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8 14:35 (일)
난간 없이 사유하기: 한나 아렌트의 정치 에세이
난간 없이 사유하기: 한나 아렌트의 정치 에세이
  • 김재호
  • 승인 2023.11.07 17: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나 아렌트 지음 | 신충식 옮김 | 824쪽 | 문예출판사

이전에 아무도 사유하지 않은 것처럼 사유하라!

20세기 가장 독창적인 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가 우리 시대에 던지는 치열하고 밀도 높은 정치 사유

20세기 가장 독창적이고 영향력 있는 정치사상가로 꼽히는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 이후 20세기 인류가 처한 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해왔다. 문예출판사의 《난간 없이 사유하기》는 한나 아렌트 사유의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정치 에세이로, 아렌트의 조교 출신인 제롬 콘이 아렌트 에세이를 시기별로 정리하여 엮은 책이다.

아렌트가 46세(1953)부터 서거 직전인 69세(1975)까지 남긴 글, 강연, 서평, 대담 등 총 42편의 글을 집필 순서대로 실었고, 한 문단 분량의 글에서부터 길게는 64쪽 분량의 긴 논문까지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다. 이 중 절반이 넘는 26편은 이미 다양한 지면에 실려 출간된 적이 있고 16편은 처음 출간되는 에세이들이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을 집필하던 시기에 《인간의 조건》, 《과거와 미래 사이》,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 《혁명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공화국의 위기》, 《폭력론》을 출간했는데, 이 책들에 담긴 아렌트의 치열한 사유가 《난간 없이 사유하기》 속 에세이에 잘 녹아 있다.

한나 아렌트의 글은 치밀하고 밀도 높은 사유의 깊이만큼 독해하는 데 만만찮은 공력이 필요하다. 특히 여러 층위의 글이 들어 있는 《난간 없이 사유하기》에는 방대하면서도 광범위한 아렌트 사유의 단초와 핵심이 담겨 있다.

문예출판사의 《난간 없이 사유하기》는 서문과 해제를 통해 아렌트 사유를 촘촘하게 훑고 정리하여 독자들이 아렌트 사유의 세계에서 지치지 않고 유영할 수 있도록 했다. 편집자 제롬 콘의 서문에서는 아렌트의 정치적 사유를 바탕으로 미국 공화국의 쇠퇴 원인, 혁명과 평의회 체제, 전체주의의 출현과 아돌프 아이히만을 어떻게 수용할지를 심도 있게 분석했고, 옮긴이 해제에서는 서문에서 다루지 않은 아렌트의 핵심 주제인 정치, 다원성, 판단의 문제를 세계성의 측면에서 다루었다. 방대하면서도 광범위한 아렌트의 사유가 담긴 에세이를 읽어나가는 데 서문과 해제가 작으나마 실마리를 제공해줄 것이다. 

질문하는 자의 난간 없는 사유

이 책의 제목인 ‘난간 없이 사유하기’는 아렌트의 정치 사유를 표현하는 대표적인 말이다. ‘난간’은 우리가 사유하고 판단할 때 기대는 전통적인 개념으로, 난간을 붙들지 않고 사유한다는 것은 우리의 정신을 지배하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완전히 새롭게, 기준도 틀도 없이 사유한다는 의미라고 볼 수 있다.

난간이 없다는 것은 자유로우나 위험하며, 언제 끝모르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칠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부담을 안고 계단을 올라야 한다. 하지만 사유란 그런 것이다. 위험하지만 용기 있게 나아가는 것, 어디에도 의존하지 않고 치열하게 사유한 끝에야 세상과 인간, 자유와 삶, 정치가 무엇인지 가닥을 잡을 수 있고 그 속에서 인간다운 삶과 정치를 이야기할 수 있다. 아렌트의 에세이에는 고전 철학부터 중세 철학, 근대의 지형을 바꾼 혁명들, 양차 세계대전 등 철학, 역사, 정치사가 망라되어 있다.

아렌트는 그 내용을 하나하나 짚으면서도 전통적인 기준과 틀의 한계를 벗어나 새로운 시각으로 현상과 사건의 의미를 좇는다. 대답하는 자가 아닌 질문하는 자로서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면서 진정한 난간 없는 사유를 보여준다.

멈춰서 생각해보라

아렌트는 사유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사유는 위험하다고 말한다.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대면하는 것이 무엇이든 대면할 수 있도록 항상 우리를 새롭게 준비해주기 때문이다. 사유하지 않으면 우리는 일상에서 만나는 모든 것을 그게 무엇인지도 모른 채 흘려버리게 되고 이는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세상이 무엇으로 구성되고 흘러가는지 인식도 판단도 하지 못하게 된다. 비판하고 검토하면서 주어진 것을, 대면하게 되는 모든 것을 해체하고 무너뜨리는 게 사유의 과정이다.

그러니 사유는 위험할 수밖에 없고 아렌트도 그 점을 부인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러한 사유보다 더 무서운 것은 ‘무사유’다. 우리가 익히 아는 아이히만이 무사유의 전형이며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는 익히 알고 있다. 사고 정지, 사유하지 않음을 극히 경계한 아렌트는 자기 안에 갇혀 있지 않고, 위험할 정도로까지 사유를 밀고 나가기 위해 일단 “멈춰서 생각해보라”고 한다.

어쩌면 아렌트의 이 말은 그 어느 때보다 지금 시대에 절실하다. 사이버 공간 속 허상에 집착하고 타인의 심상한 말 한 마디에조차 상처받는 저변에는 사유하지 않음이 있다. 혼돈과 속도의 시대에 하던 일을 멈추지 않는 한 누구도 생각에 침잠할 수 없다. 이는 아렌트가 우리 시대에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