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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술 읽는 고전에서 깊이 읽는 고전으로, “캐릭터의 내면 전달하기 위해 표현 고스란히 옮겼다”
술술 읽는 고전에서 깊이 읽는 고전으로, “캐릭터의 내면 전달하기 위해 표현 고스란히 옮겼다”
  • 최익현
  • 승인 2023.07.25 09: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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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년 만에 『일리아스』 새 번역 시도한 이준석 방송대 교수(고전그리스문학)

왜곡 없이 옮기고 싶다는 소망은 모든 번역가의 꿈이다. 
고전 번역 역시 예외가 될 수 없다. 
나는 직역과 의역의 이분법을 해소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모든 요소 하나하나를 똑바로(直) 일으키지 못하는데, 
무슨 수로 뜻(意)을 전달할 수 있겠냐는 것이 내 입장이다. 

41년 만에 『일리아스』 새 번역 시도한 이준석 방송대 교수(고전그리스문학)

서울대 미학과와 대학원 서양고전협동과정을 마치고 스위스 바젤대에서 호메로스 서사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준석 방송대 교수(고전그리스문학·사진)는 고전 연구자인 자신을 가리켜 ‘종자(種子) 보존업자’라고 말한다.

고전(古典)의 속성을 농사와 연관 짓는 그는 자기 대에서 이 명맥이 절대 끊어져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품고 있다. 그런 그가 최근 『일리아스』(아카넷)를 그의 문체로 번역해 화제다. 고 천병희 단국대 교수가 『일리아스』의 문을 연지 41년 만이다. 

이 교수가 박사학위를 받은 스위스 바젤대는 호메로스 연구의 세계적 명문으로 꼽히는 곳이다. 박사학위 취득 이후 그는 「호메로스의 휴머니티: 『오뒷세이아』의 구혼자 살육을 중심으로」(2016), 「오이디푸스의 언어: 중의와 반의」(2017), 「분노의 서사시, 연민의 서사시 『일리아스』」(2018), 「호메로스 서사시의 구조 연구」(2019), 「아레스를 닮은 메넬라오스: 『일리아스』의 내적 포물라 연구」(2020), 「호메로스 문헌학의 위기」(2020) 등의 논문을 집중적으로 발표했다. 그가 얼마나 호메로스와 『일리아스』에 깊이 매료돼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준석 교수의 『일리아스』 번역으로 이제 한국 인문학계는 ‘천병희본’과 ‘이준석본’ 『일리아스』를 교차하며 넘나들 수 있게 됐다. 이 교수의 『일리아스』에 추천사를 쓴 이태수 서울대 명예교수는 “천병희의 번역은 가독성을 큰 장점으로 가지고 있다. 호메로스를 꼼꼼하게 연구해온 학자 이준석의 번역은 좀더 정확하게 호메로스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라고 평가했다. 

술술 읽던 데서 저자의 최초 표현의 심층까지 짚어가며 읽는 데로 고전읽기가 한 단계 올라서야 한다면, 이준석본의 의미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교수는 “호메로스가 그리는 캐릭터의 내면을 전달하기 위해 그의 표현을 고스란히 옮기고자 했다”라고 말했다. 그는 천병희 교수가 앞서 길을 내줬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 교수의 작업은 고전문학(문헌)의 의미에 대한 현재적 성찰인 동시에, 도대체 학자가 어떤 일에 몰두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그는 “평가의 관건이 정량이다 보니 장기간의 연구가 녹아든 번역이나 단행본보다는 학회지 논문을 차곡차곡 ‘생산’하고 ‘탑재’해서 승진도 하고 연구비도 확보하는 게 교수들의 일상이다”라고 논문생산주의에 매몰된 학문 사회에 숨막혀 하고 있다. 그런 여건에서 호메로스 번역 작업은 트로이아의 벌판 위를 달리는, ‘천사의 품에 안긴 것처럼’(릴케, 『두이노의 비가』) 황홀한 일이었다는 그의 고백은 두고두고 음미할만하다. 

△ 선생님께서는 이 책,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에서 ‘압도적 아름다움’을 발견했다고 말씀하셨다. 이 작품의 아름다움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또한, 이 작품이 현재성을 가질 수 있다면, 어떤 점에서 그런지 궁금하다.
“『일리아스』는 아킬레우스의 진노로 시작해서 헥토르의 장례로 끝나는, 단 며칠간의 이야기를 다룬 서사시다. 구전 영웅 서사시와는 달리, 호메로스는 아킬레우스의 초인적인 무력에 방점을 두지 않는다. 대신 아킬레우스의 진노와 연민이라는 정서의 궤적을 따라 이야기를 풀어가고, 그 틀 안에서 불가역의 상실을 겪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또, 이를 받아들이는 과정을 운명이나 신의 명령 등으로 풀었다면 뻔한 이야기가 됐을 텐데, 아킬레우스는 이런 것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의 영웅적인 기백을 충족시키는 결정을 행동으로 옮기면서 삶을 지탱하고 이끌어가는 힘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다른 희랍신화에서는 아킬레우스에게 초자연적인 속성을 부여하는 경우가 많다. 스튁스 강물에 몸을 담가 무적의 몸이 됐다거나, 죽어 하데스(저승)에 가지 않고 낙원으로 옮겨졌다거나 하는 일화들이 그렇다. 그러나 호메로스가 그리는 아킬레우스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 조건을 나눠 가진 한 명의 인간이고, 그 정서도 우리가 충분히 공감할 수 있다. 여기서 비롯된 이 작품의 현재성은 단 한 번도 멈춘 적이 없다.”

△ 844쪽 분량으로, 200자 원고지 3천400매에 이르는 작업이다. 희랍어 원전 번역이어서 더더욱 이삼중의 어려움을 겪으셨을 듯하다. 번역에 소요된 시간이 7년여라고 들었다. 
“실제로 번역에 쏟은 시간은 만 2년 반이다. 다만 애초에 계약했던 출판사와 의견 조율이 잘되지 않아 4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고, 새롭게 계약을 맺은 아카넷과 다시 작업을 진행해 이번에 책이 나오게 됐다. 그 사이에 『오뒷세이아』도 번역할 수 있었으니 아주 허송세월한 건 아니었다.

완전한 몰입 속에서 이뤄지는 작업이었고 하루에 7~8시간 정도 번역만 했다. 나머지 시간에도 늘 내 마음은 트로이아의 벌판 위에 있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내가 좋아서 빠져든 일인데 힘든 일이 뭐가 있었겠나.

다만 그러다가 남편, 아빠, 아들 노릇을 소홀히 했으니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한 건 맞다. 나야 호메로스와 보낸 시간이, 릴케의 표현을 빌자면 천사의 품에 안긴 것처럼(『두이노의 비가』 1) 황홀했지만, 정상이라고는 볼 수 없고 좋게 말해도 좀 돈 사람인 나를 감당해야 했던 가까운 사람들은 힘들었을 것이다.”   

△ 사실 기존의 번역본을 넘어 새로운 번역본을 내놓다는 것 자체가 ‘과감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자기만의 고유한 고전 번역 문법 지평이 확보돼야 가능한 일이다. 이번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 번역의 기준이랄까, 선생님께서 중시하는 고전 번역의 원칙은 무엇인지 궁금하다.
“왜곡 없이 옮기고 싶다는 소망은 모든 번역가의 꿈이다. 고전 번역 역시 예외가 될 수 없다. 나는 직역과 의역의 이분법을 해소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모든 요소 하나하나를 똑바로(直) 일으키지 못하는데, 무슨 수로 뜻(意)을 전달할 수 있겠냐는 것이 내 입장이다.”

"쉽고 빠르게 일별할 수 있는 번역본도 있어야겠고, 자주 멈춰가며 음미해보는 번역본도 있어야 할 것이다."

△ 희랍 고전 『일리아스』는 1982년 천병희의 번역으로 그간 폭넓게 읽혀왔다. 번역자 자신이 네 차례 개정판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번역본을 낸다는 것은 기존 번역본을 넘어서는 고전의 현재적 의미망을 담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선생님께서 생각하는 기존 번역본의 미덕도 있을 것 같은데.
“내가 무슨 수로 그분의 위업을 평가할 수 있겠나. 그 번역을 둘러싼 가혹했던 환경이나 먼저 짚어보자. 국가는 청년 천병희를 간첩으로 몰아 징역 10년, 자격정지 10년이라는 형벌을 안겼다. 하지만 선생님은 다시 일어나셨고, 엄청난 고전 번역을 우리에게 선물로 남기고 가셨다.

그전에는 그런 원전 번역 자체가 없었으니 천 선생님은 크레바스 위에 다리를 놓으신 분이고, 맨손으로 터널을 뚫으신 분이다. 그 길은 선생님이 삶의 길을 내신 궤적과 일치한다. 덕분에 우리도 고전으로 가는 통로를 얻었다.

물론, 엄밀한 고전문헌학의 시선으로 해부해보면 이런저런 아쉬운 세부가 드러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을 단점으로 치부해버리는 순간, 우리는 우리 고전번역사의 맥락을 잊는 어리석음에 빠지게 된다. 선생님께서 번역을 내놓으셨을 때는 『일리아스』라는 희랍어 제목조차 낯설었을 것이다.

선생님은 독자들이 어떻게든 쉽게 읽을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셨던 것 같다. 그래서 적극적으로 텍스트를 교정하셨고, 그 덕에 우리는 위화감 없고 편한 『일리아스』를 읽을 수 있었다.” 

△ ‘이준석본’ 『일리아스』는 ‘천병희본’ 『일리아스』와 거의 모든 문장에서 표현을 달리했다. 천병희본과 다른 ‘이준석본’의 특징은 무엇인가? 
“2권 1-5행을 보자. 테티스의 간청에 고심하는 제우스가 잠 못 이루며 좋은 방책을 궁리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이게 그냥 궁리가 아니다. 원문에는 헤아림(phren)을 다해, 심정(thymos)을 다해 어느 쪽이 좋을지 저울질(mermerizein)하는 제우스의 내면이 자세히 그려진다.

또, 여러 조각말(particle)들이 잠든 다른 이들과 깨어 있는 제우스를 대비하는 작지만 중요한 노릇을 해준다. 처음에는 이런 것들이 몹시 낯설 것이다. 천병희 선생님은 이런 낯섦을 경계해 ‘마음속으로 궁리’,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정도로 쉽게 옮기셨고, 조각말은 아주 연하게 옮기셨다.

나는 호메로스가 쓴 표현을 고스란히 옮기려 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호메로스가 그리는 캐릭터의 내면을 전달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런 시도가 가능한 것은, 다시 말하지만 천병희 선생님이 미리 길을 내주신 덕분이다.”

△ 고전 번역은 품이 많이 들 수밖에 없는 작업이다. 현실적으로 이에 대한 ‘업적 평가’도 들인 품에 비하면 너무 작다. 그러나 한 편의 고전을 두고 다양한 번역본이 경쟁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고전 번역에서 다양한 번역본이 나올 수 없는 한국 학계나 출판계의 한계도 있지 않겠나?
“경쟁은 좀 심한 말이고, 독서의 목적에 따라 여러 판본이 나와 서로를 보완해주는 건 좋다고 본다. 나도 천병희 선생님의 번역을 대체하거나 경쟁하려는 생각은 전혀 없다. 쉽고 빠르게 일별할 수 있는 번역본도 있어야겠고, 자주 멈춰가며 음미해보는 번역본도 있어야 할 것이다. 플라톤 번역에서 천 선생님과 정암학당의 책이 지금 각자 그런 역할을 해주고 있다. 좋은 연구자가 자기 분야의 번역에 몰두할 수 있다면 못할 것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평가의 관건이 정량이다 보니 장기간의 연구가 녹아든 번역이나 단행본보다는 학회지 논문을 차곡차곡 ‘생산’하고 ‘탑재’해서 승진도 하고 연구비도 확보하는 게 교수의 일상이다. 그러면 뭔가 초심에서 벗어난 자신에 대해 자괴감도 들만 한데, 너도 나도 그걸 ‘업적’이라고 부르며 닐스 보어나 막스 플랑크라도 된 듯이 스스로 위안 삼는다.

내 결과물을 차마 업적이라고는 불러본 적도 없고, 평가에도 연연하지 않는다. 가뜩이나 비루하고 못난 내가 그런 데로 말려 들어가는 순간 끝이라는 생각은 늘 하고 있다.”

△ 곧 『오뒷세이아』도 출간한다고 했다. 호메로스 전공자로서 당연한 작업일테지만, 그렇더라도 희랍 고전문학에 대한 깊은 애정이 없다면 어려운 일로 보인다. 희랍 고전문학을 오늘의 우리가 읽어야한다면 어떤 이유에서일까? 또, 이들 작품을 읽어갈 때 특히 유의해야 할 게 있다면?
“반드시 읽어야 하는 책은 없다, 그게 아무리 대단한 일리아스라 할지라도. 우리는 ‘모 대학 선정 필독도서 100선’ 같은 문구에 너무 익숙해져 버려서 의무감이나 체면 때문에 희랍 고전을 읽기도 하지만, 그런 독서가 재미있을 리가 있겠나.

게다가, 다들 눈앞의 생계에 녹초가 되어 있는데, 무슨 책을 꼭 읽으라고 한다면 그건 너무 심한 일이다. 조금만 기다려보자. 호메로스의 속삭임으로 끌려 들어가는 순간이 올 것이고, 그때 먼지를 털고 이 작품을 읽으면 그만이다. 여러 번 반복해서 읽고 나면, 그런 속삭임이 더 자주 들릴 것이다.”

최익현 편집기획위원 editor@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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