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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정선의 그림 선생
겸재 정선의 그림 선생
  • 김재호
  • 승인 2023.06.13 15: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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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현 지음 | 들녘 | 392쪽

겸재의 금강산 그림에는
정치가 들어 있다

『추사코드』(2016년, 2017년도 세종우수교양도서)와 『추사난화』(2018)로 기존 미술사학의 추사 작품 해석에 대해 전복顚覆적 문제제기를 했던 화가 이성현이 겸재 정선의 작품을 다룬 『노론의 화가, 겸재 정선』(2020)에 이어 겸재의 금강산 그림들을 천착穿鑿하는 책을 내놓았다.

겸재가 그려낸 금강산 그림의 배경과 함의를 들추어내는 작업이다. 화제시는 물론이고 그림 속에 심어놓은 힌트들을 세심히 추적하여 기존 미술사가들이 곡해했거나 놓치고 있는 역사적 사실들을 밝혀낸다.

선비들의 그림은 사의성寫意性을 가장 중요시한다. 옛 선비들은 그림 속에 자신의 생각을 타인과 공유(소통)할 수 있는 장치를 따로 마련해두기도 했다.

이런 그림들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선비의 고고한 품격’이니 하는 따위의 말로 얼버무리는 기존 해석의 주박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선비의 품격이란 무엇인가? 선비다움이다. 선비는 시대를 선도하는 지식인이자 행동하는 양심이다. 선비의 품격이란 시대의 문제를 직시하고 적절한 대응책을 제시하여 보다 나은 세상을 이끌어내고자 노력하는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는 어떤 형태로든 정치적 행위와 연결되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오늘날 미술사가들은 한사코 조선 선비들의 그림을 정치적 행위의 일환으로 보려 하지 않는다. 동양화는 보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이라 했다.

표현 대상의 외형이 얼마나 잘 닮게 그려졌느냐를 평가하기보다는, 그 그림 속에 선비의 어떤 생각이 들어 있는지를 읽으라는 뜻이다. 이를 위해서는 선비의 그림에 사용된 특유의 조형어법과 당대 지식인들 사이에 공유되고 있던 한시 및 사서삼경을 비롯한 동양 고전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겸재(1676-1759)의 화명?名이 조선 팔도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신묘년풍악도첩》이 그려지면서부터였다. 그가 서른여섯 되던 해 노론 강경파 장동 김씨 삼연 김창흡(1653-1722)의 제5차 금강산 여행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제작된 그림첩이다.

삼연 김창흡은 누구인가? 벼슬길에 나서지는 않았지만, ‘호락논쟁湖洛論爭’의 한복판에서 낙론을 이끌었던 노론의 대표적인 이데올로그이다. 그이만큼 금강산 여행을 자주 한 사람도 없었는데, 이유는 금강산 자체보다는 그곳에 깃들어 있는 사찰(승려)과 관련이 있었다.

이 책의 1부 “금강산 만이천봉을 모두 부숴버리고 싶지만”에서 볼 수 있듯, 당시 노론은 불교계의 힘을 통제해야 할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었다. 즉, 조정에서 밀려난 남인과 소론 인사들이 금강산 불교계를 자극하여 연합 세력을 결성하면 큰 화근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휴정 서산대사가 승병을 조직하도록 하여 계명을 어기면서까지 살육전쟁(임진왜란)에 뛰어들게 한 후 의승병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보상을 약속받고 전란에 뛰어든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내심 불교계에 대한 조정과 사대부들의 인식이 바뀌길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바뀐 것은 하나도 없고, 오히려 승병들의 힘을 직접 목격한 조정과 사대부들은 승려들을 깊은 산속으로 몰아넣고 산문 출입을 엄히 통제하였다.

이에 원망이 가득 찬 승려들이 어떤 계기로 정치적 변수가 될 개연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정치적 입장이야 어떻든, 백헌 이경석, 번암 채제공, 표암 강세황 등의 금강산 시詩들이 그곳 사찰(승려)을 암유하고 있는 이유이다.

김재호 기자 kimyital@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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