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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는 어떻게 근대적 정치체제가 되었나
민주주의는 어떻게 근대적 정치체제가 되었나
  • 이우창
  • 승인 2023.06.30 11: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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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_『누가 민주주의를 두려워하는가: 지성사로 보는 민주주의 혐오의 역사』 김민철 지음 | 창비 | 256쪽

오늘날 민주주의는 두 가지 상반된 운명에 처한 듯 보인다. 한편으로 민주주의는 보편적 승리를 목전에 두고 있다. “반민주적”이란 형용사는 그 자체로 경멸과 혐오, 퇴보의 감각을 담아 사용되며, 심지어 독재자들조차도 자신들의 국가가 민주적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동시에 어디에서든 민주주의의 위기를 알리는 경고음이 들려온다. 이른바 선진 민주주의국가조차 포퓰리즘과 파시즘의 유혹에 자유롭지 않다. 민주주의의 약점을 넘어서기 위한 ‘근본적인’ 변혁이 필요하다는 논자도 흔하다. 낙관론과 비관론의 사이에는 좀처럼 언급되지 않는 곤란한 사실 하나가 있다. 그것은 민주주의를 당연하게 여기면서도 정작 이를 둘러싼 쟁점을 명료하게 설명할 사람을 찾아보기 힘든 한국 사회의 지적 빈곤함이다. 김민철의 『누가 민주주의를 두려워하는가: 지성사로 보는 민주주의 혐오의 역사』는 이러한 난관을 정면으로 돌파하는 반가운 책이다.

주권과 통치의 구별을 중심으로 민주주의 개념의 요점을 짚는 1장을 지나, 『누가 민주주의를 두려워하는가』의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제1부 “민주정만 빼고”는 고대부터 18세기 말 프랑스혁명기까지를, 제2부 “민주주의를 다시 보다”는 프랑스혁명기 및 이후를 배경으로 한다. 독자는 곧 저자가 몇 가지 독특한 선택을 내리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먼저 책은 흔히 민주주의와 동일시되곤 하는 고대 아테네나 현대 미국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대신 3장부터 10장까지, 본문의 약 5분의 4에 가까운 분량은 르네상스 인문주의부터 프랑스혁명기까지의 유럽의 정치사상에 집중한다. 또한 저자는 민주주의와 그 선구자들의 계보를 추적하는 대신 각 시대의 지식인·정치인들이 민주정을 비판하고 거부했던 (당대의 기준에서는 합리적이었을) 이유에 주목한다.

이러한 선택의 이유는 무엇일까? 중요한 것은 민주주의의 찬반 자체보다는 민주주의의 개념이 놓여 있던 맥락을 이해하는 데 있다. 비판자들의 논지를 역사적으로 짚어보며 우리는 민주주의가 독립된 실체적 개념이었다기보다는 국가와 정치체의 작동을 설명하는 더 큰 분석적 언어의 일부였음을 알게 된다. 지난 반세기 동안 케임브리지 지성사학파가 축적해온 연구성과를 간결하게 집약하는 3장에서 6장까지를 보자. 근대 초 다양한 사상적 흐름이 결합하면서 유럽의 정치 언어는 한층 더 정교하고 복잡해졌다. 저자는 그러한 언어가 왜, 어떻게 민주정을 부적합하고 위험한 정치체제로 간주하게 되었는지 보여준다. 공화주의 전통을 따르든, 자연법 전통을 좇든 정치사상가들은 국가의 목표는 안정과 존속에 있으며, 이를 위해서는 정치적 변동가능성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전제에 동의했다. 이때 ‘신뢰할 수 없는’ 다수가 통치하는 민주정은 꼭 피해야 하는 선택지였으며, 고대 로마의 역사는 민주정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사례로 두고두고 인용되었다.

이토록 강고하게 축적된 반민주주의적 토대로부터 도대체 어떻게 민주정을 옹호하는 논리가 출현할 수 있었을까? 답변은 책의 핵심부이자 저자의 지적 역량이 집중된 제2부, 특히 프랑스혁명기 민주파의 사상적 실천을 서술하는 대목에서 찾을 수 있다(저자는 영어권-프랑스어권 학계에서 이 주제를 선도하는 대표적인 연구자다). 그때까지 전혀 당연하지 않았던 “대의민주주의” 개념의 창시를 비롯하여, 민주파는 반민주주의론의 요점을 하나씩 논박하고자 했다. 민주주의 개념은 그 과정에서 다각도로 확장되었다. 몇 차례고 숙독할 가치가 있는 8장과 9장에서, 저자는 민주주의가 인민의 정치적 의사결정권 보유라는 단순한 규정을 뛰어넘어 복잡한 정치적·경제적 쟁점을 아우르는 하나의 ‘근대적’ 정치체제 모델이 되어가는 과정을 재구성한다. 물론 그것이 곧 민주주의의 승리를 뜻하지는 않았다. 책의 결말부는 19세기 프랑스 자유주의자들이 “기존의 민주정 개념에 새겨진 급진적 전망을 모두 씻어”낸 “자유민주주의”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압축적으로 살펴본다(19세기 이후를 다루는 서술의 간소함은 아쉽지만, 공정하게 말하면 19세기 이후 정치사상사는 이제야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되고 있다).

『누가 민주주의를 두려워하는가』는 지금까지의 요약으로 갈음할 수 없을 만큼 풍부한 쟁점을 아우르면서도 이를 명료하고 재미있게 전달하는 데 성공한다. 평이하고 잘 읽히는 문장 속에 기초적인 사실에서 학계 최전선의 연구성과까지 녹여내면서 저자는 초심자부터 전문 연구자, 정치 지망생을 아우르는 폭넓은 독자가 함께 읽을거리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거의 번역서로만 접할 수 있었던 이러한 책을 한국인 저자가 직접 집필했다는 사실은 정말로 인상적이다. 몇 번이고 읽어도 새로운 쟁점을 마주치는 경험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누가 민주주의를 두려워하는가』는 앞으로 계속해서 읽힐 우리 사회의 고전이 될 것이다.

 

 

 

이우창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객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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