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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147] "춤출 수 없는 혁명에 참여하고 싶지 않다" 골드만의 아나키즘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147] "춤출 수 없는 혁명에 참여하고 싶지 않다" 골드만의 아나키즘
  • 신다인
  • 승인 2023.07.03 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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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 골드만
엠마 골드만
엠마 골드만. 출처=위키피디아

골드만은 아나키즘을 “인간이 만든 법에 구속당하지 않는 자유에 근거하는 새로운 사회체제의 철학이고, 어떤 형태든 폭력에 의존하는 정부는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부적절하고 해롭다고 여기는 이론”이라고 정의했다.

골드만의 아나키즘은 개인주의적이었다. 그녀는 모든 인간이 궁극적으로 사슬을 끊고 온전함에 도달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인간의 본성에는 그것을 막을 수 있는 것이 없고 '자유에 대한 사랑은 보편적인 특성'이라고 보았다. 슈티르너와 니체의 영향을 받았지만 골드만은 에고이스트가 아니라 공동체 속의 개성이라는 아나키스트의 중심적 이상을 성취하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아나키즘을 '개인의 주권' 철학이자 '사회적 조화'의 '유기적 발전'의 이론이라고 주장했다. 재산을 '사물에 대한 지배'로 거부하면서 그녀는 해방된 노동이 '생산적 집단, 공동체, 느슨하게 연합된 사회의 자발적인 협력에 기초한 사회에서만 가능하며, 궁극적으로 이익의 연대에 의해 작동되는 리버테리언 공산주의로 발전하는 사회'에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폭력도 정당한 혁명적 투쟁 수단으로 여겼던 골드만

골드만은 임금 체계를 전복하고 중앙집권화된 국가를 '자유롭고 연합된 노동자 집단'으로 대체하려는 희망을 지닌 생디칼리즘을 '아나키즘의 경제적 표현'으로 보고 직접행동, 산업 사보타주, 총파업 방식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녀는 사회 속의 개인을 중시했다. '개인이 삶의 진정한 현실'이라는 신념을 재확인하고 정부가 권력을 확대하고 영속화하려 할 뿐만 아니라 개인에 대한 왜곡과 개인에 대한 두려움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정부를 비판했다. 여론의 파멸적인 영향을 충분히 인식한 그녀는 '구성된 권위보다 더 개인을 가장 괴롭히는 것은 사회적 획일성과 동일성'이라고 주장했다. 와일드처럼 그녀는 진정한 문명은 개인의 '침습적이고 강압적인 권위에 의해 방해받지 않고 성장하고 확장할 수 있는 자유와 그 존재의 정도'에 따른다고 보았다. 동시에 그녀는 상호부조와 자발적인 협력이 종의 진화를 위해 작용했으며 오직 '자유로운 개인 및 연합 생활'의 기초를 만들 수 있을 뿐이라고 주장함으로써 크로포트킨을 따랐다.

미국의 좌파와 우파 모두를 신랄하게 비판한 그녀는 1차 세계대전 이전의 급진 운동이 '취향도 성격도 없는 일종의 지적 혼돈' 상태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또한 마르크스의 역사적 유물론이 '인간적 요소'를 간과하고 인류의 회춘에 '이상적인 영감과 활력을 주는 힘'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는 점을 비판했다. 계급의식은 결코 정치 무대에서 표현될 수 없으며 현 체제를 전복하려는 단호한 노력으로 형성된 '이익의 연대'를 통해서만 표현될 수 있다고 본 골드만은 '미래에 대해 무자비한 프로그램이나 방법을 강요하는 것을 거부했다.

그녀는 인간의 자유를 위한 운동에는 해방된 인간이 참여해야 한다고 믿었다. 어느 날 저녁 동료 아나키스트들과 춤을 추다가 그녀는 태평한 태도 때문에 동료에게 꾸지람을 들었다. 그녀의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아름다운 이상, 아나키즘, 관습과 편견으로부터의 해방과 자유를 위한 대의가 삶과 기쁨의 부정을 요구해야 한다고 믿지 않았다. 나는 우리 대의가 내가 수녀처럼 행동할 것을 기대할 수 없으며 운동이 수도원으로 바뀌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런 뜻이라면 원하지 않았다. "나는 자유, 자기표현의 권리, 아름답고 찬란한 것에 대한 모든 사람의 권리를 원한다."

정치적 젊은 시절의 골드만은 표적 폭력을 정당한 혁명적 투쟁 수단으로 여겼다. 당시 골드만은 폭력의 사용이 혐오스럽기는 해도 그것이 가져올 수 있는 사회적 이익과 관련하여 정당화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녀는 대중의 반란을 조장하기 위해 행해진 행위 또는 폭력에 대한 선전을 옹호했다. 그녀는 자본가를 죽이려고 했고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대통령 암살을 명시적으로 승인하지는 않았지만 그 이상을 옹호하고 그 행동이 억압적인 제도의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믿었다. 그러나 <러시아에서의 환멸> 후기에서 그녀는 “방어 수단으로 전투에서 폭력을 사용하는 것과, 테러리즘의 원칙을 만들고 그것을 제도화하고 사회 투쟁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지정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이러한 테러리즘은 반혁명을 낳고 그 자체가 반혁명이 된다”고 주장했다. 골드만은 소련 사회의 군사화를 무장 저항 그 자체의 결과가 아니라 볼셰비키의 국가주의적 비전의 결과로 보았다.

 

"자본주의와 국가는 인간 통제의 도구"

한편 골드만은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인간의 자유와 양립할 수 없다고 믿었다. 그녀는 "재산이 인정하는 유일한 요구는 더 큰 부에 대한 탐욕스러운 욕구다. 왜냐하면 부는 정복하고, 부수고, 착취하고, 노예로 만들고, 분노하고, 타락시키는 권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또한 자본주의가 노동자를 비인간화하여 "생산자를 강철과 철의 주인보다 의지와 결단력이 적은 기계의 단순한 입자로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골드만은 국가를 근본적이고 필연적인 통제와 지배의 도구로 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반국가적 견해의 결과로 투표가 쓸모없고 최악의 경우 위험하다고 믿었다. 그녀는 투표가 의사 결정의 진정한 구조를 가리면서 참여의 환상을 제공했다고 썼다. 대신 파업, 항의 및 "우리 도덕규범의 침략적이고 간섭적인 권위에 대한 직접행동"의 형태로 표적저항을 옹호했다. 그녀는 1930 년대 스페인의 많은 아나코 생디칼리스트들이 자유주의 공화국 형성에 투표했을 때에도 투표 반대 입장을 유지했다. 그녀는 여성 참정권 운동에 동의하지 않았다. 또한 시오니즘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수감자 처우와 범죄의 사회적 원인과 감옥 시스템을 비판하면서 범죄를 부당한 경제 시스템의 자연스러운 파생물로 보았다.

골드만은 전쟁에 반대하고 특히 병역을 국가의 강압 형태 중 최악의 형태로 간주하여 징병에 반대했다. 노동자와 다양한 파업, 피임, 제1차 세계대전 반대를 지지하는 연설과 조직 활동으로 일상적으로 감시, 체포, 투옥되었다. 그 결과 그녀는 20세기 초 표현의 자유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고, 표현의 자유는 사회 변화를 달성하기 위한 근본적인 필요성이라고 생각했다.

 

아나키즘 페미니즘의 창시자

그녀는 1세대 페미니즘의 여성 참정권 운동 목표에 적대적이었지만 여성의 권리를 열정적으로 옹호했으며 오늘날 가부장제를 국가 권력 및 계급 분열과 함께 저항해야 하는 계층으로서의 가부장제에 도전 하는 아나키즘 페미니즘의 창시자다.

1897년에 그녀는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여성의 독립, 자신을 부양할 권리, 스스로 살 권리, 원하는 사람 또는 원하는 만큼 사랑할 권리를 요구한다. 남녀 모두의 자유, 행동의 자유, 사랑의 자유, 모성의 자유를 요구한다.“

교육을 받은 간호사인 그녀는 피임에 관한 여성 교육의 초기 지지자였다. 그 시대의 많은 페미니스트들처럼 그녀는 낙태를 사회적 조건의 비극적인 결과로 보았고 산아제한을 긍정적인 대안으로 보았다. 또한 자유로운 사랑의 옹호자이자 결혼에 대한 강력한 비판자인 그녀는 초기 페미니스트들이 청교도주의와 자본주의의 사회적 세력에 의해 경계가 지어져 갇혀 있다고 보았다. 그녀는 "우리는 오래된 전통과 습관에서 벗어나 방해받지 않는 성장이 필요하다. 여성 해방 운동은 지금까지 이루어졌지만 그 방향으로 가는 첫 걸음이다."라고 썼다.

골드만은 또한 동성애자와 젠더 퀴어에 대한 편견을 노골적으로 비판했다. 사회적 해방이 게이 남성과 레즈비언에게까지 확대되어야 한다는 그녀의 믿음은 그 당시 아나키스트들 사이에서도 사실상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일반 대중 앞에서 동성애 사랑을 변호한 최초이자 유일한 여성이자 최초이자 유일한 미국인이었다.

1940년 그녀가 죽은 후 잊힌 그녀는 1970년대에 다시 부활했다. 그녀가 "춤출 수 없는 혁명에 참여하고 싶지 않다"는 문구는 그녀의 말로 유행했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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