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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기하는 철학?…‘문제’를 토론하라
암기하는 철학?…‘문제’를 토론하라
  • 정성호
  • 승인 2023.11.10 10: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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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말하다_『정성호 교수의 철학 강의실』 정성호 지음 | 필로소픽 | 432쪽

전공에 갇혀 다른 철학 배제하는 분파적 태도
철학이 이데올로기화하면 사회의 병폐로 전락

이 책은 필자가 미국과 한국의 대학 철학과에서 지난 30년간 강의한 내용의 일부를 요약하고, 그 수업 광경을 재현한 것이다. 이 책은 철학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을 위한 입문서의 성격을 띠면서, 동시에 철학과 3∼4학년의 전공수업에 해당하는 수준의 내용을 담고 있다. 필자가 이 책을 쓰게 된 계기와 목적은 다음과 같다.

필자는 오랫동안 철학 전공과목 강의를 해왔다. 그런데, 수년간 그렇게 강의를 하다 보니, 저학년에서 올라온 학생들의 철학적 기본 상식이 많이 부족하고, 특히 철학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이 크게 잘못돼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들은 철학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용어와 개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뿐만 아니라, 과거의 위대한 철학자들의 사상을 배워서 이해하고 암기하는 것을 대학에서 철학 공부하는 것의 전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3∼4학년의 전공 수업은 물론, 철학 자체에 대한 올바른 접근과 태도를 가질 수 있는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필자는 정년을 10년 앞둔 때부터 1학년 철학개론 과목을 강의하기 시작했다. 철학에 대한 이런 오리엔테이션이 초래할 수 있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하나는 그런 철학적 환경 속에서는 과거 철학의 전통 보존과 계승만 있을 뿐이다. 우리 시대에 필요하고 요청되는 철학, 우리가 현재 당면하고 있는 철학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과 해결을 위한 노력이 생겨나기 어렵다. 

철학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해 온 매우 활발하고 역동적인 학문이다. 특히 수학·논리학·언어학 등이 눈부시게 발전하고, 물리학·화학·생물학·정치학·경제학 같은 특수과학과 공학기술 등이 삶의 환경은 물론 인간의 세계관까지 크게 바꾸어 놓은 근대 이후의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과거 철학의 보존과 계승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철학함의 전부인 곳에서는 시대와 더불어 발전하고 공헌하는 철학이 불가능하다.

철학에 대한 잘못된 오리엔테이션, 즉 전통 보존과 계승이 중심인 철학적 환경에서는 지역적 혹은 시대적 분화와 분파가 발생해 인간과 세계에 대한 본질적이고 보편적인 문제를 탐구하는 철학의 고유한 특성을 손상시킬 가능성이 많다. 철학교수 본인이 전공하는 철학자의 사상이나 전통에 치우친 나머지 다른 철학자나 전통에 대하여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태도를 갖기 쉽다. 

이런 분파적 태도는, 철학교수들 사이에 이해관계가 상충하고, 철학이 이데올로기화한 환경에서는 교육적·사회적 병폐로 변질될 수 있다. 테크놀로지의 시대에 상업주의와 물질주의, 엔터테인먼트가 문화 전반을 휩쓸고 있는 상황에서, 인문학 전반이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는 현실에서, 결코 철학에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니다.

퇴임을 하고 난 후 학생들과 멀리 떨어져서 생활하면서, 역사 중심의 한국 철학에 문제 중심의 철학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하게 느끼게 되었다. 문제 중심의 철학 개론서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철학입문·존재론·인식론·윤리학·심리철학·언어분석철학에서 중요한 주제를 선택해, 각 장이 시나리오로 제시된 사고의 실험, 학생 교수 간의 질문과 토론, 주제와 관련된 교수의 강의와 설명, 그리고 교수의 개인적 입장으로 구성된 책을 저술하게 됐다.

그 유명한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묘사한 그림이다.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지 토론할 필요가 있다. 이미지=픽사베이

이 책은 총 10개의 철학적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이 주제들은 고대로부터 철학의 중심 과제인 것도 있고, 현대에 이르러 새롭게 제기된 것도 있다. 1∼2장은 철학이라는 학문에 대한 개관과 특성, 3∼4장은 형이상학의 중심 분야인 존재론, 5∼6장은 근대 서양철학을 특징짓는 인식론, 7장은 도덕론과 윤리학을 다루고 있다. 모두 철학의 전통적인 핵심 분야이다. 8∼9장은 현대의 두뇌과학과 컴퓨터 기술의 발전으로 촉발된 심리철학의 문제들, 10장은 수학·논리학·언어학의 눈부신 발전에 자극받은 언어분석철학의 문제들을 다루고 있다.

이 책의 형식과 내용은 과거의 철학 입문서나 이론서와는 다르다. 주입식 교육을 받아온 사람들에게 다소 낯설고,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 방식이 철학에 입문하는 사람들에게 올바른 방식이고, 미래의 철학 교육 방식이기도 하다.

 

 

 

정성호 
전 동국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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