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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위대하고 장엄하며 감동적인 모험의 결정체, ‘인체생물학’
가장 위대하고 장엄하며 감동적인 모험의 결정체, ‘인체생물학’
  • 최승우
  • 승인 2023.11.15 1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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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책_『인체에 관한 모든 과학』 | 대니얼 M. 데이비스 지음 | 김재호 옮김 | 에코리브르 | 296쪽

인간생물학만큼 삶과 밀접한 과학이 또 있을까? 아무래도 상대성이론이나 양자물리학보다 다이어트의 장벽이 더 현실적으로 와닿지 않는가. 챗지피티는커녕 휴지를 부여잡고 남모를 고통의 변비가 더 절박한 여성들이 부지기수다. 인간생물학은 지금 이 순간에도 질병을 비롯한 인체 제반 문제들과 싸워나가고 있다. 이 책은 인간생물학을 주제로 질문에 끊임없이 도전한 과학자들의 투쟁기이자 경험담이다. 과학이 삶과 괴리돼 있다는 우리들의 편견을 여지없이 깨부순다. 

인체의 경이로움은 이제는 너무 식상해 말하기도 귀찮은 진실이 된지 오래다. 그러나 놀랍게도 우리 인체의 비밀은 대부분 비교적 최근까지 가설과 추측의 대상이었다. 이 드라마틱한 반전은 17세기 현미경의 발견과 세포발견이라는 혁명적 계기에서 비롯됐다. 이 책에 따르면 ‘세포발견은 인간생물학에 대한 현대적 이해의 시작을 알리는 전조’라고 한다. 그리고 20세기 중반 터진 DNA 구조 발견은 그야말로 추진로켓같은 대폭발이었다. 우리가 우리 몸에 대해 알기 시작한지 얼마 안됐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반증한다. 

17세기 현미경의 발견으로 세포에 대한 연구가 본격 시작됐다. 이미지=픽사베이

 

루저와 너드들의 반란 

필자가 가장 감명깊게 읽었던 부분은 아이러니하게도 첫 장 「초고해상도 세포들」이었다. 1665년 로버트 훅의 ‘현미경 그림책’을 필두로 이를 개선한 레인엔 훅의 현미경과 에른스트 아베의 회의주의까지 근대를 잠시 다루더니 ‘해파리 덕후’ 일본계 미국인 과학자 시모무라 오사무로 훌쩍 넘어간다. 

잠시 에피소드를 간략히 설명하자면 시모무라는 평생 해파리가 빛을 내는 이유에 천착했다. 한편 의외의 인물 마틴 챌피가 우연히 그의 강연을 듣고 GFP(녹색형광 단백질)에 푹 빠졌는데 그는 GFP를 알기 위해 사방팔방 연락을 하게 된다.

그 중 한 인물이 우즈홀 해양연구소 의 더글라스 프레셔였다. 프레셔는 챌피에게 본인이 분석한 유전자를 보내기로 했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연락이 끊긴다. 챌피는 공교롭게도 안식년을 맞아 연락할 수 없어 프레셔는 그가 완전히 떠났다고 생각했고 챌피는 챌피대로 프레셔가 유전자 분리를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운명의 장난처럼 우여곡절 끝에 다시 연이 닿은 그들은 의기투합해 연구결과를 저명한 <사이언스>지에 발표한다.

이대로만 갔다면 해피엔딩이었겠지만 2008년 노벨상 위원회는 앞서 말한 시모무라와 챌피, 그리고 로저 챈(GFP 밝기 개선과 여러 색상의 단백질을 구현했다)에게만 노벨화학상을 수여한다.

같은 시기, 응당 노벨 화학상 수상자여야 할 프레셔는 도요타 자동차 대리점에서 일하고 있었다. 우즈홀 해양연구소를 거쳐 나사(NASA)의 계약직에서 일하다가 그마저도 정치적 이해관계로 퇴사, 실업의 늪에서 우울증을 겪다가 마지막으로 떠밀려 자동차 대리점에 취직한 것이었다. 그가 노벨상에서 누락된 까닭은 공동수상은 세 명까지만이라는 노벨상의 괴랄한 규칙때문이었다. 공동 수상자들이 수십 만 달러의 상금을 받는 동안 프레셔는 겨우 시간당 10달러를 버는 데 그쳤다.

하지만 챌피와 챈은 의리를 지켰고 수상 연설에서 프레셔의 공헌을 언급하는 것은 물론, 그가 스톡홀름에서 열리는 시상식에 참석하도록 비용을 지불했다. 그러나 프레셔는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나는 자금이 부족했고 그들은 단백질을 어떻게 사용하는지 보여줬다. 그게 핵심이다”라며 대인배적 풍모를 보였다. 그 누구도 기껏해야 해파리 연구가 생물학에 가치있는 무언가를 가져다줄지는 몰랐을 것이다. 위대한 과학의 첫 발은 언제나 이렇게 시작된다.

그런가하면 어린 자녀 둘을 둔 42살의 백수 가장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남자의 이름은 에릭 베치그. 코넬대 박사과정을 마치고 벨 연구소에서 6년간 현미경 개선 작업을 하다가 번 아웃에 환멸까지 느껴 퇴사했다. 아버지가 운영하는 공작기계 회사에도 취직했지만 적응하지 못했다. 그는 철저히 실패한 인생이었다.

아무 제약없이 연구하는 과학이 몹시도 그리웠던 차에 우연히 벨 연구소 시절 친구 헤럴드 헤스와 재회한다. 밤새 대화하면서 그간 죽어있던 열정이 불타오름을 느낀다. ‘어제의 용사’ 베치그와 헤스는 그렇게 뭉쳤고 그들의 최종 목표는 에른스트 아베의 법칙을 깨고 물리학의 기본 법칙을 극복할 현미경을 만드는 것이었다. 베치그의 카리스마와 자신감에 푹 빠졌던 리핀콧 슈워츠도 등장한다. 그녀는 베치그의 강연 5분만에 단순히 좋은 사람을 넘어 “완전히 다른 수준의 과학자”임을 깨닫는다. 그 직관과 통찰은 결코 틀리지 않았다. 베치그는 2014년 노벨화학상을 공동 수상한다.  

‘하나에 꽂혀버린’ 루저와 너드 스토리라는 점에서 매우 흥미로웠다. 마치 차고에서 실리콘 밸리 혁명을 일으킨 잡스-워즈니악처럼 일종의 과학 버전 신화를 써 내려간 느낌이다. 순수한 호기심과 천진난만함, 남들이 뭐라하건 밀고 나가는 뚝심이 서구 과학계의 지적 전통이 아닐까란 생각을 했다. 동시에 저들의 지적 패기가 부러웠다. 실패자를 승리자로 만드는 반전 드라마가 짜릿한 쾌감마저 준다.

 

책의 대략적 개괄

2부 「인간의 시작」은 이름조차 외우기 어려운 여성 과학자 막달레나-제르니츠카-코에스트의 임신 스토리로 서두를 시작한다. 우연히 태어날 아기의 유전자 검사를 통해 염색체에 이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녀는 과학자라는 직업군을 십분 발휘해 쥐를 통한 실험을 한다. 그녀는 위대한 과학자이며 동시에 위대한 엄마였다. 과연 뱃속 아이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 스포일러 대신 책을 통해 확인하기 바란다. 그리고 체외수정과 배아세포를 둘러싼 종교계의 입장, 중국 남방과기대 과학자 허젠쿠이의 유전자 가위까지 과학과 정치가 얽힌 복잡한 세계를 그린다.    

3부 「치유를 위한 힘」은 ‘렌’과 ‘리’라는 부부 과학자의 이야기를 다루며 그들이 만든 세포 분류기와 HIV퇴치 운동도 소개한다. 항체를 생성하는 B세포를 다룬 밀스테인과 밀러, 레게브의 거대한 ‘인간세포 아틀라스 프로젝트’ 등 개인의 유전정보를 통한 의료의 미래 청사진을 그린다.

4부 「다양한 색깔을 지닌 뇌」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시냅스와 뉴런, 축삭돌기를 필두로 뇌의 모든 뉴런을 각각 다른 색상으로 색칠해 표시하는 ‘브레인 바우’의 제프 릭트먼이 등장한다. 막스 플랑크 연구소의 빈 프리트 덴크, 혹시 한국계가 아닐까 싶은 승현준의 크라우드 소싱 연구도 흥미롭다. 정신과 의사이자 신경 과학자였던 독특한 이력의 다이서로스는 광유전 실험의 중요한 특징을 개발한다.

5부 「우리안의 타자들」은 이 시대 화두로 떠오른 마이크로바이옴(미생물의 유전정보 전체)에 할애했다. 이와 관련된 프레드릭 벡헤드, 피터턴보, 에란 엘리나브, 위생가설(세균의 노출과 면역 체계 상태 사이의 연관성을 제안한)의 데이빗 스트라찬, 마지막으로 이 챕터의 대미를 장식하는 ‘대변이식’이 나온다. 기괴하고 엽기적인 느낌마저 드는 대변이식은 인체과학의 미래중 하나라는 점에서 굉장히 신선한 느낌을 준다.

6부 「정말 중요한 코드들」은 칼텍(미국 캘리포니아 공대)의 젊은 교수 윌리엄 드레이어와 대학원생 리로이 리 후드의 일화로 시작한다. 리 후드는 훗날 단백질 시퀀싱(서열분석)을 접목한 단백질 분석기를 만들고 광우병과 관련한 프리온 단백질 발견에도 혁혁한 공을 세운다. 프리온 단백질과 관련된 스탠리 프루시너, 헝커필러의 이야기도 서술돼 있다. 제약회사 머크, 프레데릭 싱어, 노벨상 공동 수상자인 월터 길버트, 존 설스턴이 나열된다. 유전자 검사를 통해 암가계를 발견한 안젤리나 졸리가 유방을 절제한 유명한 사건, 마지막으로 저자가 이 책을 쓰게 된 경위를 다룬다.   

7부 「이 모든 게 무얼 의미하는가」는 이 책의 대미를 장식하는 챕터다. 저자는 현재, 인간 생물학의 모든 측면에서 혁명의 정점을 찍고 있다며 미래에 대한 강력한 희망과 자신감을 내비친다. 흡사 『공산당선언』 만큼의 강한 어조가 인상적이다. 그러나 과학적 지식과 적용이 세계분열을 초래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는 경고도 잊지 않는다. 저자는 말한다. “우리 각자는 광대한 우주에서 점 하나보다 작은 존재지만 받아들일 수 없는 정도의 장엄함을 지니고 있다”라며 “우리 자신의 신체 내부를 여행하는 것은 우리가 시작한 모험 중 가장 위대하고 가장 감동적이며 아마도 가장 중요한 모험일 것이다”라고.

 

휴먼 마이크로바이옴을 이용한 인체과학의 진보는 새로운 장을 열어줄 것이다. 이미지=미국 NIH

 

좁은 지면에 꽉꽉 눌러담은 듯한 알찬 구성

이 책은 마치 압축파일같다는 인상을 준다. 총 296쪽, 그마저도 주석과 옮긴이의 말을 제외하면 사실 232쪽의 짧은 분량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기가 녹록치 않았다. 조금 비약해 몇 주전 읽었던 플라톤의 『대화편』보다 까다로웠다. 내용이 지루하다거나 진부하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단지 많은 인명과 지명이 산발적으로, 마치 마인드맵처럼 쭉쭉 뻗어나가기에 적응할 시간이 조금 필요했던 것이다. 또한 부끄럽지만 필자의 과학적 식견이 부족했던 탓도 한 몫했다. 최신 과학적 개념이 생소하게 느껴져, 이해하기 위해 두 번 반복해서 읽어야 했다.

액션 영화처럼 매우 스피디하게, 그러나 밀도있게 다룬 세계의 서사가 폴더처럼 열린다는 것은 장점이나 이는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도 추측컨대 저자는 독자들에게 많은 정보를 주고 싶었던 욕심이 있지 않았을까? 호흡이 빠르면서도 알차다. 속이 꽉 차서 단번에 소화시키기가 어렵다. 여러 번 곱씹어봐야 제맛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혹, 과학적 지식이 충만한 독자가 읽는다면 일사천리로 페이지를 넘길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옮긴 이 김재호 과학저술가의 탁월한 번역은 매끄럽고 군더더기가 없어 ‘번역은 반역’이라는 번역 계의 자조섞인 유머가 이 책에서만큼은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어색한 번역 투의 문장을 찾아볼 수 없다. 이 빡빡한 양서의 가독성을 책임지는 원동력이라 할 수 있다. 과학저술가다운 노련한 강점이 작용했다.   

그리고 너머, 우리의 이야기

『인체에 관한 모든 과학』은 단지 주제만 과학일 뿐 일종의 스토리 텔링이다. 그야말로 한 편의 장엄한 과학 드라마다. 서구과학계의 흥미진진한 과학 일대기를 다룬 이 책을 읽으며 순간적으로 떠올랐던 것은 필자가 발을 딛고 사는 이 땅의 가련한 과학자들이었다. 우리 과학 환경은 너무나 잘 알듯이 서구의 그것보다 척박하고 열악한 토양인 것이 사실이다. 아무래도 지적 전통의 계보가 짧은 것도 있겠지만 정황상 처한 현실이 녹록치 않다.

슬프게도 한국의 지성계는 호기심과 열정만으로는 견인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다. 소위 말해 ‘어른의 사정’이라는 여러 이해관계와 자본의 분배문제가 어지럽게 얽혀 급기야는 순수과학의 절멸을 앞둔 최악의 상태로까지 직면했다. 서구 과학계를 위시한 지성계는 앞서 열거한 ‘루저의 승리’라는 드라마틱한 반전이 있는 반면 대한민국에서만큼은 ‘반전의 드라마’가 요원한 것이 사실이다.

저자인 대니얼 M. 데이비스의 문체는 마치 신이 난 어린아이처럼 이야기를 마구마구 풀어 놓는데, 나는 그 잔뜩 흥이 난 문체에 우리 현실이 대비돼 오히려 서글픔을 느꼈다. 우리 과학자들의 이야기도 듣고 싶은 것이다. 언젠가 한국 과학계가 자조와 체념의 정서를 뛰어넘어 우리도 저들처럼 신명나게 학문적 후일담을 쏟아낼 수 있는 그런 날이 오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최승우 기자 kantmani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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