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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60] 강압적인 권력은 언제나 형편없는 방편이라는 ‘커뮤니티 아나키스트’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60] 강압적인 권력은 언제나 형편없는 방편이라는 ‘커뮤니티 아나키스트’
  • 박홍규
  • 승인 2023.10.09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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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60 폴 굿맨①
폴 굿맨. 사진=위키미디어

수잔 손택이 사르트르와 비교하면서 “나에게 가장 중요한 미국 작가”라고 한 폴 굿맨(1911~1972)이 1960년에 낸 『바보 어른으로 성장하기』(Growing Up Absurd)가 2017년에 우리말로 번역되었다. 57년 만이다. 

굿맨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라고 평가되기도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소개되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반세기만에 그의 책이 처음 소개된 것은 획기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아나키즘의 실천을 구체적으로 보여준 점에서 그렇다. 1950~60년대의 반체제운동과 평화운동에 앞장서서 반군사주의, 급진적 분권화, 참여민주주의, 유기적 공동체 등을 통해 당시 반문화에 깊은 영향을 미쳤지만, 그 무렵 한국에서 그에 대한 관심은 기피되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미국의 체제문화만이 소개되었고, 그런 친체제 미국 이미지는 지금까지도 뿌리 깊으며, 최근에 와서 더욱 심해졌다. 그래서 반세기가 지나서야 굿맨을 읽게 된 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다. 미국의 반문화는 그동안 상당히 변질되어 그 실체를 알 수 없을 정도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굿맨은 더 이상 읽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탈학교론자에게 영향을 준 ‘바보 어른으로 성장하기’

그러나 지금도 유튜브에는 「폴 굿맨이 내 인생을 바꾸었다」(Paul Goodman Chaged My Life)는 2011년 제작의 다큐멘터리가 나올 정도로 굿맨은 여전히 미국에서 영향력이 있고, 반세기 이상이 지났음에도 한국에서도 ‘오늘의 책’으로 읽을 가치가 있다.

「폴 굿맨이 내 인생을 바꾸었다」 포스터

특히 지금 우리 청소년들도 반세기 전 미국 청소년들처럼 자신들이 어리석은 ‘바보 어른으로 성장하기’를 강요하는 ‘헬조선’에 절망하고 있지 않는가? 굿맨은 그런 사회에 순응하여 바보가 되지 말고, 그 사회에 반항하여 고독한 홀로서기를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차라리 학교를 벗어나라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은 이반 일리치를 비롯한 많은 탈학교론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바보 어른으로 성장하기』는 굿맨이 쓴 수많은 책, 그것도 예술, 인권, 분권화, 민주주의, 교육, 미디어, 정치, 심리학, 기술, 도시계획, 전쟁 등 수많은 장르와 주제에 걸쳐 쓴 많은 책들 중 하나에 불과하다. 굿맨의 그러한 측면도 극도의 전문화가 지배하는 한국에 소개되지 못한 이유의 하나일 것이다. 동시에 그가 일찍부터 양성애자임을 공개적으로 밝혀 대학을 비롯한 여러 공공기관에서 쫓겨나고 학위 취득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그는 43세인 1954년에 시카고대학에서 학위를 받는다)도 한국의 근엄한 학자들이나 언론인들에게 기피된 이유일 것이다.  

 
1911년에 뉴욕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굿맨은 파산으로 가족을 버린 아버지와 여성복 행상으로 평생을 산 어머니와 떨어져 이모 집에서 자랐다. 학비가 저렴하여 노동자 자녀들이 주로 공부한 뉴욕시립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면서 크로포트킨의 책을 읽고 아나키스트가 된 굿맨은 대공황이 시작된 1931년에 졸업한 뒤 시, 에세이, 소설, 시나리오, 희곡을 썼다. 컬럼비아대학교와 하버드대학교의 대학원에서 공부하면서 강의도 하고 결혼도 했으나, 양성애라는 ‘부적절한 성적 행동’을 이유로 강제로 추방되었다.

그 뒤 뉴욕에서 작가 생활을 시작하고 <파르티잔 리뷰>(Partisan Review)에서 영화평을 쓰면서 1941년에 최초의 시집, 그리고 이듬해 소설 『그랜드 피아노』(Grand Piano)를 냈다. 이어 진보적인 기숙학교에서 가르쳤으나, 양성애자임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병역기피를 옹호했다는 이유로 역시 쫓겨났고, 같은 이유로 <파르티잔 리뷰> 기고도 끝났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굿맨은 평화주의자이자 지방분권주의자로 활동했다. 

사람들은 본래 일하기를 좋아하고 유용하길 원한다

『예술과 사회적 자연』(Art and Social Nature, 1946)에서 굿맨은 미적 감각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현대 교육은 과학에 비중을 두어야 사람들이 현대 기술 환경에서 편안하게 느끼고 과학적 삶의 방식이 갖는 도덕성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고 믿었다. 이어 1946년부터 빌헬름 라이히와 접촉하여 자기 정신분석을 시작하고 정신분석요법에 참여했으며 심리 치료사로도 일했다.

공동집필한 『게슈탈트 치료』(Gestalt Therapy, 1951)에서 그는 개인과 사회적, 물리적 환경 사이의 새로운 조화를 모색한 정신치료법의 이론을 썼다. 치료자와 내담자의 경험을 중시하여 지각의 증진에 초점을 맞추는 게슈탈트 치료는, 프로이트와 그 학파가 중시한 생물학적 요인보다 사회문화적 영향이 퍼스넬리티에 끼치는 영향을 중시한 라이히의 사상에서 비롯되었다.   

1947년 굿맨은 건축가 형인 퍼시발 굿맨(Percival Goodman, 1904~1989)과 함께 쓴 『콤뮤니타스: 삶의 방법과 삶의 길』(Communitas: Means of Livelihood and Ways of Life)에서 현대 미국의 무분별함과 관료제에 대한 대안을 처음으로 제안했다. 그것은 도시 조직에 대한 아나키즘적 관점의 책으로서, 커뮤니티가 주민 공통의 필요와 이해관계로 단합된 개인의 대면적인 자주 연합으로 회복되어야 한다고 주장을 담았다.

두 사람은 생산과 소비의 차이를 없애고 가정에서 노동을 ‘격리’하거나 그 반대로 하는 것을 중단하자고 제안했다. 윌리엄 모리스처럼 그들은 사람들이 본래 일하기를 좋아하고 그 일이 유용하기를 원한다는 것을 인식했다. 일에는 리듬이 있고, 놀이와 마찬가지로 자발적인 감정에서 생겨나며 유용하다는 것은 사람들에게 옳게 느끼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규율을 중시하는 현대의 공장체제는 노동의 본능적 쾌락을 파괴한다고 비판하고,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두 사람은 노동자의 참여와 통제, 상대적으로 자급자족할 수 있는 상대적으로 작은 단위의 커뮤니티를 권장했다. 이를 통해 각 커뮤니티는 독립적인 관점을 유지하면서 결속력을 가지고 더 큰 전체로 들어갈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크로포트킨처럼 공장과 농장, 도시와 시골의 통합, 지방 분권화 및 지역 자치를 옹호했다. 

권위주의적이고 억압적인 세력에 대해 ‘선을 긋는’ 것

경제는 이윤보다는 유용한 것의 생산에 기초해야 한다고 주장한 굿맨은 자신을 아나키즘적 전통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창의적인 예술가로 보고, 아나키스트가 해야 할 일은 사회에서 작동하는 권위주의적이고 억압적인 세력에 대해 ‘선을 긋는’ 곳을 결정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굿맨의 아나키즘은 역사적 환경이 제시한 조건에 대해 개인 또는 자발적 그룹의 자유롭고 직접적인 반응에 의해서만 가치 있는 행동이 발생한다는 명제에 근거한다. 정치적이든, 경제적이든, 군사적이든, 종교적이든, 도덕적이든, 교육적이든, 문화적이든 간에 대부분의 인간사는 강압, 하향식 지시, 중앙 권위, 관료제, 감옥, 징집, 국가, 미리 정해진 표준화, 과도한 계획 등으로 인해 좋은 결과보다 더 많은 해를 입힌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나키스트는 본질적인 기능을 증가시키고 비본질적인 힘을 감소하고자 원한다. 이것은 명백한 정치적 함의를 지닌 사회심리학적 가설이다. 굿맨은 자신을 강압적인 권력은 언제나 형편없는 방편이라고 믿는 커뮤니티 아나키스트를 자처했다.

시민의 자유는 정책·사업 또는 아이디어를 시작할 수 있는 기회

굿맨은 항상 자유와 건강을 절대선으로 생각했고 ‘유기체의 자율규제’가 가장 잘 작동한다고 확신했다. 그의 아나키즘은 간섭으로부터의 자유라는 차원의 자유에 대한 부정적인 정의가 사소한 것이고 옹호할 수 없다고 느꼈기 때문에 고전적인 차원의 자유주의를 넘어섰다. 대신에 그는 활동 개시의 조건으로 적극적인 의미의 자유를 옹호했다. 그러한 능력이 없으면 사람들은 형식적으로는 자유롭지만 실제로는 무력하고 노예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자유는 단순히 국가에 의해 홀로 남겨지는 것(freedom-from)이 아니라, 개인과 집단이 사회를 시작하고 만들고 자율적인 시민이 될 수 있는 기회(freedom-to)를 의미했다. 즉 시민의 자유는 정책, 사업 또는 아이디어를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의미해야 하지, 단순히 구속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할 수 없다고 했다. 

동시에 굿맨은 존 듀이의 영향을 받아 실용주의적이었고 ‘실제 상황에 대한 아나키스트 원칙의 상대성은 아나키즘의 본질’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그는 제퍼슨의 권리장전(헌법에 반대됨)을 더 많은 발전을 위한 기본이 되는 위대한 역사적 업적으로 확인했다. 그 시대에 회중 교회와 자유 중세 도시의 정신이 아나키스트의 철학이었다. 미국의 민권 운동조차도 거의 고전적으로 분권주의자이자 아나키스트였다.

‘신석기 시대의 보수주의자’

굿맨에게 아나키즘은 영광스러운 미래만을 향한 것이 아니라 과거의 자유가 손실되지 않고 반대 방향으로 바뀌지 않도록 끊임없이 경계하는 것이었다. 나아가 기술 생활의 공허함에 맞서고 새로운 사회 형태를 생각하기 위해 우리 시대에 필요한 것은 ‘다음 상황’의 유토피아적 사고에 끊임없이 대처하는 것이라고 굿맨은 주장했다. 

반면에 그는 스스로를 ‘신석기 시대의 보수주의자’라고 부르기를 좋아했다. 그는 현대 세계에서 아나키스트가 리버테리안적 전통의 수호자여야 하고 사회의 유익한 경향을 조성하여 점진적인 변화를 요구해야 한다는 것을 인식했다. 구스타프 란다우어(Gustav Landauer)와 마찬가지로 그는 다음과 같이 썼다. “자유 사회는 기존 질서에 대한 ‘새로운 질서’를 대체할 수 없다. 그것은 사회생활의 대부분을 구성할 때까지 자유로운 행동의 영역을 확장하는 것이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했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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