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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전면허증은 있는데, ‘정치자격증’은 왜 없을까
운전면허증은 있는데, ‘정치자격증’은 왜 없을까
  • 홍성민
  • 승인 2023.08.03 11: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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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말하다_『정치를 바라보는 3가지 관점』 홍성민 지음 | 인간사랑 | 205쪽

정치학 사라지고 예언학만 난무하는 한국사회
정치철학 탄탄해야 제대로 된 국가정책이 수립

대선을 앞두고 종편 방송에 출현한 일이 있었다. 제법 깊이 있는 정치논평을 하고 난 말미에 사회자가 “이번 대선에서는 어느 후보가 당선될까요?”라고 질문을 한다. 나는 대답을 못했다. 왜냐하면 정치학자는 점쟁이가 아니니까. 그때 나는 그 사회자가 정치학 공부를 하지 않아서 미숙한 질문을 던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 TV토론을 보면 상황이 더 심각해져 간다. “북한이 언제 미사일을 발사할까요?”라는 질문에 토론자들은 저마다 자신의 예상치를 당당히 말한다. “다음 주 목요일에 발사한다고 확신합니다.” 그리고 2주 후에 다시 출연해 적중했던 자신의 예견을 근거로 학자의 능력을 인정받으며 의기양양해 한다. 이제 한국 사회에서 정치학은 사라지고 예언학만이 난무한다. 

하나 더 있다. 나는 30대 후반에 교수가 되어서 학회의 논문심사를 열심히 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10여년 전부터는 논문심사를 거절한다. 왜냐하면 논문들이 “안봐도 비디오”이기 때문이다. 거의 비슷한 수준의 내용과 쟁점이 지난 20여 년 동안 반복된다. 정치철학이 다루는 범위가 너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사회학이나 인문학과 접목시키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면 오히려 불리하다. 

매우 조심스러운 평가이지만, 미국 유학에 편중된 우리 현실이 이러한 문제를 더욱 가중시킨다. 사실 내가 프랑스에서 푸코와 부르디외로 박사를 받고 귀국해 취직할 무렵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왜 정치학자가 역사학자인 푸코나 사회학자인 부르디외로 박사논문을 썼어요?” “이 논문은 정치학 논문이 아닌 거 같아요.” 따위들이다. 푸코가 역사학자이고, 부르디외가 사회학자라고? 프랑스에서는 그렇게 분류하지 않는다. 상상력은 고갈되고 학문적 유연성은 엿바꿔 먹은 지 오래다. 이왕 내 친 김에 한마디 더 하자. 내가 정년 퇴직하고 나면 대한민국의 정치학자 중에 루소나 푸코의 텍스트를 프랑스어로 읽을 수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되나? 소수학문(?)을 보호하는 학술정책이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하다. 

더구나 글쓰기는 심각한 수준이다. 번역투의 문장들은 정말 참기가 어렵다. 고등학교 때 문장연습은 전혀 하지 않았나? 한국학계에서 정치(철학)가 왜소화되고 대중들로부터 외면당하는 가장 큰 원인은 학자들 자신에게 있다(물론 나도 포함해서). 재미도 없고, 현장에 대한 문제의식도 없고, 그냥 텍스트 안에 묶여 지루한 ‘주석달기’만을 반복할 따름이다.

이 책은 예언학으로 격하된 정치학을, 미국중심의 정치학을, 텍스트에 매몰된 정치학을, 바로 세워 보겠다는 야심찬 기획으로 시작됐다. 본래는 유튜브 방송(‘홍알정’: 홍성민 교수의 알기쉬운 정치철학 이야기)을 먼저 했다. 2021년 10월부터 시작된 방송은 현재 200회를 넘겼다. 이번에 출판된 책은 1회부터 40회까지의 분량에 해당한다. 유튜브 방송은 300회를 넘어 400회로 치달을 것이다. 책은 각 주제별로 40회 정도로 분류해서 한 권씩 출판할 것이다. 현재로서는 17권을 출판할 계획이다. 그렇다고 유튜브 방송과 책의 내용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역시 ‘말하기’와 ‘글쓰기’는 다르다. 고대, 중세, 근대의 시대 분류를 하고 아리스토텔레스(덕의 정치), 레비나스(사랑의 정치), 마키아벨리(힘의 정치)라는 세 명의 사상가를 집중적으로 다뤘고, 거기에서 파생된 이론가들을 추가했다. 특히 공자, 묵자, 한비자를 보충하여 서양과 동양의 사상을 비교했다.

이 책을 통해 정치학에 입문하려는 사람에게 기초 문법을 제공하고자 했다. 단어만 나열한다고 영어회화가 되지 않는 것처럼, 정치에 대해 농담만을 나열한다고 정치평론이 되지 않는다. 자연과학의 기초가 단단해야 반도체 산업이 번창할 수 있는 것처럼, 정치철학의 토대가 탄탄해야 제대로 된 국가정책이 수립할 수 있는 것이다. 

머리카락을 만지는 사람도, 운전을 하는 사람도, 공무원을 하는 사람도 모두 자격증을 취득해야만 하는 사회에 살면서, 유독 정치를 하는 사람들은 아무런 자격증이 없다. 의사를 하던 사람이, 검사를 하던 사람이, 정치를 하겠다고 나서면 말릴 수는 없겠지만, 책이라도 한 권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그래서 이 책을 쓰게 된 것이다. 지금이라도 대통령실에 한 권 보내 볼까? 너무 야무진 꿈인가? 

 

 

홍성민
동아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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