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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방 40년: 저항과 희망의 기록
독방 40년: 저항과 희망의 기록
  • 최승우
  • 승인 2023.09.13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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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버트 우드폭스 지음 | 송요한 옮김 | 히스토리아 | 431쪽

2019년 퓰리처 상 최종 후보 | 미국 도서상American Book Award 수상 | 스토상Stowe Prize 수상
〈뉴욕타임스〉 〈워싱턴 포스트〉 〈퍼블리셔스 위클리〉 올해의 도서 선정

이 비할 데 없이 뛰어난 회고록에서 우드폭스는 루이지애나 감옥에서 지낸 수십 년을 그대로 들려준다… 이 책은 ‘결백과 정의에 무관심한’ 사법체계에 대한 믿기지 않는 고발이며 비인간적인 독방감금에 대한 충격적인 폭로이다. 그는 거침없고 이지적인 묘사로 독자들을 감동시키고 끊임없이 생각하게 만든다.                                                                       〈퍼블리셔스 위클리〉          

《독방 40년》은 미국 루이지애나의 악명 높은 앙골라 교도소의 독방에서 삶의 대부분을 보낸 앨버트 우드폭스의 이야기이다. 우드폭스는 앙골라 교도소 복역 중에 블랙팬서당(흑표당) 일원이 되었고, 폭력적인 교정당국에 맞서 수감자 인권보호에 앞장섰다.

어느 날 한 교도관이 살해되자 교정당국은 우드폭스에게 살인 누명을 뒤집어씌워 그를 40여 년 동안 독방에 감금했다. (그의 동료인 허만 월리스도 교도관 살해 누명을, 로버트 킹은 한 재소자를 살해한 누명을 썼고, 뒤에 인권운동가들은 그들을 ‘앙골라 3인’으로 부르며 구명운동을 펼쳤다.) 우드폭스는 68세에 자유의 몸이 될 때까지 국가의 제도적 폭력과 기만에 맞서 싸웠다.

앨버트 우드폭스는 1947년 미국 뉴올리언스 빈민가에서 태어나 자랐다. 10대부터 소년원과 교도소를 들락거리다가, 1969년 흉악한 범죄에 대해서 가차 없이 중형을 부과하는 뉴올리언스의 ‘원 스트라이크 아웃’ 제도에 의해 무장강도 혐의로 50년 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1970년 교도소에서 블랙팬서당(흑표당)의 당원들을 만난 다음 그들의 일원이 되었다. 그는 블랙팬서와의 만남을 “방구석의 나를 찾아와 비춘 한 줄기 빛과 같았다”고 고백했다. 그는 이제까지 자신이 옳지 않은 짓을 했다는 수치심과 함께 큰 고통을 느꼈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았다.
  
1972년 앙골라 교도소의 교도관인 브렌트 밀러가 살해되는 사건이 벌어지자 교도소 당국은 우드폭스와 동료 허만 월리스에게 누명을 씌웠고 이때부터 그들은 40여 년 동안 1,8*2.7미터 크기의 독방에서 하루 23시간을 갇혀 살아야 했다. 우드폭스의 또 다른 동료인 로버트 킹 또한 한 재소자를 살해한 누명을 쓰고 이후 30년 동안 독방에 갇혀 지냈다.

이 같은 국가 폭력에 의한 누명 씌우기는 터무니없었지만 이성적인 대응이 허용되지 않았다. 우드폭스는 “나는 더 이상 기대하지 않았다. 나는 사법체계가 결백이나 정의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죄 없는 사람이 교수형을 받을 수 있고, 사법체계는 단지 어떤 종류의 로프를 쓸 것인가를 결정하면 됐다. 이것이 법률 용어로 ‘정당한 절차’로 불리었다. 위법행위를 일삼으며 직업적 규칙을 어기는 검사들에게 맞설 수단이 우리에겐 없었다”고 썼다.

그는 한 인간을 파괴하고 징벌하는 막힌 공간인 독방을 긍정적인 곳으로 탈바꿈시켰다. 손바닥만 한 공간을 그 자신을 교육하는 곳으로 이용했다. 자신의 도덕성을 키우고 행동원칙을 정립하는 곳으로 사용했다.

“나는 40대에 깨지기 않는 도덕적 기준, 곧 옳고 그름에 관한 강렬한 느낌을 갖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느끼지 못할 때도 나는 보고 느끼고 맛볼 수 있었다. 어떤 것이 옳지 않게 느껴졌을 때는 어떠한 위협도 어떠한 압박도 나로 하여금 그것을 하게 만들 수 없었다”고 그는 고백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앙골라 3인’의 끊임없는 저항과 결백은 널리 알려졌고, 아니타 로딕을 비롯한 인권운동가들은 물론 수많은 시민의 관심과 지지를 얻게 되었다. 그들은 10년 넘게 ‘앙골라 3인’의 결백을 주장하고 석방을 요구했지만, 연이은 재심과 청원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했다.

인종차별과 기만으로 얼룩진 사법과 검찰 체계는 그만큼 견고했다. 2011년에는 유엔이 ‘독방감금 반대 성명’을 통해 독방 수감을 ‘고문’으로 정의하면서 우드폭스와 허만을 독방에서 풀어줄 것을 요구했고, 국제앰네스티는 더 나아가서 그들의 즉각적인 석방을 요구했다. (‘앙골라 3인’ 중 로버트 킹은 2001년 결백을 인정받지 못하고 형량거래를 통해 석방되었다.)

허만 월리스는 2013년 10월 유죄선고가 파기되면서 석방되었다. 다만 그가 간암으로 임종하기 3일 전이었다. 허만은 단지 사흘을 자유의 몸으로 살았지만, 그 사이에도 잔인한 검찰은 그를 살인 혐의로 다시 기소했다. 마침내 앨버트 우드폭스도 2016년 2월 형량거래를 통해 석방되었다. 자신의 무죄를 가리키는 많은 증거에도 불구하고 결백을 인정받지 못한 심정을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내가 하지 않은 일로 거래를 해야 했다. 나는 이제 내게 모든 것을 의미했던 내 말의 진실성보다 자유를 택해야 한다. 내 말은 내 어머니의 선물이었다. 44년 동안 나는 내 말로 살아남았다. 내 말은 세상 가장 어두운 곳에서도 나를 살아 있게 했으며 나를 제정신으로 남게 했으며 나의 인간성을 지켜주었다. 지금 나는 내 말을 지키지 않으려 하고 있다. 나는 결백했다. 허만도 결백했다. 나는 내 심장을 한 조각 뜯어낸 듯했다.”

자유의 몸이 된 그는 미국의 많은 대학에서 법학도들에게 강연을 했고, 국제앰네스티와 함께 세계 곳곳을 여행하면서 인권보호 활동을 펼쳤다. “사람들은 44년 동안에 미국이 어떻게 변했는지 내게 묻곤 한다. 물론 나는 많은 변화를 본다.

하지만 경찰과 사법체계에서는 대부분의 변화가 피상적일 뿐이다… 오늘날 인종차별주의가 44년 전처럼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여전히 존재하며 드러나지 않게 간접적으로 자행된다. 우리는 하나의 사회로서 깊은 변화를 이루어야만 한다.

뿌리가 없이는 아무것도 자라날 수 없다. 그 또는 그녀의 피부색이나 머릿결, 문화적 유산, 젠더, 성적 취향에 근거한 체계적 증오는 아무런 가치 없는 짓이다. 그것들은 하찮은 것들이다. 우리는 서로 다른 것보다 같은 것이 더 많다.”

40년 독방감금에 대한 더없이 강력한 회고록… 그리고 깊은 우정… 우드폭스는 우리가 미국의 독방에 갇혀 있는 수만 명의 남자와 여자와 소년들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것은 현대의 고문이다. 이 책을 다 읽고서 당신의 쇄골에 눈물이 고이지 않았다면 당신은 나보다 강한 사람이다. 미국의 사법체계에 혁신이 필요하다는 우드폭스의 신념은 언제나 유효하다.                      드와이트 가너 〈뉴욕타임스〉

독방 감금은 수감자를 특별한 목적에서 무너뜨리기 위해 사용하는 징벌이다. 하루 23시간 홀로 감금되는 두려움을 덜어줄 수 있는 것은 내가 알기로는 없다. 1982년, 독방에 감금되고 10년 뒤에도 여전히 나는 문득 일어나서 문을 열고 나가려는 자신과 싸움을 벌여야 했다. CCR에 수감된 우리는 아마도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처절한 감정, 즉 미쳐버릴 것 같은 두려움을 어떻게든 이겨내야 했다.

CCR에 수감된 지 한 달쯤 지나서, 내 침상에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땀이 나더니 감방 벽들이 동시에 나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온몸에 옷이 들러붙어서 셔츠와 바지를 벗었지만, 여전히 쥐어짜이는 느낌과 함께 목이 조였다. 천장도 나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숨쉬기가 어렵고 생각하는 것과 보는 것도 어려웠다. 나는 간신히 서서 몇 발작 걸어 벽까지 가서 돌아서서 문으로 걸어갔다. 그렇게 문과 맞은 벽 사이에 오가기를 꽤 오랫동안 했다. 1시간은 그랬는지도 모른다. 마침내 나는 지쳐서 침상에 드러누웠고 곧 잠이 들었다.

처음 두 번 그런 다음에는 그것이 시작될 때를 알게 되었다. 옷이 답답해지면서 땀이 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공기가 몸을 짓눌렀다. 5분이나 10분이면 끝나기도 했지만 1시간 동안 계속되기도 했다. 그저 문과 벽을 오가는 것만이 도움이 되었다. 나중에 밀실공포증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나는 끝없는 수감 생활에서 그와 비슷한 다른 것들도 끊임없이 겪었다

나의 첫 번째 접촉면회는 그렇게 긴장 상태로 끝났다. 어머니가 손을 내 다리 위에 얹었을 때 많은 기억이 머릿속에 밀려들었다. 나는 어린아이가 되었다. 울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참았다. 어머니와 동생들이 떠날 시간이 가까워지면서 내 가슴속엔 그들과 함께 가고 싶다는 간절한 열망이 일었다. 모두가 나를 껴안았고 나는 어쩔 줄을 몰랐다.

나는 칸막이를 통해 어머니에게 키스를 하고 누구와도 손바닥을 마주쳤었지만, 15년 만에 처음인 포옹은 내게 전혀 달랐다. (나중에 킹도 나와 똑같은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느낌이 전혀 달랐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나는 포옹할 줄도 몰랐다. 너무 슬펐다. 내가 너무 많은 것을 잃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진실로 접촉면회를 즐기기까지 몇 달이 걸렸다.

우리는 누군 경찰관한테 제지당하고 체포되고 수색을 당하고 고발되고 기소되고 누군 그렇지 않은지를 결정하는 미국 사법체계의 인종차별주의를 인정하고 맞서고 변화시키고, 공정하고 공평한 체계를 요구해야 한다.

현재 경찰부서와 법정의 인종차별주의는 비밀이 아니다. 그것은 얼마든지 입증된다. 사법적 과정의 모든 수준에서 인종차별이 벌어진다.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2018년 맨해튼의 흑인은 마리화나 소지와 같은 가벼운 혐의로 체포될 가능성이 백인보다 15배 더 높았다. 

2012년 5월 13일 뉴올리언스 <타임스-피카윤>은 루이지애나가 “세계의 교도소 수도”로서 미국의 다른 어느 주보다 1인당 더 많은 주민을 감금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기자 신디 창은 “미국에서 첫째라는 것은 세계에서 첫째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루이지애나의 감금 비율은 이란의 거의 5배이고, 중국의 13배, 독일의 20배에 달한다.” 그녀는 당시 한 기사에서 루이지애나 성인 86명 중 1명이 감금 중이며, 이는 미국 평균의 2배에 가깝다고 썼다. 뉴올리언스의 경우 흑인 남자는 14명 가운데 1명꼴로 철창에 갇혀 있었다. 그녀는 루이지애나의 가혹한 판결 법에 대해 이렇게 썼다. “루이지애나에서 자동차 절도로 2번 기소되면 가석방 없이 24년형까지 선고받을 수 있다. 마약으로 3번 유죄선고를 받으면 앙골라의 루이지애나 주립교도소에서 나머지 생을 보내야 할 수 있다.” 

… 이 남자를 세심하게 관찰한 다음, 나는 무려 27년 동안 독방에 갇혀 살아온 한 사람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또한 이곳 앙골라에서 삶을 마감해야만 하는 사람을. 그러나 나는 그의 어느 것에서도 증오를 볼 수 없었다. 두려움 또한 찾아볼 수 없었다. 단지 더 나은 인간이 되고자 하는 한 사람을 보았을 뿐이다.

그는 지혜가 결코 마르지 않을 것 같은 한 인간, 앎의 추구가 신념으로 굳어버린 한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우드폭스 씨의 모든 것을 보며, 나는 더 나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나 자신을 보았다. 우드폭스 씨를 통해서, 나는 앎을 추구하지 않는 사람은 성인이 되지 않으려는 소년과 다름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나는 바로 앎이 때로는 삶에서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이루는 열쇠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최승우 기자 kantmani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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