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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속의 한국지성<24> 강재언 / 前 하나조노대·역사학
세계 속의 한국지성<24> 강재언 / 前 하나조노대·역사학
  • 교수신문
  • 승인 2001.08.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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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08-14 13:43:06
강재언 교수는 1926년 제주에서 태어나, 50년 도일하였다. 1953년에 오사카상과대학(現 오사카 시립대학)을 수료한 후, 81년 교토대학에서 한국근대사 연구로 문학박사를 받았다. 1984년부터 하나조노 대학에 촉탁교수로 재직했고, ‘계간 청구’ 편집위원을 역임했다. 한국에서 출간된 저서로는 ‘韓國의 開化思想’(비봉 刊, 1981), ‘韓國近代史硏究’(한울 刊, 1982), ‘韓國의 近代思想’(한길사 刊, 1985), ‘서양과 조선’(학고재 刊, 1998), ‘조선의 西學史’(민음사 刊, 1990) 등이 있다.

나는 지금도 내가 역사가가 된 우연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일본으로 건너간 것은 한국전쟁 직후다. 나는 서울에서 내 고향 제주도의 4·3사건과 그 후의 학살극을 알고 있었다. 당시 25세의 나는 도저히 이승만정권을 지키기 위해 총질을 할 생각은 없었다. 일본에 건너간 나는 한국에서는 도저히 할 수 없었던 맑스주의경제학을 오사카상과대학에서 연구하게 되었다.
나는 일제시대에 철저한 황민화교육을 받았고, 종전되는 1945년 4월에는 징병검사까지 받았다. 일제시대에 내가 배운 ‘국사’(일본사)에 등장하는 한국이란 고대의 ‘神功皇后 三韓征伐’로부터 시작해 중세의 ‘豊辰秀吉의 朝鮮征伐’, 명치 초기의 ‘征韓論’으로부터 이른바 ‘한일합방’에 이르기까지 일본에 의해 정복당한 역사의 나라였다. 나는 굴욕과 정복으로 점철된 역사학이란 대학에서 전공할만한 학문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대학에서는 한국전쟁과 관련해 한국문제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내가 한국인 학생이라 하자 교수, 학생을 막론하고 한국문제에 대해 많은 질문을 해댔다. 나는 황민화 교육을 받은 나머지 그러한 질문에 답할 수 있는 기초지식이 거의 없었다. 당시 일본에서 읽을 수 있는 한국관계서는 거의 전부가 일본학자들이 쓴 책이어서, 한민족이란 과거에는 중국에 종속되었고, 근대에는 일본의 지배를 받지 않고서는 자력으로 근대화할 능력이 없는 열등민족이라는 식의 인상만 남게 했을 뿐이다.
질문에 올바르게 답할 수 없었던 내 모습에 대한 성찰 끝에, 일본사람들의 고질화된 한국관을 시정시키기 위해 우선 내가 한국사를 연구해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히 들었다. 일본인이 쓴 책들 중에는 한국근대의 경제관계서 이외에 한국전쟁과 직결되는 정치사상사에 관한 것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이 공백을 채워나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정치경제학에서 한국근대사 연구로

무엇보다도 학설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학계 내에서 발언권을 가져야 했다. 내가 그런 발언권을 얻었던 것은 1950년대 중반부터였다. 학계에서 처음으로 인정받게 된 내 논문은 1954년에 역사학연구회 기관지 ‘역사학연구’에 두 번에 걸쳐 연재한 ‘조선봉건체제의 해체와 농민전쟁’이다. ‘동학당난’은 일본근대사에서도 청일전쟁의 원인으로 반드시 언급되는 문제였다. 나는 ‘동학당난’을 낡은 봉건체제의 해체를 촉진하고 새로운 사회를 창출하기 위한 ‘농민전쟁’이란 견해를 제기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명실공히 한국사람이고, 일본에 귀화해서 대학이나 연구소에서 연구를 계속할 생각은 없었다. 어떻든 나는 1953년부터 1968년까지 만 15년 동안 조총련에 소속해 통신사, 잡지사, 연구소에 근무하기도 하고 간부교육을 맡기도 했다. 그 15년은 나의 인생에서 가장 귀중하고 알찬 시기였다.
그 시기에도 연구를 중단한 것은 아니었다. 일본인과 한국어를 모르는 동포들을 대상으로 한 계몽서를 펴내거나, 혹은 일본학자들의 논문이나 저서가운데 한국문제를 왜곡된 시각으로 바라본 견해들을 반박해 나갔다. 일본인과 동포청년들을 계몽시키는 한편, 한국인에 대한 그릇된 선입견과 차별에 대한 투쟁으로 내 민족운동은 자리잡아갔다.

조총련과의 결별…58세에 얻게된 교수직

물론 조총련 내부에서는 여러 가지 사상투쟁과 갈등도 수없이 있었다. 특히 북한노동당 내부의 사상적 갈등이 일본의 조총련 조직에까지 파급되는 경우가 많았다. 내가 1968년 결국에 조총련을 떠나게 된 것도 김일성과 그 가족을 신격화하기 위해 한국의 역사를 왜곡한 것을 역사학자로서 용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며, ‘유일사상체제확립’을 둘러싼 사상투쟁에 동참할 수 없었던 학자적 양심의 결과라 하겠다. 무엇보다 북한의 현실은 내가 맑스주의 경제학을 공부하며 상상했던 ‘사회주의’와 달랐다.
나는 1981년에, 지금은 고인이 된 소설가 김달수, 고고학자 이진희와 동행해 한국을 방문했다. 당시 ‘계간 삼천리’의 편집위원이었던 우리는, 한국형무소에 수감된 5명의 재일동포 사형수를 비롯한 정치범, 이른바 ‘간첩’들에 대한 관대한 조처를 청원하러 가는 길이었다. 우리의 노력은 다음해 사형수 전원이 감형되고 몇 년 후에 석방되도록 하는 결실을 맺었다.
43세가 되던 1968년, 나는 결국 조총련과 결별했다. 앞으로 취직할 전망도 없고 생활방도 역시 막막했다. 그 후 몇 년간은 고독을 술로 달래며 연구에 몰두했다. 조총련 활동기간 중에 이루지 못한 한국근대사연구를 정리해서 1970년에 ‘조선근대사연구’를 출판했다(국역본 ‘韓國近代史硏究’, 한울 刊). 그 칩거의 기간동안 4∼5권의 저서와 번역서를 펴낼 수 있었다. 다행한 일은 어려운 출판사정에도 불구하고 나의 변변치 못한 저서를 출판하겠다는 출판사가 있었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일본사회의 폐쇄성에 대한 국제적 비난에 대응하기 위해 대학에서도 한국인 전임교원을 본명으로 채용하는 경우가 적지않지만 1970년대까지는 한국인은 겨우 비상근강사(한국의 시간강사에 해당)나 조수(조교)가 고작이었다. 1974년경부터 대학에 재직중인 일본친구들의 호의로 교토대학, 오사카대학, 오사카시립대학, 북으로는 홋카이도 대학, 남으로는 류큐대학에서 비상근강사 생활을 하게 됐다. 흔히 말하는 ‘보따리 장수’생활을 그 이후 10년간이나 하게 됐다. 마침내 교토에 있는 하나조노 대학에 촉탁교수로 임용된 것이 1984년, 내 나이 58세 되던 해였다.
나는 앞서 언급한 ‘조선근대사연구’를 펴낸 후에 한국근대사의 밑바닥에 흐르는 사상의 맥락을 색출해 체계화하는 일에 연구를 집중했다. 즉 단순한 외압과 그에 대한 항거라는 역학적 관계가 아니라 각종 형태의 투쟁과 연결되는 사상과 그 상호관계에 대한 문제라 하겠다. 1984년에 출판한 ‘근대조선의 사상’이 그것이다 (국역본 ‘韓國의 近代思想’, 한길사 刊).
근대한국의 여러 가지 사상조류 속에서 특히 근대지향적인 사상 조류로 내가 주목한 것이 개화사상과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개화운동이다. 즉 개화운동의 좌절이 자력에 의한 근대화의 좌절이며 식민지화에 연결된다는 관점이다.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조명한 저서가 1980년의 ‘조선의 개화사상’이다(국역본 ‘韓國의 開化思想’, 비봉 刊).
1996년에 나는 고희를 맞이하게 됐다. 그때까지 연구에만 집중한 것도 아니며 또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남북통일문제, 재일동포문제, 일본언론계의 그릇된 한국관 등 도저히 우리가 방관할 수 없는 문제가 언제나 산적해 있었다. 조총련을 함께 떠난 몇몇 동지들이 힘을 모아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발언할 수 있는 마당을 만들었다. 그것이 1975년에 창간해 87년에 50호로 종간한 ‘계간 삼천리’며, 그 후신이 89년에 복간해 98년에 25호로 종간한 ‘계간 청구’다. 1975년부터 98년까지 총 75권에 걸쳐 이어진 이 잡지는 그 시대를 살아온 재일한국인의 귀중한 증언집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저작선집 발간이후, 연구는 지속되고

그간 출판된 저서가 그럭저럭 20여권이 된다. 그 중에서 한국 근대사상사와 그 관련저서를 골라서 재정리해 고희기념으로 ‘강재언저작선’ 전5권(明石書店 刊)을 세상에 선보이게 됐다. ‘조선의 유교와 근대’, ‘조선근대의 변혁운동’, ‘조선의 개화사상’, ‘조선의 서학사’, ‘근대조선의 사상’이 그것이다.
나는 고희 이후의 삶을 인생의 공백이라 생각한다.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한국의 근대사상을 유교통사속에 연결시키기 위한 작업을 시작해 어떤 잡지에 만 3년간 연재한 바 있다. 이 책은 오는 12월에 아사히신문사 서적출판부의 ‘아사히선집’에 ‘조선유교의 이천년’이란 표제로 수록될 예정이다.
나의 인생을 돌이켜보면 보통사람에 비해 경험 못한 것이 두 가지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 하나는 선거권을 행사한 경험이 없다는 것, 다른 하나는 보너스를 구경한 바가 없다는 것이다. 온 세상이 선거다, 보너스 경기다, 들끓을 때마다 나는 일본사회에서 다른 이들처럼 소박한 낙을 즐기는 평범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되씹어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그런 자잘한 경험을 할 수 없었다 하더라도 나의 인생에 후회는 없다.

●내가 본 강재언
현실모순 외면않은 실천적 지성

하우봉 / 전북대·역사학
1970년대 후반 한국에서 역사학을 공부한 학도들에게 강재언은 영웅이었다. 우리들은 일본어로 된 그의 논문을 비밀리에 복사해 돌려읽으면서 그 참신한 주장과 선명한 논리에 감탄과 감동을 금할 수 없었다. 개항 이후의 근대사를 사상과 운동을 연계시키면서 조망한 그의 글들은 쾌도난마와 같은 통쾌함과 힘이 있었다.
대학원 시절의 ‘우상’을 처음 만난 것은 1985년 일본 오사카에서였다. 그런데 날카롭고 강한 눈빛을 지녔을 것이라고 미리 상상했던 이미지와는 달리 그는 매우 소탈하고 부드러운 남자였다. 술 한잔을 하신 후 가방을 봇짐처럼 등에 걸치고 가는 표표한 모습은 얼핏 김삿갓을 연상케 했다. 그 후 여러 번 뵐 기회가 있었지만 그 때의 첫인상은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강재언 선생은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역정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면모를 지니고 있는데, 학자로서의 업적은 크게 세 분야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한국근대사 연구이다. 1954년 ‘조선봉건체제의 해체와 농민전쟁’을 발표하면서 시작된 한국근대사 연구는 반일의병운동과 1930년대의 항일빨치산 운동으로 확대돼 갔다. 그는 70년대 초반부터 한국근대사에 관한 수많은 업적을 내었는데, 특히 운동사에 그치지 않고 운동의 근저에 흐르는 ‘근대조선의 사상적 수맥’을 찾아내는데 주력했다. 이 점이 그의 탁월한 면모이자, 한국근대사 연구의 차원을 한 단계 높이는 것이었다. 그 후 그의 사상사연구는 실학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마음속으로 사숙하였던 다산 연구에까지 미쳤다. 한국근대사상사에 관한 그의 업적은 1996년에 간행된 ‘강재언저작선’ 다섯권에 수록돼 있다.
둘째는 재일한국인 문제의 해결을 위한 이론적 모색과 계몽활동이다. 그는 재일한국인의 발언대이자 나침반과 같은 역할을 한 계간 잡지 ‘계간 삼천리’와 ‘계간 청구’의 편집인을 22년간에 걸쳐 맡았다. 이와 같이 그는 재일동포 사회의 여러 모순에 대해 온몸으로 싸안으면서 노력한 실천적 지식인이었다.
셋째로는 한국와 일본, 남한과 북한 사이에 있는 중간자로서 관계개선과 통일에 기여하고자 했다. 특히 일본사회에 한국의 참모습을 소개함으로써 왜곡된 이미지를 개선하고, 양국의 관계사 및 미래에 관한 전망을 제시했다. ‘한일교류사’, ‘교과서에 쓰여진 조선’, ‘한일관계의 허상과 실상’ 등은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이와 같이 그의 연구는 다방면에 걸쳐있으면서도 각 분야마다 선구적이거나 전체를 조망하는 작업으로서 높은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으며, 해방 후 일본학계를 주도해온 역사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요즈음 이른바 ‘탈근대주의’가 유행처럼 범람하면서 근대지향적인 운동과 사상을 평가하였던 연구를 ‘근대주의’라고 비판하는 경향이 있다. 이에 따라 강재언선생의 연구도 ‘근대주의’를 지향한 것으로 시대적 효용성을 상실했다는 평판이 일부에서 제기되기도 한다. 그러나 중세말기에는 근대문명을 어떻게 수용하고 성공적으로 그 단계에 진입하느냐 하는것이 가장 중요한 가치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에는 추체험적 사고가 필요하며 이 점에서 그의 연구는 여전히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 선생은 지금도 ‘한국의 유교 2000년’을 집필, 금년 말에 출간할 예정이라고 한다. 그의 쉼 없는 학문적 열정에 경의를 표하며 건승을 바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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