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7 19:40 (토)
탈신화에서 다시 신화로…상상력의 제국주의 벗어날 때
탈신화에서 다시 신화로…상상력의 제국주의 벗어날 때
  • 정재서
  • 승인 2023.06.30 11: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저자가 말하다_『사라진 신들의 귀환』 정재서 지음 | 문학동네 | 344쪽

거대한 문화적 변동에 자리잡은 신화의 귀환
산업과 학문의 괴리·신화비평의 부재 극복하기

팩트와 이념을 신봉했던 확실성의 시대를 지나 우리는 오늘 최첨단 과학과 환상이 공존하는 모호성의 시대를 살고 있다. 인간만이 유일한 주체라는 오랜 믿음도 흔들린다. AI가 세상을 지배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상상은 공상과학 영화를 넘어 이제 심각히 숙고해야 할 주제가 됐다. 

동물에 대한 애틋한 마음과 유별난 친교(親交), 나아가 자연을 보듬고 함께 해야 한다는 생각, 영화‧웹툰‧드라마에서 대놓고 넘쳐나는 변신‧환생‧이계(異界) 모티프는 이 시대 문화의 유력한 징후다. 그리고 이들의 밑바탕에는 ‘신화의 귀환’이라는 인류 공통의 거대한 문화적 변동이 자리 잡고 있다. 일찍이 질베르 뒤랑(1921~2012)에 의해 포착되고 명명되었던 ‘신화의 귀환’은 21세기 아니 미래까지 포괄하는 중요한 키워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여러 지역의 신화를 나타내는 그림들이다. 이미지=위키백과

한국사회는 해방 이후 1980년대까지 소위 ‘이념의 시대’를 거쳐 1990년대에 이르러 포스트모더니즘과 해체주의 등의 사조가 유입되면서 다원화된 문화의 시대를 맞는다. 특히 영화‧만화‧애니메이션‧게임‧드라마 등 문화산업에 대한 관심이 폭주하면서 상상력‧이미지‧스토리의 근원인 신화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였다. 대형서점에서 신화 코너를 따로 마련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이다. 아울러 「해리포터」시리즈, 「반지의 제왕」,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등 선진국의 판타지 대작이 흥행에 성공을 거두면서 한국에서도 문화산업은 국가 경제를 좌우할 성장동력산업의 하나로 간주될 만큼 비중이 커졌다. 문화산업의 중요한 기반은 스토리텔링이므로 스토리의 원조라 할 신화가 각광을 받게 된 것은 당연한 현상이었다. 이처럼 한국에서의 ‘신화의 귀환’은 외양적으로는 산업적·경제적 동기에 고무된 바가 크다.

자생적이라기보다 갑자기 주어진 한국에서의 ‘신화의 귀환’은 내재적인 여러 문제점을 노출시키고 있다. 특히 산업과 학문의 괴리, 신화적 상상력의 정체성, 신화비평 부재 등의 문제를 거론할 수 있다. 첫째, 산학의 괴리 문제는 문화산업계와 학계가 긴밀하게 연계돼 있지 않고 따로 놀아서 수준 높은 작품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 극복되어야 할 과제다. 예컨대, 일본에서는 요괴학 학술대회가 열리고, 학자뿐만 아니라 감독‧작가‧PD도 함께 참여한다. 

둘째, 신화적 상상력의 정체성 문제는 현재 우리의 상상력이 그리스‧로마 신화와 안데르센 동화 등을 표준으로 삼는 이른바 ‘상상력의 제국주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에서 비롯한다. 예컨대, 우리는 인어를 상상하면 예쁜 인어공주를 떠올린다. 꺼벙한(?) 동양의 인어아저씨는 생념(生念)도 못한다. 동양의 신화는 신관‧세계관‧자연관‧동물관과 타자에 대한 인식 등에서 그리스‧로마 신화와 매우 다르다. 어찌 우리의 상상력을 특정한 지역의 신화로만 채울 수 있단 말인가? 동양 신화 등 다양한 신화를 수용해야만 우리의 상상력이 크게 업그레이드될 것이다. 

셋째, 신화 비평 부재의 문제는 현재 문화 현상의 전반 색조가 판타지적임에도 불구하고 평단은 아직도 90년대 이전에 풍미했던 리얼리즘을 기조로 한 비평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문학과 문화 현상에 대한 진단이 전면적이지 못하다는 뜻이다. 예컨대, 『서유기』에서의 손오공 일행이 요마를 구축(驅逐)해나가는 여정을 현실에 대한 알레고리로만 읽는다면 당시 사회의 탐관오리와 모리배 등에 대한 투쟁의 의미로 귀결되겠지만 인간 내면의 불완전한 성향을 극복하고 이른바 개성화로 나아가는 심오한 의미는 도외시 된다. 한때 은성(殷盛)했다가 리얼리즘 비평에 밀려 사라지다시피한 신화비평의 부활을 점쳐본다.
필자는 1985년 국내에 처음 동양 신화의 고전 『산해경(山海經)』을 역주·소개한 이래 신화 연구를 진행해오면서 신화학 자체와는 별도로 신화와 문화, 신화와 과학 등의 상관성을 사유하고, 신화와 디지털적 상황이 결합된 이 기묘한 시대를 읽어낼 신화서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졸저 『사라진 신들의 귀환』은 이와 같은 상념의 소산이다. 『산해경』을 출간할 당시 학문에 무익한 책을 번역했다는 비방을 듣기도 하였는데 필자는 무익함 속에 의미가 있다고 여전히 믿고 있는 강호의 기인이사(奇人異士)들이 혹시 이 책을 접할 때 실로 “마음에 담고 눈길을 머물게 하기(遊心寓目)”에 부족함이 없기를 바란다.

 

 

정재서 
영산대 석좌교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