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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49] 수녀원에서 타오른 아나키즘의 불꽃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 149] 수녀원에서 타오른 아나키즘의 불꽃
  • 조준태
  • 승인 2023.07.17 07: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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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테린 드 클레어에 대한 국내 기사가 혹시 있을지 몰라 구글에 검색했더니 두 개의 글이 나왔다. 하나는 2018년 〈한겨레〉에 연재된 ‘조한욱의 서양 사람’의 「형용사 없는 무정부주의」라는 글이었다. “노예제 폐지론자였던 아버지는 계몽주의자 볼테르를 본떠 딸의 이름을 지었”으며, “빈궁한 형편에도” “딸이 더 좋은 교육을 받도록 수녀원에서 설립한 학교에 보냈다”라고 쓰여 있어 놀랐다. 왜냐하면 자유를 옹호하고 제도종교, 특히 가톨릭에 반대한 볼테르의 이름을 따 딸의 이름을 지은 아버지가 후에 변심해 딸을 수녀로 만들고자 수녀원 학교에 보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같은 해 〈이로운넷〉에 연재된 ‘역사가 외면한 사람들’의 「“나를 죽이고 1천 달러를 주시오” 볼테린 드 클레어의 도전」이라는 글이었다. 〈뉴욕 타임스〉에서 2018년부터 연재한 ‘간과한 사람들의 이야기(Overlooked)’를 참고한 것이었다. 드 클레어가 미국에서는 상당히 유명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한국 기사의 제목은 1902년 미국의 일화에서 따온 것이었다. “아나키스트를 죽이면 1천 달러를 상금으로 주겠다”는 어느 상원의원의 제안에 드 클레어가 제목과 같이 답한 것이다. 100년이 훨씬 지난 일이지만 상원의원이 살인을 사주하고, 그에 답해 1천 달러에 죽어주겠다고 했다니 미국이라는 나라가 황당무계해 보인다. 그만큼 아나키스트가 위험시된 탓이겠다. 물론 살인은 없었다. 그래도 드 클레어의 답은 인용할 가치가 있다. 

“아래 적힌 우리 집 주소로 와서 직접 나를 죽이고 돈을 아껴라. 나는 저항하지 않겠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원하는 거리에서 나를 쏴라. 당신의 장사꾼 본능이라면 끌리는 제안이 아닌가? 1천 달러라는 대가를 누군가에게 줘야만 한다면, 내가 당신에게 나를 죽일 기회를 준 것이므로 나는 그 돈을 받아 암살범도, 대통령도, 거지도, 상원의원도 없는 자유로운 사회를 선전하는 데 쓸 것이다.”

 

1891년, 25세의 볼테린 드 클레어. 사진=위키피디아

사회주의와 성 해방을 주장한 아나키스트

당시 드 클레어의 나이는 서른여섯 살이었다. 그는 1866년 미시간주 시골에서 가난한 공산주의자 아버지와 노예제 폐지론자 가족 출신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앞서 인용했듯 그의 이름은 18세기 프랑스의 대표 계몽사상가 볼테르의 이름을 딴, 세상에 하나뿐인 이름일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를 수녀원 부속학교에 보냈다. 당연히 드 클레어는 그곳에서 문제아 취급을 당했고, 3년 만에 도망쳤다. 후에 그녀는 당시를 회상하며 “죽음의 계곡과 같았고 그 숨 막히는 날에 무지와 미신이 지옥 불로 나를 태운 하얀 흉터가 내 영혼에 있다”라고 말했다. 

드 클레어가 스무 살이 된 해인 1886년, 5월 4일에 터진 시카고 헤이마켓 사건에 대해 그는 “그때까지 나는 미국 배심원 재판법의 본질적 정의를 믿었다. 그러나 그 후에는 그럴 수 없었다”라고 썼다. 이 사건으로 아나키스트가 된 그는 페인, 울스턴크래프트, 소로, 데브스, 대로의 영향을 받았다. 1890년, 그는 아나키스트인 제임스 엘리엇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다. 부부 쌍방의 동의하에 아들은 아버지와 함께 살았고 그는 양육에 참여하지 않았다. 드 클레어는 유부남인 다이어 럼과 가깝게 지냈는데 그는 1893년 자살했다.

드 클레어는 1889년부터 1910년까지 필라델피아의 가난한 유대인 이민자들 사이에 살며 영어와 음악을 가르치고 이디시어를 배워 아나키즘 운동을 전개했다. 1892년에는 ‘여성 자유 연맹’을 설립했으며 자본주의, 결혼, 국가, 종교에 반대하고 성 해방, 사회주의, 아나키즘과 혁명을 주장했다. 남편과 아들이 있었지만, 전형적으로 어머니 혹은 아내에게 주어지는 역할을 맡고 싶지 않아 그들을 떠났다.

헤이마켓 대규모 집회 참가를 촉구하는 포스터. 사진=위키피디아

그는 1895년 ‘성노예제’라는 제목의 강의에서 여성이 스스로 자신의 몸을 왜곡하도록 조장하는 아름다움에 대한 이상과 부자연스러운 성역할을 만드는 아동 사회화 관행을 비난했다. 강의의 제목이 의미한 것은 매춘을 목적으로 한 여성 인신매매가 아니라 남성이 결과 없이 아내를 강간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결혼법이었다. 그러한 법이 “모든 기혼 여성을 자기 주인의 이름, 주인의 빵, 주인의 명령을 따르고 주인의 정욕을 섬기는 속박된 노예”로 만든다고 드 클레어는 주장했다.

 

여성을 속박하는 결혼법을 비판하다

그는 여성들이 ‘나는 왜 남성의 노예인가?’ ‘나의 두뇌가 왜 남성의 두뇌와 같지 않다는 것인가?’ ‘나는 왜 동료 남성과 같은 임금을 받지 못하는가?’ ‘나의 몸은 왜 남편의 관리를 받아야 하는가?’ ‘그는 왜 나에게서 아이들을 데리고 가는가?’라는 질문을 자기 자신에게 던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권위주의적 권력이 이 질문들에 ‘신’이라는 답변을 내놓았고, 교회(성직자)와 국가(입법자)가 이를 가르치는 두 가지 도구라고 덧붙였다. 드 클레어 또한 다른 아나키스트들처럼 모든 형태의 권위가 자기통제로 대체돼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모호함을 남겼다.

수년간 드 클레어는 개인주의 아나키즘을 옹호하며 골드만과 자신을 다음과 같이 구별했다.

“골드만은 공산주의자다. 나는 개인주의자다. 그는 재산권을 파괴하길 원한다. 나는 그것을 주장하고 싶다. 나는 개인에게 고유한 참된 재산권을 소멸시키려는 모든 특권과 권위에 맞서 전쟁을 벌이고 있다. 골드만은 협력이 경쟁을 완전히 대체할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이러저러한 형태의 경쟁이 항상 존재할 것이며 그것이 매우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드 클레어는 1894년 「옘마 골드만과 수용권을 옹호하며」에서 사회주의적 수용권을 인정하고 개인주의보다 사회적 아나키즘을 옹호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가 공산주의를 받아들였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 1901년의 글을 읽어보자. 

“나의 이상은 모든 천연자원이 모든 사람에게 영원히 무료이고, 노동자가 그의 동료들의 시간과 계절에 따라 일하고 일하지 않는 것을 통제할 필요가 없도록 자신의 모든 필수적 필요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한 양을 개별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상태다. 나는 그때가 올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생산 양식의 발전과 사람들의 취향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드 클레어의 마지막 입장은 ‘형용사 없는 아나키즘’이었다. 즉 공산주의, 집단주의, 상호주의 또는 개인주의와 같은 형용이 없는 아나키즘으로, 서로 다른 아나키즘 학파의 공존을 용인하는 태도였다.

 

‘형용사 없는 아나키즘’과 연대의 가능성

1909년 그는 상비군을 유지하는 정부에 단호하게 반대하며 그 존재가 전쟁 가능성을 높인다고 주장했다. 「아나키즘과 미국의 전통」에서 드 클레어는 평화를 달성하기 위해 “평화를 원하는 모든 사람은 군대에 대한 지원을 철회해야 하며, 전쟁을 원하는 모든 사람에게 비용과 위험을 그들 스스로 감수하도록 요구해야 한다. 사람을 죽이는 일을 직업으로 선택한 사람들에게는 급여도 연금도 제공될 수 없다.”라고 했다. 1912년에는 직접행동을 주장하기에 이른다.

볼테린 드 클레어의 묘비. 사진=위키피디아

어린 시절부터 앓은 신경계 질환으로 평생 건강하지 못했던 드 클레어는 그해 4월, 마흔다섯의 나이로 시카고의 병원에서 사망했다. 패혈성 수막염이 원인이었다. 그는 죽기 전 “나는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처럼 하늘과 땅의 어떤 통치자에게도 충성할 의무 없이 아나키스트이자 자유로운 영혼으로 죽는다”라고 말했다. 그는 후에 골드만도 묻힌 헤이마켓 희생자 묘역에 묻혔다. 사후 점차 잊혔지만 50여 년 후 여성 운동이 재개되면서 그가 쓴 글이 다시 주목받았다. 

많은 문제에서 드 클레어는 골드만과 충돌했지만 골드만은 드 클레어를 “미국이 배출한 가장 재능 있고 뛰어난 아나키스트 여성”이라고 칭송했다. 골드만은 드 클레어의 사후, 그의 선집을 아나키스트 잡지 <마더 어스>에 실었다. 아나키스트전기 작가인 폴 애브리치는 드 클레어가 “다른 어떤 미국 아나키스트보다 더 큰 문학적 재능의 소유자”라고 평했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했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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