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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51] “난 죽지 않았어” 노동자 인권을 노래하다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51] “난 죽지 않았어” 노동자 인권을 노래하다
  • 조준태
  • 승인 2023.07.31 08: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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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법을 부정하는 발언들이 횡행하고 있다. 주 120시간 노동을 허용해야 한다거나 중소기업 주 52시간제 적용을 연기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약과다. 파업 때 대체노동을 허용하고, 사업장 점거 금지를 주장하며 최저임금제와 법정 근로시간제까지 부정할 태세다. 

판검사나 학자들 상당수가 노동법을 부정하고 19세기식 민법의 계약자유를 아무 때나 들이대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며 오랜 세월 법조계와 학계의 통폐로 지적돼왔다. 그나마 지금까지는 판결이나 논문에 숨어 있었는데 21세기에 와서 이런 주장들이 선거판에까지 노골적으로 등장하는 꼴을 보면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공정한 경쟁이란 미명으로 부활하는 19세기 수준의 계약 만능주의 밑바닥에는 노동자와 노동운동을 혐오하는, 신자유주의보다 더 저질인 노동 부정의 구자유주의가 깔려 있다.

1915년, 노동자 인권을 주장한 36살의 가수 조 힐이 아무런 증거도 없이 살인자로 몰려 사형당했다. 이 사건은 1920년의 사코·반제티 사건과 함께 소위 사법살인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기에서나 저기에서나 생존을 위협당하는 노동자들은 저임금, 장시간 노동, 위험한 작업환경에 항의하고 그것이 무참히 거부되면 어쩔 수 없이 파업을 벌여야 하지만 결과는 항상 비참하기 마련이었다. 

 

조 힐의 모습. 사진=위키피디아

“조금만 참으면 배부르게 되리라”

그 처참한 동료들의 삶을 노래한 조 힐은 당시 주류 노동조합인 백인·숙련공·남성 노동자 중심의 미국노동총동맹(AFL)과 달리 ‘주변’ 노동자들의 조직으로, 비틀거린다는 뜻인 ‘워블리스(Wobblies)’로 불린 세계산업노동자연맹(IWW)의 조직책이었다. 그의 노래 「설교가와 노예(The Preacher and the Slave)」를 보자. 

고상하신 설교가가 매일 저녁에 옵니다
옳은 것과 그른 것을 가르치려고
그러나 먹을 것에 대해 물어보면 
아주 달콤한 목소리로 대답합니다

조금만 참으면 배부르게 되리라
하늘 위 영광스러운 나라에서
열심히 기도하며 건초를 먹을지라도 
죽어 천국에서는 파이를 먹을지니

1879년 스웨덴에서 태어난 조 힐은 철도노동자인 아버지가 산업재해로 죽자 아홉 살의 나이로 노동을 시작했다. 1900년에 결핵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긴 뒤, 1902년 23살 때 미국에 갔다. 뉴욕 등에서 철도와 상점, 농장과 공장의 떠돌이 노동자로, 심지어 노숙자로 8년을 보내면서 노동조합을 조직했다가 해고를 당하고 블랙리스트에 오르기도 했다. 

1910년에 워블리스에 가입해 자신의 노동 경험이 담겨 있고, 노동운동을 지지하는 노래를 불렀다. 1911년에는 포르피리오 디아스의 멕시코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민중군에 참가해 노동계급의 해방을 위해 싸웠다.

 

사법살인으로 이어진 솔트레이크 살인사건

산페드로 부두 노동자들의 파업에 참가한 힐은 1913년 6월에 부랑자 혐의로 체포돼 30일 동안 구금을 당하기도 했다. 1914년 1월 초, 그가 일하던 솔트레이크에서 살인사건이 터졌다. 마침 힐이 어느 여성과의 말다툼 끝에 그 남편에게 총상을 입어 병원을 방문해 경찰이 조사했다.

두 목격자의 불확실한 증언과 힐의 불확실한 알리바이로 인해 지역 배심원단은 힐을 유죄라 판단했다. 하지만 두 증인 모두 힐을 결정적으로 식별할 수 없었고 살인에 사용된 총은 회수되지 않았으며, 같은 날 총상을 입은 사람은 4명이나 더 있었다.

힐의 무죄를 주장하는 캠페인은 재판 2개월 전에 시작돼 1915년 11월 19일 힐이 총살형으로 처형될 때까지 계속됐다. 워블리스의 동료인 헬렌 켈러나 옘마 골드만을 비롯해 미국노동총동맹의 위원장인 새뮤얼 곰퍼스, 우드로 윌슨 등 수많은 지지자가 1만 통 이상의 항의 편지를 보냈으나 유타 법원은 재심을 거부했다. 

힐이 작곡한 「저항소녀(The Rebel Girl)」의 앨범 커버. 사진=위키피디아

힐은 기관총으로 무장한 자들이 출입문을 지키는 가운데 총살형 집행대에서 사형당했다. 그의 시신은 시카고로 보내져 수천 명의 애도자가 그의 노래 「저항소녀(The Rebel Girl)」를 부르는 가운데 화장됐다. 이 노래는 매사추세츠주 로렌스에 있는 직물공장 여성 노동자들의 파업을 이끈 워블리스의 조합원 걸리 플린을 모델로 쓴 것이었다. 

수많은 모습의 여성이 있지
이 어지러운 세상에, 모두가 알 듯
누군가는 아름다운 저택에서 살고
최고급 옷을 입지
금수저 여왕과 공주도 있지
다이아와 진주로 화려하지
그러나 한 사람 참된 소녀는
저항소녀지

그래, 그녀의 손은 노동으로 굳어졌지
그녀의 옷은 멋지지 않지
그러나 가슴 속 심장은 요동치지
자신의 계급과 동료에게 진실하지
그녀가 분노와 저항을 던질 때
공포에 질린 사기꾼들은 떨고 있지
왜냐하면 한 사람 참된 소녀는
저항소녀이기 때문이지

(후렴)
그게 저항소녀, 저항소녀야!
그녀는 노동계급의 소중한 진주지
용기, 자부심, 즐거움을 가져다주지
싸우는 저항소년에게 그녀는
용기와 자부심, 즐거움을 가져다주지
과거에도 있었지만 지금은 더 많아야 해

 

“애도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싸워라”

힐이 부랑 혐의로 구금되기 1년 전인 1912년에는 세계산업노동자연맹의 조합원 수가 10만 명을 넘었으나 힐의 재판 이후 엄청난 탄압을 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사회단체로서는 거의 유일하게 반전운동을 벌여 수많은 지도자가 처형당했고 조합원 수도 1만 명 정도로 크게 줄어들었다. 노엄 촘스키가 “미국 문화와 자유, 그리고 정의를 위한 변치 않는 투쟁에 독특하고 주목할만한 이바지를 했고 미래에도 그럴 것”이라고 말한 워블리스는 지금도 조 힐의 노래로 살아 있다.

"유언을 쓰는 것이 쉽다. 나눌 것이 없으니."로 시작하는 시로 쓰여진 힐의 유언장. 사진=위키피디아

존 더스패서스가 소설 『1919』의 한 장에 조 힐의 전기를 쓴 뒤로 그에 대한 많은 문학작품, 평전, 영화, 연극, 노래가 만들어졌다. 그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1930년 앨프리드 헤이스가 시를 쓰고 1936년 얼 로빈슨이 곡을 붙인 노래 「조 힐」이다. 1940년에 민중가수 피트 시거가 노래했고 1960년대 말에 다시 존 바에즈, 이어 브루스 스프링스틴 등이 노래했다.

간밤에 조 힐을 보았어
그대와 나처럼 살아 있었어
“당신은 십년 전에 죽었잖아”라고 했더니
“난 죽지 않았어”라고 했어
“난 죽지 않았어”라고 했어

“솔트레이크에서 (누명으로)”라고 나는 말했지
내 침대 곁에 선 그에게
“그들이 당신에게 살인 누명을 씌웠지” 했더니
“그러나 난 죽지 않았어”라고 했어(중략)

삶만큼 거대한 그곳에서 서서
눈으로 웃으며 조가 말했어
“그들이 까먹고 죽이지 못한 건
계속 조직하는 거야
계속 조직하는 거야”(후략)

이 노래를 다시 들은 간밤에 나는 전태일을 보았다. 그도 말했다. “난 죽지 않았어.” 조 힐은 유언으로 애도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싸우라고 했다. 태일은 자신이 분신한 1970년 이전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고 했다. 지난 반세기를 허송세월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외쳤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했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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