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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145] 여성 아나키스트들, 나혜석, 이토 노에, 엠마 골드만
[박홍규의 아나키스트 열전145] 여성 아나키스트들, 나혜석, 이토 노에, 엠마 골드만
  • 신다인
  • 승인 2023.06.19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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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 이토 노에, 엠마 골드만

한국 최초의 실명 아나키스트 영화는 2017년의 <박열>이 유일하다. 다른 나라에서 아나키스트가 실명으로 나오는 영화는 훨씬 더 빨리, 그리고 훨씬 더 많이 나왔는데, 한국에서 개봉된 것은 1981년 작인 <레즈>와 1995년작 <렌드앤프리덤> 정도다. <레즈>에 엠마 골드만이 조연이지만 자주 나오는데 사실은 그녀가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레드 엠마’로 불린 만큼 그 영화 제목에 가장 적합했다. 엠마 골드만은 하워드 진이 쓴 연극 <엠마>와 그 영화에서도 볼 수 있고 뮤지컬 <레그타임>과 <어세신>에도 나왔다. 일본에서도 아나키스트들을 다룬 연극과 영화는 많은데, 그 중에 이토 노에(伊藤 野枝, 1895~1923)도 자주 등장한다. 이토를 다룬 전기나 논문이나 소설은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다.   

여성해방운동가이자 아나키스트이자 번역가인 이토는 동거하던 아나키스트 오스기 사카에(大杉 栄, 1885~1923)와 함께 1923년 관동대지진 직후 아무런 이유도 없이 군인들에게 비참하게 살해당했다. ‘국가적 편견과 민족적 증오 없이 한·일 양 국민이 진정으로 융합하는 사회를 만들자’며 박열을 비롯한 재일 조선인들과 흑도회(黑濤會)를 만들고, 의열단의 지도자 김원봉과 도쿄에 의열단 지부를 설치할 것을 합의하기도 한 오스기가 수많은 조선인들과 함께 관동대지진 직후 살해된 것은 우연의 일치라고 보기 어렵다.

이토 노에(伊藤 野枝, 1895~1923). 출처=위키피디아

일본의 여성 아나키스트, 이토 노에

살해당하기 10년 전인 1913년 18세의 이토는 미국의 아나키스트 엠마 골드만의 전기를 읽고 골드만처럼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1913년이면 골드만이 44세였으니 그 전기란 기껏 그녀의 30대 말까지를 다루었을 것이다. 그해 이토는 엠마의 <여성해방의 비극>을 번역해 <청답>이라는 잡지에 발표하고 이듬해 더 많은 글을 번역해 <여성해방의 비극>이라는 제목으로 단행본을 냈다.

87년 전의 이토에게는 골드만의 글이 저주이기커녕 축복이었다. 당시 이토는 아버지가 정해준 결혼을 마다하고 가출하여 여고 때 영어 선생으로 만난 아나키스트 츠지 준(辻潤, 1844~1944)의 집에 들어갔을 무렵이었다. 이토의 여고 마지막 학년인 1911년 4월에 츠지는 그 여고에 왔고, 이토는 바로 그에게 빠졌다. 이토는 여고 졸업 후 미국에 갈 생각으로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지만 상대가 미국에 갈 수 없게 되자 가출을 하고 츠지에게 도망쳐 아들을 낳고 이듬 해 골드만의 글을 번역했다. 그리고 <걸인의 명예>라는 소설에서 주인공을 골드만으로 그리고 둘째 아이의 이름을 엠마라고 짓는다. 김복순은 골드만이 1913년 8월 일본을 방문하고 일본 아나키스트들에게 매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고 하지만(김복순, 조선적 특수의 제 방법과 아나카 페미니즘의 신여성 계보, 나혜석의 경우, <나혜석연구>, 2012.)이 있지만 믿을 수 없다.

1915년 이토는 발매금지 처분으로 경영난에 빠진 <청답>을 인수하여 ‘무주의, 무규칙, 무방침’을 방침으로 삼고 엘리트여성만이 아니라 일반 여성에게도 지면을 개방하고, 그 잡지를 문에 중심으로 여성해방 중심으로 바꾸었다. 동시에 중류여성들의 성매매 철폐운동을 성매매 여성에 대한 몰이해에서 나온 위선이라고 비판하고, 오스기 사카에와 불륜에 빠진다. 빈곤과 감시 하에서 1918년 <문명비판>, 1919년에 <부인해방>을 오스기와 공동으로 창간하고 크로포트킨 연구>, <빈핍의 명예>, (두 사람의 혁명가> 등을 공저하면서 4명의 자녀를 낳았다. 1920년 <여성노동자의 각성>과 결혼제도를 부정하는 글을 썼다.

 

나혜석(1896~1948). 출처=위키피디아

국가와 자본보다는 가부장제를 비판한 나혜석

나혜석(1896~1948)은 골드만이나 이토와 달리 철저히 비정치적이고 비사회적인 길을 간다. 따라서 “젠더 범주에 착목한 결과, 나혜석은 아나키 페미니즘이라는 새로운 보편담론의 창시자로, 사상가로, 근대여성지성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같은 글, 7쪽)고 하는 주장은 지극히 의심스럽다. 이러한 주장은 골드만이 <여성해방의 비극>이라는 글에서 말한 “여성은 내적 개혁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골드만, 227쪽)라고 한 것을 “제도 개선보다 자각, 수양, 자기 혁신이라는 여성 자신의 ‘내적 개혁’을 강조한다는 점에서”(같은 글, 32쪽) 나혜석이 말한 바와 통한다고 보는 것을 하나의 근거로 삼는 점에서도 문제다. 골드만은 그 글에서 ‘자각, 수양, 자기 혁신’을 ‘내적 개혁’이라고 보지 않았다. 그녀가 위 문장 앞에서 여성이 자신의 힘으로 참된 해방을 쟁취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그녀가 말하는 ‘내적 부활’(inner regeneration)이다. 이는 골드만이 <여성투표권>에서 말한 다음 다섯 가지의 “여성 자신의 삶의 질의 향상”, “여성의 발전과 자유와 독립”이다.

 

  1. 여성 자신을 성적 상품이 아닌 인격체로 주장할 것
  2. 자신의 몸을 마음대로 하려는 자를 거부할 것. 즉 여성 자신이 원하지 않으면 임신을 거부하라.
  3. 국가, 사회, 남편, 가족에 대한 복종을 거부하라.
  4. 삶을 보다 단순화하고 싶고 풍요롭게 하라
  5. 모든 영역에서 삶의 의미와 본질을 배우려고 애쓰고 여론과 대중적 비난을 두려하지 마라.(저주받은 아나키즘, 213쪽)
     

골드만이 그런 부활을 통해 여성해방을 이루고자 아나키스트로서 국가와 자본과 가부장제에 철저히 반항했다. 이토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나혜석을 아나키스트로 볼 수 있을지도 의문이고 그녀에게 가부장제는 비판의 대상이었지만 국가와 자본은 문제가 아니었다.

골드만는 1960년대 서양에서 체 게바라처럼 티셔츠에 자주 그려지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지금도 게바라는 물론 골드만의 얼굴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기커녕 그 얼굴조차 모른다. 엠마의 얼굴만이 아니라 “춤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다”라는 엠마의 말이 적힌 티셔츠도 많았다. 그 전부터 쏟아져 나온 엠마에 대한 책들도 우리와는 무관했다. 2001년에 엠마의 저서가 처음 번역되고 2008년에 최초로 전기가 번역되어 나왔지만 이 글을 쓰는 2023년까지 그 두 권이 전부다. 여성의 해방커녕 그 지위조차 세계 최하 수준인 한국이지만 뛰어난 페미니스트 또한 매우 많아서 엠마 평전이 당연히 나오리라고 기대했었다. 그러나 한국에는 여전히 남녀평등이 문제이고, 게다가 그것을 국가-자본-종교와 관련되어 근본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래서 지금도 골드만은 여전히 중요하다.

 

 

박홍규 영남대 명예교수‧저술가

일본 오사카시립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 영국 노팅엄대, 독일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연구하고, 일본 오사카대, 고베대, 리쓰메이칸대에서 강의했다. 현재는 영남대 교양학부 명예교수로 있다. 전공인 노동법 외에 헌법과 사법 개혁에 관한 책을 썼고, 1997년 『법은 무죄인가』로 백상출판문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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