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7 18:35 (토)
독일 연구자들이 묻는다, ‘가르칠 자격’을 임팩트 팩터로 대체할 수 있는가
독일 연구자들이 묻는다, ‘가르칠 자격’을 임팩트 팩터로 대체할 수 있는가
  • 허유성
  • 승인 2023.11.21 09:0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유학생이 본 독일 박사후 연구자들의 삶
과학기간계약법과 하빌리타치온 사이에서

연구 안정성 해치는 ‘과학기간계약법’에 젊은 연구자 분노
5년 이상 걸리는 ‘가르칠 자격’ 하빌리타치온 지속성 의문
연구인력 해외 유출·여성 연구자 학계 이탈 우려도 커져 

내 친구 마틴(Martin)은 독일 역사학계에서 주목깨나 받는 신진 연구자다. 박사학위를 받은 지 채 3년이 안 된 그는 여기저기서 상도 받고, 이른바 ‘급’ 높다는 저널에 논문을 쏟아내면서도 후배 박사과정생들의 연구를 꼼꼼하고 자상하게 살피는 이상적인 중간급 연구자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난 건 2021년 가을이었다. 미국에서 열린 한 학회에서 그의 발표를 듣게 됐고, 연구관심사가 비슷해 이후 연락을 이어갔다. 얼마 뒤 나는 독일로 필드웍을 나갈 계획을 세워야 했고, 마틴에게 연락해 그가 일하는 연구소가 내 연구를 지원해줄 수 있는지 물었다. 마틴은 흔쾌히 연구소장의 승낙을 받아줬고, 나중에 독일에 오면 자신의 연구실을 함께 쓰자고 제안했다.

마침내 내가 독일에 도착했을 때 그는 연구소에 없었다. 그는 자신이 다른 대학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나는 그에게 ‘포닥’을 하는 거냐고 물었다. 포닥이라는 말이 충분치 않다고 느꼈는지, 마틴은 박사 취득부터 하빌리타치온(Habilitation)으로 이어지는 독일의 박사후 커리어가 미국과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힘드는 인고의 길인지를 한참 동안 친절하게 설명했다. 

늘 그렇듯 내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마틴은 마지못해 “그래 뭐 포닥인 셈이지, 독일식 포닥!”이라고 말했다. 나는 나중에서야 ‘독일식 포닥’이란 표현이 사실 자조에 가까운 것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한나다’ 독일 연구자의 분노

내가 마틴을 처음 만났던 2021년, 독일 트위터에서는 ‘IchBinHanna’라는 해시태그가 이슈였다. 한나(Hanna)는 독일 연방교육연구부가 ‘과학기간계약법’(WissZeitVG)을 홍보하기 위해 제작한 짧은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가상의 캐릭터다. 

과학기간계약법은 박사과정생과 박사후 연구자들이 학계 내에서 소득을 올릴 수 있는 고용 기한을 각각 6년으로 제한하는 법이다. ‘6+6 모델’이라고도 하는 이 법에 따라 박사과정생은 교수의 연구프로젝트에 연구보조원으로 고용돼 생계비를 벌고, 박사후 연구자는 교수가 되기 전까지 대학교나 연구소에 계약직 연구원으로 일한다.

홍보영상에서 한나는 자신을 이제 막 두 번째 계약을 체결한 박사과정생이라고 소개했다. 이어서 과학기간계약법이 노동 유연화를 통해 독일의 과학시스템을 합리적으로 만들고, 나아가 경쟁을 장려함으로써 혁신을 증진시킬 것이라고 설명했다.

동영상이 공개되자 독일의 연구자들은 분통을 터뜨렸다. 뒤셀도르프대학 철학과 소속 박사후 연구원인 암라이 바(Amrei Bahr)는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정부가 과학기간계약법이 연구자들의 삶과 과학시스템 자체를 얼마나 위태롭게 만들고 있는지 모른다고 비판했다.

이때 그녀가 사용한 ‘내가 한나다’라는 해시태그는 연구자들 사이에서 들불처럼 번졌고, 언론은 그제서야 앞다투어 연구자들의 속사정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논란이 커지자 교육연구부는 해당 영상을 삭제했다.

독일의 젊은 연구자들이 '과학기간계약법'을 반대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 속 여성 캐릭터는 독일 연방교육연구부가 '과학기간계약법' 홍보를 위해 제작한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가상의 캐릭터다. 독일 트위터에서 '내가 한나다' 해시태크가 이슈였다. 사진 제공=허유성

독일의 한나들은 낮은 급여 외에도 단기계약 실태를 지적했다. 독일에서 박사과정은 적어도 4년이 걸린다. 그 사이에 짧게는 몇 개월, 길어야 2년짜리 계약을 매번 새로 체결해야 하고, 그때마다 수행 연구과제와 계약 조건이 달라져 연속성과 안정성을 보장받기가 매우 힘들다는 것이다. 개인 연구는 물론이고 결혼·출산처럼 인생을 위한 장기 계획을 세우는 것도 불가능하다. 기존 연구소 내에서 적절한 계약을 찾지 못하면 학업을 중단하거나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 

몇몇 분야에서 문제는 더 복잡하다. 현행 과학기간계약법에 따르면 박사후 연구원은 6년 동안만 학내 기간제 계약 연구원으로 활동할 수 있다. 그런데 독일에서 법학, 의학 그리고 인문학 전공자들이 교수직에 지원하기 위해서는 5년 이상 소요되는 하빌리타치온이라는 학위를 받아야 한다. 6년 안에 하빌리타치온을 취득하고 교수직을 얻지 못하면, 최악의 경우에는 학계나 독일을 떠나는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교수 진입장벽이 비현실적으로 높다는 말이다.

쓸데없는 고(高)퀄

혹시나 모르는 독자를 위해 짧게 설명하자면, 하빌리타치온은 독일어권 지역에 있는 최상위 학위다. 박사 위에 학위가 하나 더 있다는 말인데, 교수가 되기 위해선 ‘가르칠 자격’(teaching qualification)이 있는지를 한 번 더 평가받아야 한다는 게 그 ‘유일한’ 이유다.

좁디좁은 중부 유럽 바깥에서는 거의 아무런 쓸모가 없는 이 학위를 받고 나면 파릇했던 연구자는 어느새 마흔의 중년이 되어있다. 참고로 영미권에서 교수자격을 획득하는 평균 연령대는 20대 후반이다. 박사학위만 있으면 되기 때문이다. 

교수자격을 얻기 전까지 독일 연구자들은 매우 불안정한 시기를 보낸다. 마틴처럼 기간제 계약에 따라 소속 대학과 연구소를 옮겨 다녀야 한다. 강의 기회를 보장하는 프로그램도 있지만, 자리는 제한적이다. 

하빌리타치온이 젊고 유능한 연구자들의 인생을 갉아먹고 있다는 비판은 20년 전부터 꾸준히 제기되어 왔다. 학위 기간만 5년이 넘고, 이른바 ‘필생의 역작’이 되어야 하는 하빌리타치온 논문 준비로 인해 다양한 학술·강의 활동을 경험할 기회는 제한된다. 실질적인 강의 경험, 국제적 학술 네트워크의 구축, 연구프로젝트 관리 등 교수자격을 갖추는 데 정말로 필요한 자질은 학위 심사항목에는 포함되어 있지도 않다.

 

법학·의학·인문학 교수들은 여전히 ‘가르칠 자격’ 고수
다른 전공은 하빌리타치온 대신 ‘주니어 교수제’ 도입
“독일 교육·과학시스템, 자국 연구자에게 매력 떨어져”

하빌리타치온을 마친다고 무조건 교수가 되는 것도 아니다. 독일에서는 ‘Dr.’ 앞에 ‘PD’ (Privatdozent)라는 칭호를 단 연구자를 많이 볼 수 있는데, 이는 하빌리타치온을 마친 후 교수가 되기를 기다리는 강사를 의미한다. 쉽게 말해 하빌리타치온이라는 특별한 ‘자격증’이 있으니 시간강사라 할지라도 그것을 하나의 ‘타이틀’로 인정해주겠다는 것이다. 

이대로라면 연구 인력의 해외 유출과 여성 연구자의 학계 이탈은 불 보듯 뻔한 결과다. 독일의 박사들은 자국 내 임용이 확실치 않은 상황에서 해외에서는 인정도 해주지 않는 값비싼 ‘자격증’에 시들어가는 젊음을 투자할 동기를 찾지 못하고 있다. 

독일은 이미 2002년에 하빌리타치온을 대체하려는 목적으로 주니어 교수제도(Juniorprofessur)를 도입했다. 3년 혹은 6년의 기간제 교수인 주니어 교수는 정년트랙 옵션이 포함되어 있을 경우 그간의 연구와 강의실적을 평가받은 뒤 정규직 교수로 임용될 수 있다.

많은 학과가 주니어 교수제도를 받아들였지만, 앞서 말한 법학·의학·인문학에서 하빌리타치온은 여전히 건재하다. 통계에 따르면, 2022년에 1천535명이 하빌리타치온을 취득했다. 1991년에 그 수는 1천650명이었다. 

하빌리타치온은 정말 나쁜 제도일까?

현재 하빌리타치온은 완전히 모멘텀을 잃어버렸다. 법학·의학·인문학을 제외한 약 70퍼센트의 전공 분야에서 하빌리타치온은 거의 주니어 교수제도에 자리를 내줬다. 그러면 독일의 법학·의학·인문학 교수들은 왜 아직도 하빌리타치온을 고수하고 있는 걸까?

사실 자연과학·공학·사회과학에서 하빌리타치온의 자리를 대신해 온 것은 주니어 교수제도가 아니라 임팩트 팩터와 같은 정량적 지표들이다. 독일 언론인 요제프 요페는 젊은 연구자들이 높은 수준의 저널에 더 많은 논문을 게재하는 상황에서 그들이 교수들에게 ‘가르칠 자격’을 평가받아야 한다는 사실에 의문을 표했다. 

이러한 인식의 기저에는 ‘가르칠 자격’이 교수진의 판단이 아니라 숫자에 의해 결정돼야 한다는 믿음이 자리하고 있다. 여전히 하빌리타치온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이들은 의술을, 법리적 판단을, 그리고 인문학적 소양을 가르쳐야 할 교수의 자격이 임팩트 팩터로 결정될 수 있는 것이냐고 반문한다. 

위기의 독일 교육·과학시스템

한 달 전 마틴은 새로운 대학교로 또 자리를 옮겼다. 그런데도 내가 마지막으로 연구소에서 발표했을 때 그는 기꺼이 발걸음해 주었고, 발표가 끝난 이후에도 한동안 나를 붙잡고 자신의 자료목록에서 내 연구에 쓸만한 것을 이것저것 보여주었다. 

헤어지기 전 그는 나에게 새로 옮긴 대학교에서 자신이 무슨 일을 하게 될지 설명했다. 그는 전과 달리 이번에는 ‘티칭 포지션’임을 두어 번 강조했다. 나는 마틴 같은 사람이 강의할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나는 그의 하빌리타치온에 대해서는 차마 물어볼 수 없었다. 어쩌면 그가 독일을 떠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나는 독일에서 방문연구원으로 1년을 보냈고, 그동안 내가 받은 인상은 독일의 연구자들이 자국의 시스템에 더는 매력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독일의 한나들은 시스템이 자신들을 해외로 내몰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하며 보다 “표준화된 모델”을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독일인들은 상황을 직시하고 있으며, 지난 20여 년간 개혁에 대해 진지하게 논의해왔다. #IchBinHanna는 여전히 공론장을 뜨겁게 달구고 있고, 얼마 전에는 조삼모사 같기는 해도 ‘4+2 모델’을 기본으로 하는 과학기간계약법 개정안이 발표됐다. 

의문은 여전히 남아있다. 주니어 교수제도 같은 미국식 모델의 도입은 초급 교수들에게 강의량과 연구실적에 대한 압박을 가중시킬 것이다. 법학·의학·인문학 영역에서 하빌리타치온이 정말로 임팩트 팩터로 대체될 수 있는 것인지 대한 논의도 더 필요해 보인다. 

독일 교육연구부는 관련 문제를 독일의 한나들을 포함한 모든 ‘이해당사자들과 함께’ 논의하고 법을 개정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허유성 객원기자·듀크대 사학과 박사과정
고려대 사학과에서 학사와 석사학위를 받은 후 듀크대 사학과에서 독일 현대사와 과학기술사를 공부하고 있다. 동독의 기술관료제적 경영정보시스템과 지식 하부구조에 관해 박사논문을 쓰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