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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그늘에 가려 잊힌 ‘긍원 김양기’를 만나다
아버지 그늘에 가려 잊힌 ‘긍원 김양기’를 만나다
  • 이근우
  • 승인 2023.11.14 08: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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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와 아들 ‘연록’ 이야기

김홍도가 지은 ‘연록’은 후일 ‘양기’로 개명
완당 김정희도 김양기의 작가적 소질 칭찬

도화서 화원 김홍도는 정조 초상화 제작에 참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1791년 12월 22일 충청도 연풍현감에 임명돼 약 3년(1791∼1795) 동안 재직했다. 부임 첫해를 포함해서 1793년과 1794년 연풍에 큰 기근이 연이었다. 현감 김홍도는 한걸음에 백두대간 공정산(현 조령산) 해발 1,026미터 8부 능선에 자리한 상암사(1792년 5월경 추정)에 올라 기우제를 지내고, 이 산(상암)에 빌어 늦둥이 아들을 얻었다는 문헌이 조선사찰사료(1911) 『연풍군 공정산 상암사 중수기』에 전한다. 현재 상암의 절 모습은 사라지고 터만 남아있다. 

김홍도의 늦둥이 아들은 어릴 적 이름이 연록(延祿)인데, 즉 김홍도가 현감 재직 때 나라로부터 녹(祿)을 받을 때 얻은 아들이라 연풍의 ‘연(延)’ 자와 녹봉(祿俸)의 ‘녹(祿)’ 자로 ‘연록’이라 한다. 양기는 후일 개명한 이름으로 추정하고 있다. 연록의 이름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단원유묵첩』에서 확인된다. 필자는 지난해 1월 21일 『단원유묵첩』 실견을 통해 연록을 확인했다. 그 대목은 다음과 같다. “을축년(1805년) 단구(김홍도)가 회갑이 되는 해 정월 22일 아침에 우연히 써서 연록에게 준다(乙丑丹邱之甲年也元月二十二朝偶書贈延祿).” 바로 이 내용의 마지막에 연록 이름이 있다. 

『단원유묵첩』(국 립중앙박물관)에 표기된 ‘연록’이 다. 2022년 1월 21일 촬영했다. 그림=이근우

 

연록 이름의 근원이 되는 상암사

그동안 연록 이름의 근원이 되는 상암사는 무성한 잡초 속에 잊혀 버렸다. 필자는 잡초 속에 잊혀 가는 상암의 흔적이 매우 안타까워 연풍 주민들과 함께 부처님 오신 날(불기 2566년)을 맞이해 지난해 4월 28일 상암사 터에서 봉축 행사를 진행했다. 현감 김홍도가 연풍을 떠난 지 약 227여 년 만에 처음으로 상암에 연등의 불을 밝히고 법주사 스님의 염불 목탁 소리가 상암에 가득했다. 이렇게 상암은 새로운 역사적 순간을 강하게 움켜잡고 긴 잠에서 깨어났다. 

올해에도 상암사 터 부처님 오신 날 행사는 이어졌다. 필자는 그 역사적 감흥을 이어 올해 10월 14일부터 이틀간 제40회 연풍 조령 문화제 때 양기 작품을 폼보드에 인쇄를 해서 국내 최초로 ‘연풍현감 김홍도 아들 양기(연록) 작품과 연풍면의 첫 만남’을 기획했다. 아울러 학술발표도 함께 진행했다. 그동안 아버지의 큰 그늘에 가려 잊혔던 연록(1793년 출생 추정)이 태어난 지 약 230여 년 만에 처음으로 국립중앙박물관이라는 집을 떠나 고향과 다름없는 충북 괴산군 연풍면을 찾아 주민들을 만났다. 

최순우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이조의 화가 22」 기고를 통해 긍원 김양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완당 김정희도 긍원 작품에 붙인 화제 「제금화사(題金畵師) 천리(千里) 방주야운완당집(방朱野雲阮堂集)」 속에서 칭찬하고 있다. 말하자면 긍원은 그의 부친 단원이 끼쳐 준 후광 속에 그의 작가적 소질이 원만하게 드러났다고 평가했다.

 

국내에 처음 소개하는 김홍도 부자 이야기

2014년부터 연풍현감 김홍도와 상암사 관련 논문을 준비하면서 연풍과 상암사는 필자에게 연구목적 이전에 삶의 의미를 되돌아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그동안 연구 맥락을 살펴보면 △김홍도 도화서 입문 △도화서 터 △정조와의 만남 △정조 초상화 제작 참여 △연풍현감 제수 △관료 행적 △상암사 중수기 △연록(양기) △단원유묵첩 △양기(연록) 작품 연풍과의 첫 만남과 학술발표로 이어지는 문헌 고증과 현장 답사를 통해 김홍도 부자 이야기를 국내 처음으로 필자가 정리했다고 생각한다. 어느새 10년의 세월을 맞이하고 있다. 가까운 시일 내에 책 발간과 함께 김홍도의 삶과 예술에 있어 작지만 한 뼘의 새로운 공간이 채워질 것으로 본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김홍도 그림에 관한 연구는 이미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현감 김홍도·상암사·연록(양기)·단원유묵첩에 관한 연구와 재조명은 매우 미미한 단계이다. 특히 아버지의 큰 그늘에 가리어 그동안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던 연록에 관한 재조명은 첫걸음도 떼지 못하고 있다. 

어느 한 사람의 흔적을 찾아 그 모양새를 다듬는 일은 마치 대장장이가 무쇠를 녹여 수백 번 수천 번 망치질의 손을 거쳐야 온전하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연장 하나가 만들어지는 것과 다르지 않은 듯하다. 그렇게 만들어진 연장 하나가 한 가족을 먹여 살리게 되며, 한 해의 풍년을 기약할 수 있게 된다. 조선 당대 최고의 화원으로 칭송되는 김홍도 부자 이야기는 아직 쇠를 달구지 못하고 있다. 

아무리 이전의 역사와 문화가 찬란했다 하더라도 사람이 찾지 않으면 사라진다. 윤봉길 의사에 관한 글 한 구절을 기억해 보며 글을 마무리한다. 걷고 또 걸어야 길이 생긴다. 걷지 않는 길은 사라진다. 

 

 

이근우 
중원대 교수·동양화
중국 남경예술대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대만 의난현 예술학회 고문이자 동서미술문화학회·한국동양예술학회 회원이다. 『연풍현감 김홍도와 상암사 이야기』 등을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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