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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50] 국가주의 교육에 반대한 자유학교의 실험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50] 국가주의 교육에 반대한 자유학교의 실험
  • 조준태
  • 승인 2023.07.24 06: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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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도 외국의 자유학교가 종종 소개되지만 미국의 자유학교, 그중에서도 페름 부부가 운영한 스텔튼 학교에 대해서는 그다지 언급이 없다. 20세기 초, 페름 부부는 스텔튼 학교를 포함해 여러 자유학교와 현대학교를 운영했다. 뉴저지주의 스텔튼 학교에 교장으로 취임하기 전, 그들은 뉴욕에 학교를 세웠다. 그곳에서 그들은 러시아 출신의 옘마 골드만을 비롯해 여러 아나키스트를 만났다. 그들은 1910년에 세워진 페러 협회의 회원들이었다. 

아나키스트들은 국가에 대한 시민의 복종을 지속하기 위해 이용되는 국가주의 교육과 기업에 순응하는 노동자를 생산하는 공장으로 학교를 바꾸려는 기업에 비판적이었다. 산업 이익에 기여하는 국가주의 교육에 대한 비판은 1909년 옘마 골드만이 간행하는 〈마더 어스〉에 실린 프란시스코 페러의 글을 시작으로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전개됐다.

이 글에서 페러는 학교 제도를 통제하는 것이 정치권력의 주된 원천이라고 비판한다. 과거에 정부는 국민을 무지 상태에 방치함으로써 그들을 통제할 수 있었으나, 국가 간 산업 경쟁으로 인해 그것이 더 이상 불가능하게 되자 시민을 노예화하기 위해 국가와 산업이 학교를 이용한다는 주장이었다. 페러는 노예화에 대항하기 위해 1901년 바르셀로나에 최초의 ‘현대학교’를 세웠다. 

프란시스코 페러의 모습. 사진=위키피디아

초등 교육과 성인 교육, 출판사를 통합한 현대학교는 번창했지만 1906년 알폰소 13세 왕을 그의 결혼식 날에 암살하려는 음모에 페러가 연루되면서 스페인 당국에 의해 폐쇄됐다. 1909년 7월 26일, 바르셀로나의 노동자들은 항의 시위를 시작했는데, 이 시위는 ‘비극적 주간’으로 알려지게 된 폭동과 반란으로 급속히 발전했다. 바르셀로나 비극 주간의 사건과 시위로 페러는 체포됐고 후에 사건의 지도자 중 한 명으로 처형됐다. 페러의 처형으로 국제적인 항의가 시작됐고, 전 세계적으로 페러를 기리기 위해 현대학교를 열려는 운동이 이어졌다.

 

시민의 노예화 막고자 설립된 최초의 ‘현대학교’

페러의 글에 감명받은 아나키스트와 사회주의자들이 1910년 뉴욕에서 만났다. 옘마 골드만, 알렉산더 버크만, 레너드 애벗, 해리 켈리 등에 의해 프란시스코 페러 협회가 결성됐다. 1911년 1월 그리니치빌리지의 세인트 마크 플레이스에 현대학교가 문을 열었다. 뉴욕의 현대학교는 스페인의 현대학교와 마찬가지로 출판사, 성인 교육 센터, 교육 목표 외에도 커뮤니티 센터 역할을 했다. 그리니치빌리지 시설의 제재로 인해 건물은 곧 이스트 12번가의 새 건물로 이전됐다. 학교는 마거릿 생어의 아들을 포함해 학생 9명으로 시작했다. 한국에도 일찍이 『철학이야기』, 『문명이야기』 등의 저자로 잘 알려진 윌 듀랜트는 1912년 초에 교장이 됐다.

1915년까지 뉴욕시 곳곳에 자유학교가 세워져 아동과 성인 모두를 위한 국제어, 예술, 성위생학, 생리학 강좌가 개설됐다. 학교는 빠르게 뉴욕시의 좌파 정치와 노동 운동의 중심지가 됐다. 특히 성인반이 인기가 높았다. 현실주의 화파인 애시캔파의 설립자 로버트 헨리와 조지 벨로스가 그곳에서 교사로 가르쳤고 화가 맨 레이는 초창기 학생이었다. 마거릿 생어, 잭 런던, 업턴 싱클레어 같은 진보적인 작가와 활동가들도 그곳에서 강의했다. 1912년에 학교는 할렘의 107번가로 이전했다. 1913년에는 코라 베넷 스티븐슨이 교장이 됐다.

1911년경 뉴욕시의 현대학교. 사진=위키피디아

노동운동은 20세기 초 맨해튼에서 매우 활발했으며, 노동운동이 성장하고 발전함에 따라 더욱 전투적으로 변했다. 1915년에 현대학교의 성인 교육 프로그램과 느슨하게 관련된 남성 그룹이 록펠러에게 던질 폭탄을 만들려고 시도했다. 맨해튼 맨션에서 폭탄이 너무 일찍 터졌을 때, 극단으로 치닫는 주변 환경이 학교를 위한 장소가 아니라고 판단됐고 학교를 뉴욕시 밖으로 이전하기 위한 준비가 시작됐다. 스텔튼이 적절한 후보지로 떠올랐다.

 

‘실질적인’ 아나키스트, 페름 부부의 교육관

1919년까지 약 100가구가 그곳에 토지를 소유했으며, 그중 20~30가구만 일 년 내내 그곳에 살았다. 열악한 조건에 설립 초기, 교장이 네 번이나 바뀌었다. 페름 부부가 교장으로 취임한 1920년부터 스텔튼 학교는 미국 자유교육의 대명사가 됐다. 교육학 저널인 〈현대학교 매거진(Modern School Magazine)〉을 통해 스텔튼 학교는 자유학교의 이념을 전파했고, 1925년에는 학교의 역사를 간행했다.

엘리자베스 페름은 일리노이에서 태어나 20세에 뉴욕에 와서 첫 남편과 함께 서점을 경영했다. 남편은 그녀에게 복종을 요구했고 저항 끝에 헤어졌다. 그녀는 1885년 뉴욕 음악원에서 피아노를 전공했고 빈곤 퇴치와 여성 권리를 위한 투쟁에 참여했다. 1890년대에 교육 과정을 마친 그녀는 브루클린에서 유치원을 운영하다 알렉시스 페름을 만났다. 알렉시스 페름은 스웨덴 출신으로 세 살 때 미국으로 왔다. 두 사람은 엘리자베스의 첫 남편이 사망한 후 1898년에 결혼했다. 

페름 부부는 아이들이 타고난 재능을 기르기 위해서는 외부 영향으로부터 보호돼야 한다고 믿었다. 위험을 이해하기 위해 뜨거운 난로에서 화상을 경험하는 것처럼 그들의 프로그램은 위험에 대한 자립과 예방 접종을 강조했다. 그들의 학교는 정원 가꾸기, 춤, 목공, 스포츠와 같은 창의적인 활동을 강조했다. 

뉴욕에 학교를 설립하면서 페름 부부는 옘마 골드만과 페러 협회 그리고 아나키스트들을 만났다. 골드만은 페름 부부를 자신과 교육관이 비슷한 최초의 미국인으로 여겼다. 그들은 아이들을 외부에서 공부하도록 방치하지 않고, 규율이나 교과서에 매달리지 않으며, 경험과 관찰을 통해 자유롭게 가르친다고 자서전에 썼다. 그녀는 아동 심리학에 대한 페름 부부의 이해를 칭찬하면서 그들이 ‘실질적인’ 아나키스트라고 했다.

 

“노동자를 보호해야 할 국가가 도리어 노동자를 착취한다”

알렉시스 페름에 의하면 노동자들이 공립학교 설립을 처음 요구했을 때 그들은 경제적 기회의 평등에 관심을 가졌다. 공립학교가 설립된 후, 그들은 자기 아이들의 장래 경제 문제가 해결됐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이 교육과정에 대한 어떤 권한도 갖지 못하고 국가에게 학교를 맡겼기 때문에 그들은 실패했다고 페름은 생각했다. 즉, 페름에 의하면 자신의 자유에 대한 침해를 막기 위해 노동자들이 조직한 국가가 도리어 그들을 착취하는 주체였다. 

엘리자베스 페름이 쓴 『교육 안의 자유(Freedom in Education)』. 사진=아마존

공립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고 질문 없이 국가가 부여하는 것을 배우고, 국가와 기업의 지도자들에게 복종하도록 배운다. 실질적 학습과 비판적 사고는 배제된다. 이러한 상황의 유일한 해결책은 공립학교를 벗어나 자유학교에 들어가는 것뿐이다.

스텔튼 학교에서는 아이들이 자유롭게 학과목을 선택했다. 학생이 선택을 하면 교사는 의식적으로 학생들의 자기인식과 자아 소유를 지도했다. 교사는 학생이 교과에 의해 통제되지 않고, 교과를 이용하는 방법을 가르쳤다. 학생의 출석은 자유였다. 페름 부부는 새 학교 건물을 공예, 교육, 유치원과 학술 도서관 등 네 가지 영역으로 나눴다. 학교가 독서와 계급투쟁 정치에 더 중점을 두기를 원하는 일부 학부모와의 의견 불일치로 부부는 1925년에 학교를 떠났다. 

페름 부부가 교장을 지낸 5년 동안 생긴 혼돈, 규율 부족, 잦은 교사 이직, 제멋대로인 숙소 등으로 학교는 해산 직전에 이르렀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그러나 국가주의 교육에 반대한 자유학교의 실험은 미국 교육에 새로운 희망을 남겼다. 그들은 학교가 대공황으로 어려움을 겪은 후인 1935년에 학교로 돌아왔다. 엘리자베스는 1944년에 사망했고, 알렉시스는 4년 후에 은퇴했다. 학교는 1953년에 문을 닫았고 알렉시스는 1971년에 사망했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했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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