로 가르쳐주고 싶었고 그 의지를 표현한 것이 이 책의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굳이 과학사 교육이 아니더라도, 이 이야기가 교육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사례이자 아이디어가 될 수 있다면 좋겠다.

 

 

 

남영                                   
한양대 창의융합교육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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