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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죽음에도 당신의 책임은 있다
어떤 죽음에도 당신의 책임은 있다
  • 김재호
  • 승인 2023.06.26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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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안내_야코프 토메 지음 | 유영미 옮김 | 에코리브르 | 292쪽

우리의 행동이 어떻게 사람을 죽이는가

이 책을 펼쳤을 때 가장 먼저 마주하는 단어는 ‘지속가능성’이다. 지속가능성이란 말을 그야말로 지속적으로 귀가 따갑게 들었을 것이다. 그만큼 지구에 거주하는 인간들이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다는 증거다. 요즘 ‘기후 변화’란 단어가 ‘기후 위기’로 바뀌는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그렇게 끊임없이 기후 변화라는 단어를 들음에도 여전히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다. 왜 그럴까? 이런 질문을 한다는 자체가 큰 문제이고 슬픈 일이다. 하지만 내가 바로 문제의 일부고, 나는 음악을 연주하면서 로마가 불타는 것을 지켜보고 있는 형국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전문가들이 나서야 한다. 사람들을 설득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의사소통이다. 명확한 생각과 메시지다. 전문 용어만큼 감정적 언어를 잘 구사해야 한다. 나무를 껴안는 사람들(환경보호론자, 일명 외코)은 감정을 구조화하는 것을 배워야 하고, 콩알 세는 자들(경제학자)은 감정의 모호함과 막연함에 대한 반감을 극복해야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은 감정적으로 이해하고 스스로가 올바른 결정을 내렸다고 확신할 때에만 자기 본연의 과제를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제란 기후 변화를 줄이거나 돌이키는 것, 세계의 생태계를 지켜나감으로써 우리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이다. 우리는 공동으로 연대해 함께할 때에만 우리 스스로와 세계를 구원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가 함께 실패할 수밖에 없다.

책의 서두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모 패스트푸드 체인은 햄버거를 팔아 하루에 24명을 죽음으로 내몬다. 여기서 주의해야 하는 것은 이것이 햄버거가 건강하지 않은 음식이어서가 아니라 육류 생산이 장기적으로 초래하는 생태학적 결과와 관련한 죽음이라는 것이다. 죽음을 생각하는 걸 마뜩잖아 하다 보니 킬 스코어(Kill Score: 우리말로 옮기면 ‘살인 지수’나 ‘살인 점수’ 정도가 될 것이다)라고 하면 우선 거부감을 느끼고 주저하는 마음이 든다. 누가 그런 걸 생각하고 싶겠는가? 하지만 킬 스코어가 식은 죽 먹기처럼 들리지 않더라도 이를 피해갈 수는 없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죽겠지만, ‘자연적’ 죽음과 ‘때 이른’ 죽음은 커다란 차이가 있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문장으로 시작한다. ‘행복한 가정은 서로 비슷비슷 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불행하다.’ 이와 비슷하게 자연적 죽음은 모두 비슷하지만, 때 이른 죽음은 그렇지 않다.”

이런 문장은 우리가 정말로 킬 스코어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게 할지도 모른다. 때 이른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 않고, 이와 관련한 범죄 현장을 세세하게 점검하고 싶지도 않다. 그러다 보면 그 현장에서 우리 자신의 발자국도 발견할 것이기에.

피해자가 있는 곳엔 가해자도 있는 법. 물론 이 책은 가해자가 있는 죽음을 다룬다. 소셜 미디어 피해자 몰리의 이야기, 일본 소년의 이야기(기후 변화가 가져온 이상 고온 현상으로 말미암아 열사병으로 사망), 모리츠의 비극적 운명 이야기(런던에서 사흘 밤을 쉬지 않고 일한 뒤 사망)는 특히 가슴이 아프다. 그런데 여기서는 사람이 죽임을 당했는데, 눈을 크게 뜨고 둘러봐도 가해자는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몰리는 자살했고, 일본 소년은 열사병으로 죽었으며, 모리츠는 간질 발작을 일으켰다. 정말 이들의 죽음에 아무도 관여하지 않았을까? 아무도 책임이 없을까?

가해자를 찾아 나설 때에야 비로소 생태적·사회적 측면에서 우리의 발자국으로 우리가 어떻게 사람을 죽일 수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저자는 직접 마트에 가서 식료품을 구입할 것인지 온라인으로 주문하고 배달시킬 것인지, 자전거를 탈 것인지 택시를 탈 것인지, 플라스틱 쓰레기를 재활용할 것인지 아무 생각 없이 쓰레기통에 버릴 것인지와 같은 일상적 결정들이 어느 정도로 치명적 결과를 불러오는지,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다르게 할 수 있는지 규명한다.

하지만 소비자에게만 책임을 덮어씌울 수는 없다. 상품을 소비하는 것 외에 상품을 만들어내는 주체들도 중요하다. 아이가 납으로 오염된 물을 먹는다면, 그 물을 주는 엄마가 아이를 죽이는 것인가 아니면 상수도 시설이 죽이는 것인가? 헤로인 중독자는 스스로를 죽이는 것인가 아니면 딜러가 그를 죽이는 것인가? 기업에 투자하는 금융기관은 어떠한가? 그들은 자본으로 국민 경제의 기관실을 돌리고, 글로벌 기업의 소유주로 등장한다.

이 범죄 이야기에는 세 부류의 용의자가 있다. 바로 소비자, 생산자, 투자자다. 이들 모두는 분명히 킬 스코어에 본인들이 기여하는 역할을 무시하기로 암묵적으로 짠 듯하다. 여기에는 원고도 판사도 없다. 그러므로 피고도 없다.

저자가 “우리는 모두 살인자다. 어떤 사람은 더 많이, 어떤 사람은 좀더 적게 살인한다. 소비·생산·투자에서의 결정으로 우리는 ‘조기 사망’에 책임이 있다”고 밝혔듯이 우리 모두는 이에 연루되어 있다. 즉 이 책은 지속가능한 삶의 네 가지 핵심 영역, 즉 생태적 영역 두 가지와 사회적 영역 두 가지에 대해 킬 스코어를 내어본다. 기후 변화, 폐기물 및 배기가스, 우리를 병들게 하는 현대적 노동 조건, 익명의 소비를 살펴보고, 현재와 미래 세대의 삶에 미치는 우리의 영향을 분석한다. 이 이야기는 개인의 결정, 그러나 또한 기업과 금융기관이 내리는 결정으로 말미암는 사망을 중심으로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마음 아픈 다섯 번째 현장인 전쟁과 분쟁을 다룬다. 전쟁과 분쟁이 지속가능성과 무슨 상관이냐고 의아해할 수 있지만, 가장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우리의 행동은 어떤 식으로든 죽음과 연결돼 있다. 이미지=픽사베이

다음으로 이 핵심 영역들이 일으키는 영향과 그 다섯 가지 가운데 현재 가장 큰 화두인 ‘기후 변화’가 일으키는 과정을 설명한다.

인간의 경제 활동이 기후 변화에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은 두말할 필요 없는 상식이 되었다. 대기는 질소 78퍼센트, 산소 21퍼센트, 아르곤 0.9퍼센트, 그 밖의 기체 0.1퍼센트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이른바 온실가스는 이 마지막 ‘그 밖의 기체’에 속한다. 과거 80만 년 이상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 함량은 0.0002∼0.0003퍼센트를 유지해왔다. 그러다가 이미 0.0004퍼센트에 도달했다. 현재 추세로 가면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 비율은 0.0005퍼센트까지 오르게 될 것이고, 그러면 지구의 온도는 섭씨 2∼3도 상승할 것이다.

기온 상승으로 인한 기후 변화의 결과는 우리가 주변에서 얼마든지 목격할 수 있다. 얼음이 녹고 해수면이 상승하고, 산불이 증가하며 홍수와 가뭄이 더 빈번해진다. 세계보건기구는 작금의 기후 변화로 매년 15만 명 이상이 사망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자연사와 부자연사를 종합한 전체 상에서 기후 변화로 말미암은 사망이 차지하는 비율을 살펴보면, 300명 중 1명에 해당한다는 결과가 나온다. 이런 상황은 더욱 악화할 것이다. 비관적 예상에 따르면 기후 변화로 말미암은 사망자 수는 2040년에 100만 명, 2080년에 500만 명, 21세기 말에는 1000만 명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이 수치를 예상되는 전체 사망자 수와 비교하면, 이번 세기 말에는 사망자 10명 중 1명이 기후 변화로 말미암아 죽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런 예상은 우리가 기후 변화에 맞서 적극 싸워서 작금의 추세를 꺾을 수 있다는 전제하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망자 수도 무척 축소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기후로 인한 사망에 대한 대부분의 추정치는 더위, 악천후 등 날씨의 개별적 위험 요인에 한정함으로써 이런 광범위한 요인을 비켜간다. 이런 예측은 기후 변화의 잔인성을 축소하는 궁색한 시뮬레이션이며, 현대 기후 과학의 예언가들이 최소한 죽음의 경우 어떻게 기후 변화의 결과들을 축소하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여러 연구자의 가장 비관적인 결론에 따르면 이산화탄소 배출 약 1000톤당 추가 사망자 1명이 야기되는 것으로 본다. 그런데 독일인 한 사람당 한 해에 배출하는 이산화탄소량은 약 11톤이므로, 평균 기대 수명인 82세를 산다고 할 때 한 사람당 일생에 걸쳐 902톤을 배출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는 기업으로 옮겨가면 어마어마한 수치로 변한다. 한 사람이 평생 배출하는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한 사람을 죽인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기업체가 내뿜는 탄소 배출량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사망에 이르게 하겠는가.

주식 가치가 전체 시장의 약 20퍼센트를 점유하는 제한된 수의 회사들이 전체 이산화탄소 배출의 80퍼센트를 차지한다. 주로 화석 연료와 관련한 산업에 속하는 회사들이다. 이산화탄소 말고 다른 온실가스를 계산에 넣으면, 부동산 회사와 농업이 추가된다. 그 외 나머지 기업들은 거의 비중이 없다. 따라서 브리티시 아메리칸 토바코(BAT)는 이산화탄소를 많이 방출하는 500대 민간 기업에 속하지만, 셸(Shell)의 탄소 발자국은 BAT의 약 33배다. 킬 스코어를 계산해 보면 셸은 연간 약 23만 명을 죽인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것은 BAT로 인한 흡연 사망자의 5분의 1에 해당하지만, BAT의 탄소 발자국으로 말미암은 사망자보다는 약 30배나 많다. 두 개의 진실이 나란히 간다. 한 가지 진실은 BAT의 탄소 발자국은 크고 치명적이라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진실은 BAT의 탄소 발자국은 에너지 관련 대기업들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라는 것이다.

이런 사실에도 불구하고, 지난 100년간 기후 변화를 가속시켜 치명적 결과를 빚어낸 재화와 서비스는 한편으로는 인간의 생명을 구한 수단들이었다. 심지어 이산화탄소 배출이 20세기에는 전반적으로 오히려 인간의 생존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이산화탄소는 화석 에너지원을 활용함으로써 배출되는데, 이런 화석 에너지원을 활용하여 경제 성장을 이루고, 평균 수명을 높이고, 기아를 줄이고, 일반적으로 인류가 더 윤택하게 살아가게 하는 자원들을 더 많이 생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는 이런 전개의 유익과 손해를 수학적으로 비교하고(특히 화석 연료로 인해 전쟁 수행 능력이 생겨난 것과 관련하여), 진보가 인류에게 어떤 혜택을 주었고, 어떤 손해를 끼쳤는지 논하지 않는다. 더욱이 오늘날에는 자전거 대신 자동차를 탄다고 해서 뭇 생명을 더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기쁨에는 고통이 따르고, 고통에는 기쁨이 따른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화석 에너지원인 석유, 가스, 석탄은 이런 죽음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무엇보다 석유는 경제 성장의 원동력이자 세계에서 끝없는 전쟁과 불행의 원인을 제공한 물질이다. 석유는 자동차, 비행기, 배를 움직이고 집과 아파트에 난방을 제공한다. 요즘에는 석유로 난방을 하는 경우는 극히 일부지만 말이다. 그러나 석유는 훨씬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생산되는 석유의 약 15퍼센트에 해당하는 양은 엔진이나 발전소에서 연소되지 않는다. 그런 석유는 오늘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소재로 바뀐다. 바로 플라스틱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플라스틱을 주로 폐기물에서 다룬다.

나머지는 사망자 수로만 살펴보자. 미세먼지로 사망하는 사람은 1년에 400만 명 정도로 추정되고, 플라스틱 폐기물로 사망하는 사람은, 그것도 상위 100개 생산업체의 킬 스코어는 매년 4만 5000명 정도다. 세계의 모든 자동차가 배출하는 오염 물질로 2015년에 약 38만 5000명이 조기 사망했다. 또 국제노동기구의 추정에 따르면 연간 74만 5000명이 과로로 사망하는데, 이는 연간 전 세계 모든 사망자의 약 1퍼센트에 해당한다고 한다. 작업 중 사고로 연간 약 36만 명이 사망하며, 석면 중독으로 20만 명 정도가 죽음에 이른다. 7장 “익명의 소비”와 8장 “전쟁과 분쟁”에서는 킬 스코어를 계산하지 않는다. 정확한 데이터를 구하거나 계산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이 책을 끝맺는다.

이 책은 작은 원인에 대한 긴 설명이었다. 우리가 작은 선택으로 어떻게 사람을 죽이고 있는가 하는 이야기다. 존 스타인벡의 소설에서 파이사노가 경솔하게 떨어뜨린 성냥으로 집에 불을 낸 것처럼,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 불을 지르고 있다. 스타인벡의 주인공들은 불을 재빨리 끌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미소를 지으며 …… 거기에” 앉아 있었다. “불꽃은 뱀처럼 천장까지 기어올라 지붕을 뚫고 지지직거렸다. 그제야 친구들은 의자에서 일어나 꿈에 취한 사람들처럼 문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너무 늦었다고 그들에게 외치고 싶다. 너무 늦었다! 그들은 버젓이 보고 있으면서도 불행이 진행되도록 내버려 두었다.
스타인벡의 이야기는 캘리포니아의 더운 도시 몬터레이에서 시작한다. 우리의 이야기, 아니 우리라는 표현이 너무 거만한 듯하면 어쨌든 내가 이 책에 기술한 이야기는 어느 추운 1월의 저녁에 목도리를 꽉 매고 발터 베냐민의 얼음 사막에서, 즉 지속가능성에 대한 추상적 담론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을 때 시작되었다. 이렇게 헤매는 가운데 작은 일에서 시작하여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사회적 힘에 눈을 돌리지도 못하고 있었다.
나는 우리의 이야기가 《토르티야 마을》에서와 똑같이 끝나지 않았으면 한다. 우리가 스타인벡의 파이사노처럼 꿈에 취한 듯 문밖으로 나가버리고, 이 세상이 불타게 내버려 두기를 바라지 않는다. 내면의 불이 우리를 움직여야 한다. 발터 베냐민과 더불어 우리의 이야기를 시작했으니, 그와 함께 끝을 맺어도 좋을 것이다. 매일 아침 침대에 놓여 있는 깨끗한 셔츠처럼 우리에게 놓여 있는 하루를 단호하게 시작하라는 그의 외침과 더불어 말이다. 그 셔츠를 입자. “다음 24시간의 행복은 거기에 달려 있으니.” 따라서 우리 이제 우리의 의자에서 일어나, 불을 끄도록 하자! 지구를 구하자! 생명을 구하자!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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