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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문이 늘 그렇게 대단했나…도전하는 질문을 던지다
한문이 늘 그렇게 대단했나…도전하는 질문을 던지다
  • 장지연
  • 승인 2023.08.23 07: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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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말하다_『한문이 말하지 못한 한국사』 장지연 지음 | 푸른역사 | 188쪽

‘한글·한문·범어·일본어·영어’가 뒤섞인 복잡한 역사
질문에 더해 친족의식 변화 등 새 연구분야도 타진

발상의 시작은 대단하지 않았다. 박사논문을 쓰며 불현듯 가지게 된 감이 있었다. 뭔가 당대에 사료 이상으로 떠돈 이야기가 있었거나, 향찰이나 이두 같은 차자(借字) 표기법으로 남겨져서 실체를 알 수 없는 흔적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이 생각을 다시 꺼내놓게 된 것은 『한국사, 한 걸음 더』(한국역사연구회 지음, 푸른역사, 2018)의 기획에 참여하면서였다. 한국사 연구 현장의 최전선을 보여주자는 기획이 이런 의문을 털어놓기에 꼭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사는 어떤 언어 체계 속에서 구성되는가?」라는 장에서는 만주어 사료에 대한 학자들의 감수성이 신청사(新淸史)라는 새로운 연구를 개척했다면 다양한 문자 체계를 활용했던 한국사의 연구도 역시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정도의 제언이었다.

그러다 한국사의 새로운 지평을 보여주는 문고를 만들자는 기획이 탄생하며, 이 제언을 좀 더 부연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요청이 있었다. 이때부터 고민은 깊어졌다. 자기 주제만 가지고 글쓰기 하는 관행에 익숙한 터에 어떻게 무엇을 써야 할지 몹시 고민스러웠다. 고민 끝에 이 책에서는 완결된 결론보다 문제를 더 드러내고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자고 마음을 먹었다. 질문으로 끝나는 마지막 장은 이러한 고민의 결과이다.

이 책은 한국사의 거의 전 시기를 다룬다. 일단 문자에 남지 않은 역사적 실재가 있거나 다른 문자의 기록에서 다른 역사적 모습이 보이는 사례를 제시하며, 고려와 조선을 중심으로 우리 문자 생활의 흐름을 훑었다. 우리는 한자를 빌어서 우리말을 표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러한 빌려 쓰는 방법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한계에 봉착한 그때 훈민정음이라는 새로운 문자를 창제해서 한문과 섞어 쓰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자를 빌려 쓰는 방식은 여전히 우리 문자 생활의 일부를 차지했다. 그 이후에도 우리는 한글과 한문, 일본어문을 거쳐 현재 영어문까지 이르는 길고 복잡한 섞어쓰기의 역사를 갖게 되었다. 여기에 불교의 문자인 범자 역시 간과해선 안 된다.

흐름의 설명만이 아니라 도전적인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 한문이 늘 그렇게 대단했을까? 향찰이나 이두가 구성한 세계는 어떠했을지 상상해 보았는가? 왜 한문 자료만 가지고 세계관을 논하는가? 훈민정음을 너무 현재적 관점에서만 보고 있지 않은가? 이것이 불러온 여러 가지 현상을 한글 대 한문, 여성 대 남성, 피지배계층 대 지배계층 식의 이항대립으로만 보고 있지 않은가?

질문에 더해 새로운 연구 분야도 타진하고 싶었다. 지식의 확산, 욕구의 변천사, 감정의 역사, 친족 의식과 애착의 변화, 젠더의 구성과 여성의 행위주체성 같은 주제가 이 책에서 다룬 내용이다. 이를 통해 연구자들이 자기 분과나 주제에 갇히지 않고 새로운 연구의 영감을 얻고 보편적으로 통할 수 있는 질문을 던지는 방식을 고민해 보는 계기를 가졌으면 했다. 

글쓰기에서도 여러 가지 도전을 시도했다. 개인사나 구어를 많이 섞은 점이 대표적이다. 이는 대중이 학자 ‘나부랭이’의 답답한 글쓰기에 막히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었다. 이 책에서 다루는 많은 에피소드에서 사람마다 반응하는 부분은 제각기 다르다.

그럼에도 모두가 얻어 갔으면 하는 한 가지는 과거의 사람들이 이상한 게 아니라 현재의 우리가 ‘W.E.I.R.D(Western/Educated/Industrialized/Rich/Democratic)’한 사람이란 깨달음이다. 이 깨달음은 현재를 당연시하지 않도록 해주는 통찰력을 일깨워 줄 것이다. ‘역사적 상상력’이란 바로 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닐까? 시대의 앞날이 오리무중인 요즘이야말로 이러한 통찰력이 절실하다.

향후에는 이 책에서 제시한 여러 문제 의식을 소화한 연구를 진행하고 싶다. 원래의 주전공인 공간과 사상에 대한 연구에서는 문자화되지 못한 실재에 신경 쓰고, 여러 문자로 기록한 글을 읽을 때에는 더욱 주의를 기울이게 될 것이다. 이와 더불어 전근대 젠더의 구조, 그에 따른 현상과 행위자의 주체성을 풀어내는 데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 책도 5년 전에는 전혀 예정에 없었던 것이다. 이후에도 새로운 인연과 깨달음이 나의 연구를 인도할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언제나 중요한 건 열려 있는 마음과 시야가 아닐까.

 

 

 

장지연 
대전대 교수〮역사문화학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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