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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65] 새로운 사회의 세포 ‘친밀집단’을 제안하다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65] 새로운 사회의 세포 ‘친밀집단’을 제안하다
  • 박홍규
  • 승인 2023.11.20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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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친④ 새로운 사회 건설
머리 북친

북친은 19세기 말 실천한 아나키 테러리스트를 ‘윤리적이고 선견지명적인 개념’에 고취되어 ‘행위에 의한 선전’을 실행한 자들로 옹호했지만, 우리 시대에는 생태사회의 혁명적 기획의 실현에 앞서 오랜 계몽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북친의 저술에서 계속되는 주제는 권위주의와 프롤레타리아의 사회주의, 특히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사회 사상가로서의 마르크스를 인정하면서도 북친은 마르크스주의가 우리 시대에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결핍의 시대에서 태어나, 전환기에 국가가 가능한 한 빨리 총생산력을 증가시켜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보았다.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적 탁월함의 이데올로기”

그러나 현대 기술은 물질적 풍요의 가능성을 제공하는 새로운 산업 혁명을 일으켜 인류가 필요의 영역에서 자유의 영역으로 이동할 수 있게 했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는 마르크스가 헤겔 철학을 초월한 것처럼 초월되어야 한다. 실제로 북친은 마르크스주의가 자본주의적 생산을 지탱하는 근본적인 ‘문화적 감수성’에 도전하지 않고, 자본주의적 생산에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자본주의적 탁월함의 이데올로기라고 비판한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주의는 ‘부르주아 계몽주의’의 정점일 뿐만 아니라 부르주아 사회학의 한 형태이기도 하다. 북친은 특히 ‘과학적’ 사회주의를 비판하는데, 그 이유는 인간사를 결정하는 경제적 요인을 강조함으로써 윤리적 목표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에게 자연은 인류를 위한 단순한 대상, 순전히 유용성의 문제다. 북친은 특별한 비판을 위해 마르크스주의 계급의 ‘신화’를 비판한다. 첫째, 가부장제, 노인정치, 심지어 관료주의 형태의 지배와 위계는 계급의 형성보다 앞서고 계급 지배와 경제적 착취에 포섭될 수 없다. 

둘째, 프롤레타리아트를 혁명의 주체로 보는 마르크스의 계급 분석은 시대에 뒤떨어지고 불완전하다. 산업 노동계급은 더 이상 인구의 대다수가 아니며 마르크스가 예언한 것처럼 점점 더 가난해지고 있지도 않다. 반대로 계급은 더 이상 엄밀한 경제 집단이 아닌 완전히 새로운 하위문화로 분해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새로운 상황에서 노동자는 계급의식이 아니라 그의 ‘노동자다움’을 파괴함으로써 혁명적이 된다.

영국 런던 하이게이트 묘지 동편에 있는 카를 마르크스 석묘다. 사진=위키피디아

공산당이라는 마르스크주의 신화를 비난하다

실제로 북친은 노동자 운동은 죽고 가장 진보적 요소는 탈락한 청년, 흑인, 학생, 지식인, 예술가들이라고 본다. 그들은 마르크스가 룸펜프롤레타리아라고 비난한 비계급이다. 북친은 또 위계질서와 중앙집권화를 통해 권력투쟁을 하는 공산당이라는 마르크스주의 신화를 비난한다. ‘노동자 국가’나 계획 경제에도 사라지지 않는 위계질서, 성차별, 포기가 존재한다. 헤르베르트 마르쿠제(Herbert Marcuse)의 네오마르크스주의도 현대사회에서 위임된 권위와 대표성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북친의 비판을 받는다.

북친은 산업 민주주의나 노동자 통제에 대한 편협한 경제적 해석을 채택하는 자기 관리에 대한 조합주의적 해석도 비판한다. 노동자가 공장 운영을 인수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북친은 바쿠닌이 전통적인 공장은 본질적으로 권위주의적이라는 점에서 엥겔스와 동의한 것을 회상하게 한다. 기술의 윤리적 맥락을 인식하고 공장을 변화시켜 자기경영이 ‘산업적 자기경영’으로 재구성되고 일이 ‘의미 있는 자기표현’이 되도록 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은 권위주의적 사회주의자들이 제안하는 것처럼 권력을 장악하는 것이 아니다. 권력은 부패할 뿐만 아니라 파괴한다. 대중 혁명에서 변명할 수 있는 유일한 권력 행위는 가능한 한 권력을 해체하는 것이다. 혁명과정은 ‘자치사회는 반드시 자치로 이룩해야 한다’는 혁명적 목표와 분리되지 않아야 한다. 자기관리에 근거한 사회는 자기관리에 의해 확보되어야 한다. 혁명적 과정은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을 포함하고 그들이 개별적으로 행동할 수 있게 하는 대중 집회와 공동체의 형성을 목표로 해야 한다. 

새로운 사회의 세포로 ‘친밀집단’ 제안

북친은 새로운 사회의 세포로 ‘친밀집단’(affinity group)을 제안한다. 20세기 초에 스페인 아나키스트들이 그들의 조직 형태에 대해 사용했던 용어인 스페인어 grupo de afinidad를 번역한 그것을 북친은 ‘사회적 목표 못지않게 인간관계에 관심을 갖는 친밀한 친구들의 집단’으로 정의한다. 그야말로 ‘친족 관계가 깊은 공감적 관계로 대체되는 새로운 유형의 대가족’이다.

그러한 집단은 정신세계와 사회적 세계의 분열을 극복하고, 강압이나 명령이 아닌 자율성과 자기수양을 기반으로 한다. 합리적 측면뿐만 아니라 혁명의 즐겁고 감각적이며 미학적 측면을 긍정해야 한다. 그러나 친밀집단은 촉매 역할만 해야 하며 선봉대나 리더십 역할을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자율적이고 지역적이지만 지역, 지역 및 국가 의회를 통해 연합할 수 있다.

북친은 조정 및 계획의 필요성을 부인하지 않지만, 자주관리기관들의 집회와 협의회를 통하여 자주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아나키즘적 실천은 사람들이 자신의 운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개인임을 자각하고 일상생활을 통제하며 하루하루를 즐겁고 경이롭게 만드는 직접적인 행동을 강조한다. 

그것은 또한 ‘진정한 질서와 안정을 찾기 위한 발전의 내적 힘’을 해방시키는 자발성의 여지를 남겨둔다. 자발성은 북친의 글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지며 조직과 구조를 배제하지 않는다. 그것은 외부의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지만, 단순한 충동은 아니다.

그것은 열정과 행동의 통제되지 않은 발산이 아니라, 자기 통제되고 내적으로 통제되는 행동, 느낌, 생각이다. 북친은 자기통제가 ‘정신과 이성과 연대의 빛’에 의해 자아가 형성되는 능동적 자아의 형태라고 강조한다. 이처럼 그것은 자신만의 자유로운 형태의 조직을 만들어 낸다. 

북친에게 혁명은 기성 질서를 전복하려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것이 낳는 사고방식을 전복시킨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것은 거리의 축제가 될 ‘마법의 순간’이다. 가장 순수한 형태의 혁명의 ‘변증법’은 ‘예술과 놀이에서 가장 인간적인 표현을 찾는 부드러운 초월’이다. 

여전히 권위주의적 요소가 있다

그러나 북친의 사회 생태학적 비전에는 여전히 권위주의적 요소가 있다. 그는 자연과의 조화로운 관계를 기념하기 위해 다른 종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실제로 그가 생각하는 물질적 풍요의 조건은 계속되는 착취와 다른 종의 불가능한 노예화를 전제로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 중심적 방식으로 동물을 ‘합리적이고 인본주의적으로’ ‘이용’하려는 모든 시도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북친의 자연에 대한 개입주의적 윤리에는 지나친 면이 있다.

또한 북친은 현대식 트랙터를 찬양하지만, 제3세계에 트랙터가 도입되면서 많은 곳에서 자급자족 농업과 그 생태계가 완전히 파괴되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는 공예에 찬성하는 반면(물론 기술의 지원을 받음), 육체적 노동의 존엄성과 만족에 대한 톨스토이의 인식을 간과한다. 그는 일부 기술이 본질적으로 생명을 위협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그는 현대 기술이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필연적으로 타락하고 있다는 자크 엘룰(Jacques Ellul)의 주장도 부인한다. 

미국이 사회혁명의 중심에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는 또한 미국이 그 기술적 잠재력 때문에 세계사적 체제로서의 계층적 사회를 전복시킬 수 있는 사회혁명의 중심에 있다고 주장하지만, 미국에서도 특권층의 물질적 복지는 나머지 세계의 빈곤의 결과로 달성된다. 왜냐하면 미국은 인구의 5%만을 지원하기 위해 세계 자원의 40%를 소비하기 때문이다. 제3세계의 많은 지역, 특히 아프리카와 인도 아대륙은 실제 기근은 아니더라도 지속적인 영양실조 위협에 처해 있다.

열악한 생활 조건으로 인해 촉진되는 인구 증가는 전반적인 웰빙에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다. 재생 불가능한 특정 자원에 대한 명확한 한계도 있다. 풍요에 대한 북친의 낙관적 주장은 매우 발전된 산업 사회에만 적용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윤리에서 북친은 자연이 특정한 방식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사회가 이를 따라야 한다고 주장할 때 크로포트킨과 동일한 논리적 오류(자연주의적 오류로 알려짐)를 범한다. 

마침내 젊은 시절의 마르크스주의로

1960년대 말에 학생 운동은 무너졌고 반문화는 길을 잃기 시작하여 고립된 주머니로 분열되었다. 많은 급진적인 히피족과 학생들이 대기업과 법조계에 진출했고, 흑인 지도자들은 결국 시장과 정치인이 되었다. 1980년대에 와서 노동자 운동은 죽었고 북미와 유럽에 진정한 혁명적 반대가 거의 존재하지 않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북친은 유토피아의 창조가 가능하다고 믿었고, 성장의 한계, 인구 과잉, 한정된 자원의 감소, 지구 온난화의 위협에 확신을 갖지 못했다. 

1987년에 쓴 글에서 북친은 정치 영역의 사회 생태학이 근본적으로 녹색이라고 주장했다. 그것은 미국의 급진적 생태 페미니스트 운동, 시민 발의에 기반한 새로운 정치에 대한 요구, 지역 집회, 뉴잉글랜드의 타운 미팅 전통, 국내에서의 비동맹 반제국주의 운동과 함께 유럽 도시 그리고 해외에서는 특권층 백인의 지배와 철의 장막 양쪽의 초강대국으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위한 유색인종의 투쟁과 함께 성장했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환경주의, 페미니즘, 지방자치주의, 평화주의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사회운동은 모두 성장하는 중앙집권적 국가에 대항하는 60년대의 아나키즘적 추진력을 발전시켰다. 2006년에 사망한 그의 생애 말년에 그는 점점 더 종파적이고 독설적이 되어 마침내 젊은 시절의 마르크스주의로 되돌아갔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했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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