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9 00:10 (월)
평범한 실이 어떻게 값비싼 예술이 될까
평범한 실이 어떻게 값비싼 예술이 될까
  • 정은진
  • 승인 2023.10.20 10:2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저자가 말하다_『실의 변신 : 프랑스 태피스트리 읽기』 정은진 지음 | 사회평론아카데미 | 248쪽

발로 뛰고 눈으로 직접 본 미술사 연구
과거·현재, 저자·독자 잇는 태피스트리

필자의 석사학위논문은 베네치아 화가인 조반니 벨리니(1430∼1516)에 관한 작가 연구였고, 박사학위논문은 12∼15세기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제작된 성모대관(Coronation of Virgin)에 관한 주제연구였다. 이번에 단행본으로 출간한 태피스트리에 관한 연구는 재료(material)와 매체(medium)에 주안점을 두었다. 박사논문을 마무리할 무렵 유럽에 체류할 기회가 있었고, 많은 태피스트리를 접할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클뤼니 중세 미술관을 비롯한 프랑스 미술관들에서 본 태피스트리의 정교한 아름다움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그 아름다움이 결국 본격적인 연구로 이끌었다. 특히 ‘텍스트로서 태피스트리: 16∼18세기 프랑스 태피스트리 연구’에 대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에 힘입어 나는 3년 동안, △브뤼셀 왕립 예술·역사 박물관 △파리의 고블랭 제작소 △클뤼니 중세미술관 △보베 △리옹 △퐁텐블로 △콩피에뉴 △빅토리아&엘버트 미술관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게티 센터 △스톡홀름 궁전까지 두루 탐방 조사하고 파리 미술사 도서관(INHA) 등에서 자료를 수집할 수 있었다. 

이처럼 눈이 감지한 아름다움 때문에 발을 움직여 많은 곳을 답사한 연구라는 점에서 필자는 나의 미술사 연구를 ‘눈’과 ‘발’의 미술사라고 부르고 싶다. 또 작가 연구나 주제연구와 달리 태피스트리와 같은 매체 연구는 제작과정을 정밀하게 알아야 하는데, 공예학부에서 강의하며 가끔 제작과정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었다.

미술사 연구의 ‘꽃’은 자신의 연구를 전시로 구현할 때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국내에서 서양의 고전 미술을 전공하는 연구자가 자신의 연구를 전시로 구현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므로, 책으로나마 전시를 열고, 도록처럼 책을 만들고 싶었다. 중세 왕족이나 귀족은 글을 읽을 줄 몰라도 아름답고 호화로운 필사본을 만들고 소장했다. 책을 읽지 않더라도 이 책을 소장하고 도판으로나마 작품을 감상했으면 좋겠다. 이 책에 실린 아름다운 이미지를 감상하다 보면 결국 연구 내용을 읽고 싶게 될 것이다.

이 책의 핵심은 태피스트리를 통해 15∼18세기 프랑스 사회의 정치·경제·사회·권력과 사랑 등을 읽어내는 것이다. 실이라는 재료에서 시작하여 아바카노비치(1930∼2017) 같은 현대 태피스트리 작가까지 거시적인 흐름에서 프랑스 태피스트리의 전성기를 조망하고 특징과 영향까지 탐구한 국내 최초의 태피스트리 연구서라는 점에 의미를 두고 싶다. 

특별히 오감(五感)과 자유의지를 시각화한 것으로 널리 알려진 「여인과 유니콘」 시리즈를 당시 귀족 사회에서 유행했던 카펠라누스(Andreas Capellanus)의 『사랑에 대하여(De amore)』와 같은 텍스트의 영향으로 보아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단계로 해석한 점에 대해 연구자로서 자부심을 느낀다. 프랑스 태피스트리를 대표하는 작품을 한 점만 선택하라면, 보통은 고블랭 제작소에서 제작된 것, 특히 루이 14세의 권력을 선전하는 작품을 꼽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책 표지 작품으로 사용한 보베 제작소의 「그로테스크」 태피스트리를 선택할 것이다. 왜냐하면 300점이나 제작되어 전 유럽에 수출된 파급력 때문이다. 

실이라는 평범한 재료가 가장 값비싼 예술품이 되는 과정 자체가 흥미롭다. 현대미술은 변기나 돌을 가져다 놓고 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태피스트리와 같은 수공예는 시간과 노력이 고스란히 드러나기에 정직하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고 싶다. 또한 태피스트리의 직조 과정이 글을 쓰는 것과 매우 비슷하다. 손을 움직이지 않으면 한 줄도 짤 수 없고, 한 줄도 쓸 수 없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태피스트리는 화가와 직공이 협업해야 하고, 이동이 가능하며, 복제가 자유롭다는 점에서 현대사회에 매우 적합한 매체이다. 어쩌면 태피스트리가 유행했던 르네상스 시기와 지금이 닮아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이 과거와 현재, 저자와 독자를 이어주는 실이 되기를 바라며, 독자 여러분을 아름다운 태피스트리의 세계로 초대한다.

 

 

 

 

 

 

 

 

 

 

정은진 
이화여대 미술사학과 강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