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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Z 세대’에게 철학 가르치기
‘MZ 세대’에게 철학 가르치기
  • 권홍우
  • 승인 2023.10.11 08: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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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코로나시대 최고의 강의 (32) 권홍우 경북대 철학과 교수

학생들에게 소위 “쓸데없다”고 하는 순수 학문 중에서도 최고라 할 만한 철학을 가르치다 보니, “어떻게 가르칠까?”보다도 “무엇을, 도대체 왜 가르쳐야 하나?”라는 질문을 더 많이 하게 된다. 대학에서 순수 학문 분야의 입지가 갈수록 좁아지면서, 철학 교육 자체에 대해 회의감과 무기력함을 고백하는 교수도 꽤 있다.

그런데 내 경우에는 상황이 좀 달랐다. 타협 없이 정통 철학을 가르침에도, 전공수업의 수강생이 코로나19 상황을 거치면서 꾸준히 늘어나더니 이제는 100여 명이 수강하는 대형 강의가 됐다. 여러 요인이 합쳐진 결과로 나의 공으로만 볼 일은 결코 아니다. 

오픈북은 학생의 공부 패턴을 바꾼다

학생 커뮤니티 ‘에브리타임’에는 요즘 문·이과 사이의 ‘전쟁’이 심심치 않게 벌어진다고 한다. 다음과 같은 취지의 게시글도 있었다. 이공계열 학생인데, 인문사회계열 전공 수업을 한 번 들어봤더니 왜 인문사회계열 학생들이 취업을 잘 하지못하는지 알겠더라는 것이다. 어떤 학자가 무슨 이론을 제시했는지 달달 외우는 것이 수업의 전부인데, 그런 공부로 요즘 세상에 어디에 취업할 수 있겠냐는 내용이었다.

악의적인 측면이 없지 않지만 뼈아픈 지적이다. 인문학적 사유 역량이 중요하다더니, 우리 스스로 인문사회 과목을 정보 전달 위주의 ‘암기과목’으로 만든 것은 아닐까? 그래서 취업에 바쁜 학생들의 관심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적어도 내가 수업에서 만난 요즘 학생은 과거의 학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요즘의 학생은 어렵고, 당장은 쓸 데없어 보이더라도, 수업을 통해 더 깊게 사유할 수 있는 역량을 기르고 더 똑똑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느끼는 강의를 제 발로 찾아온다.

그러나 도대체 어떻게? 한 가지 방법만 소개해 보겠다. 나의 경우 모든 시험을 ‘오픈북’으로 했다. 배운 것을 암기해서는 풀 수 없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해야지만 풀 수 있는 문제를 출제하는 것이다. 출제는 고역이지만, 학생들의 공부 패턴은 확실히 달라진다. 출제에 대한 고민 과정에서 강의자의 교육 목표가 좀 더 분명해지는 것도 수확이다.

권홍우 교수는 학생이 수업 내용을 ‘통암기’하는 방식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생각할 수 있도록 모든 시험은 오픈북으로 진행한다. 또한, 강의에 대한 평가는 학기말이 아니라 온라인을 통해 수시로 이루어진다. 이미지=권홍우 교수 제공

‘통암기’ 하는 MZ에게 1차 문헌 노출시키기

요즘 ‘평균적인’ 인문사회계열 대학생들의 전공 공부 패턴은 이렇다. 수업에는 가급적 빠지지 않고 꾸준히 참석하되, 평소에는 공부를 거의 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시험 2주 전쯤이 되면 시험공부를 시작하는데, 공부는 수업 시간에 사용되었던 PPT 자료와 필기를 읽는 것이 핵심이다. 가급적이면 교수님이 수업에서 했던 농담까지 적어두었다가 ‘통암기’하는 편이 유리하다.

사실 이런 식의 공부로 순수 학문을 통해 길러야 할 역량이 길러질 리 만무하다. 특히, 철학 분야에서는 철학자들의 문헌을 스스로 탐독하는 훈련을 하는 것이 필수이다. 문제는 마땅히 읽힐 것이 없다는 사실과 또 그마저도 잘 안 읽는다는 사실. ‘짤’에 익숙한 요즘 학생들을 위해서 나는 철학자들의 어려운 1차 문헌을 발췌하고 다듬어 200쪽 정도의 강의자료집을 만들고, 매 수업 전에 어느 정도 분량을 읽어오도록 한다.

실제로 읽었는지 여부는 간단한 LMS 온라인 퀴즈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독서에 익숙지 않은 요즘 세대라지만, 논리적 글 읽기 훈련이 중요하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다. 수업을 통해서 적절히 기회를 부여하면 학생들은 기꺼이 잘 따라온다. 

소논문 과제를 내는 것도 빼놓지 않는다. 단, 학생들이 어려운 주제에 대해서 스스로의 논리로 쓸 수 있는 글은 2~3쪽을 넘지 않는다는 것을 유념하는 것이 좋다. 1차 소논문에 대해서 피드백을 해주면 2차 때에는 조금 더 나은 글을 써오고, 무엇보다도 글쓰기에 자신감이 붙는다.

‘성적 못 받으면 내 탓’이라는 강의평가

코로나19로 녹화 강의를 하던 시절에는 학생들의 학업 성취에 대한 우려가 컸다. 그런데 한 가지 놀라웠던 경험은 내가 담당한 수업의 경우 학업 성취도가 오히려 향상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이유는 분명했다. 대면 강의에서는 수학 능력이 좀 떨어지거나 아침 수업에 나올 정도로 부지런하지 못한 학생들은 낙오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녹화 강의가 항상 열려 있었기에, 의지만 있다면 학생들이 충분히 만회할 기회가 있었던 것이다.

전면 대면 강의로 전환된 현재에도 나는 매시간 강의를 녹화하여 LMS에 게시한다. 코로나19 시절의 경험 덕분에 이제 강의실에 설치된 웹캠으로 녹화하여 LMS에 올리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수업 외에 Zoom을 통한 온라인 면담시간이나 시험 전 Q&A 시간을 갖는 것도 코로나19로 달라진 모습으로 학생들의 반응이 좋다. 

“성인들인데 모든 걸 이렇게 떠먹여 줘야 하나?” 그러나 우리 모두 다양한 영역에서 “떠먹여주는” 기술의 혜택을 보고 있지 않은가? 무엇보다도 최대한 많은 학생이 최대한 많은 것을 얻어갈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적절히 이용하는 것이 현명하다. 최근 주관식 강의평가 중에 ‘성적 못 받으면 무조건 내 탓인 강의’라는 평을 몇 번 본 적이 있는데, 이런 노력을 반영한 것이 아닌가 한다. 

권홍우 경북대 교수의 강의에 한 학생이 남긴 평가다. 

온라인 강의 피드백은 학기 중에도

내가 가르치는 강의에서 한 가지 특징이 있다면, 첫 시간에 직전 학기에 해당 수업에서 받았던 강의평가를 학생들에게 읽어준다는 점이다. 좋은 평가는 수업에 대한 학생들의 기대를 높인다, 나쁘게 평가한 점들에 대해서는 이번 학기에 어떤 식으로 개선할지에 대해서도 말해준다.

학기 중에는 온라인 퀴즈의 주관식 문항을 이용해 주기적으로 강의에 대한 의견이나 어려운 점을 적도록 한다, 코로나19 때 소통에 대한 갈급함으로 시도한 방법인데 효과가 커서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코로나19 이전보다 학생과의 소통은 훨씬 더 활발해졌다. 대면으로는 한마디도 안 할 것 같은 학생도 글을 통해서는 자유롭게 의견을 전한다. 학생의 반응을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는 것은 강의 개선을 위해 꼭 필요하다. 그러나 효과는 그 이상이다. 자신의 의견에 귀 기울이고 있다고 느낄 때, 학생은 그 진정성에 보답하려 한다.

강의의 변치 않는 정답, 실력과 진정성 

소소한 팁이 많겠지만, 누군가가 좋은 강의의 조건을 묻는다면 나의 답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실력’과 ‘진정성’. 난해하고 추상적인 이론을 생생하게 살아 있는 것으로 만드는 실력을 기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또 한 가지는 학생을 향한 진정성이다. “어차피 공무원 될 아이들인데 이런 건 가르쳐서 뭐하나” 식의 태도는 최악이다. 정말로 중요한 것을 가르친다는 확신을 가지고, 애정으로 학생들을 대한다면 학생은 그에 대해 반응하게 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교수자가 교육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으로 강의에 임하면 좋겠다. 

권홍우 경북대 철학과 교수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MIT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호주 시드디 대학에서 연구원, 서울대와 연세대에서 강사를 했으며 현재는 경북대 철학과 부교수다. 주요 논문으로 「Moore’s Paradox: An Evansian Account」, 「Mary and the Two Gods」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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