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7 08:15 (토)
[21세기를 위한 교수사회] 이것만은 버리고 갑시다 <5>부도덕한 출판 관행
[21세기를 위한 교수사회] 이것만은 버리고 갑시다 <5>부도덕한 출판 관행
  • 안길찬 기자
  • 승인 2001.08.13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01-08-13 17:30:07
서울산업대는 올해 초 사회체육학과의 신임교수 임용을 싸고 진통을 겪은 바 있다. 임용후보 중 한 대상자가 제출한 일부 연구저서에 대해 부정출판과 표절의혹이 불거졌기 때문이었다. 논란 끝에 임용된 김 아무개 교수가 제출한 연구저서 중 ‘체육실기지침서’와 ‘체육기초이론’은 각각 27인 편저와 12인 공저로 이미 시중에서 팔리고 있던 책들이었다. 그런데 아무런 내용의 변화도 없이 제목이 한문에서 한글로 바뀌고, 2인 공저로 둔갑해 심사에 올랐던 것.

일부 교수들의 문제지적이 잇따랐지만 대학은 “김 교수가 저서출간에 참여했고, 다른 저자들의 동의를 구했을 뿐더러 관련학계의 검증을 거쳤기 때문에 절차상 문제는 없다”고 결론짓고 김 교수를 임용했다. 하지만 같은 학과의 박 아무개 교수는 “해당 저서는 김 교수가 출판사와 담합해 업적심사에 제출하기 위해 편법으로 급조한 것”이라며 수 개월째 관계기관에 민원을 제기하고 있다. 박 교수가 주장을 굽히지 않고 있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표지만 다를 뿐 내용은 똑같은(심지어 인쇄 연월일도 똑같은) 27인 편저와 2인 공저가 어떻게 시중에서 함께 팔릴 수 있느냐”는 것이다. 박 교수는 “문제가 표면화되자 해당 출판사가 27인 편저로 발행한 저서를 부랴부랴 수거했다”면서 저자와 출판사와의 뒷거래 의혹을 제기했다. 논란이 확대되자 대학은 진상조사까지 벌였지만 “절차상 하자가 없고 우리의 출판관행에 비춰 가능한 일”이라며 사태를 마무리 지었다.

저서출판 만큼 교수들이 공을 들여야 하는 일도 드물다. 교수가 그려낸 학문활동의 족적은 결국 저서를 통해 빛을 발하고 검증을 받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또한 저작출판 만큼 교수들이 자주 구설수에 오르내리게 되는 일도 드물다. 가장 자주 접하는 것은 역시 ‘표절’이지만 그밖에도 금전을 둘러싼 비리, 업적쌓기를 둘러싼 비양심적 출판 등 여러 구설수들이 교수사회 한 켠에 머물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27인 편저가 2인 공저로 둔갑

저서출판의 부도덕한 행태는 출판사와의 모종의 관계에서 이뤄지는 부분이 적지 않다. 부끄러운 흔적이긴 하지만 기억을 되돌려보자. 지난 94년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던 일부 교수들의 교재채택료 수임비리 사건은 풍문으로 떠돌던 교수와 출판사간의 뒷거래를 밖으로 드러냈다. 특정출판사의 책을 교재로 채택해 주는 대가로 출판사로부터 뒷돈을 받아온 54개 대학 92명의 교수들이 검찰에 적발돼 3명이 구속되고 10명이 기소된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교수사회의 도덕성은 또 한번 도마에 올라야 했다. 최근까지 학술전문서적을 중점적으로 발간하고 있는 H출판사에 근무했던 김 아무개 씨는 “교재채택료는 교재출판업계의 오랜 관행이다. 과거 보다 많이 줄어들긴 했지만, 지금도 특정 출판사를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번져있는 것이 사실이다”라며 “대학교재 중 상당 비율이 출판사와 교수와의 뒷거래 속에서 출간된다”고 증언했다. 대학원생들이 운영중인 C출판사의 허 아무개씨의 전언도 저서출판의 어두운 단면을 드러낸다. “교수들이 원고를 맡기면서 가장 먼저 덧붙이는 것이 바로 ‘교재로 사용할 것’이란 얘기다. 이는 곧 어느 정도 수익이 보장된다는 뜻으로 알아서 판단하라는 것에 다름아니다”고 밝혔다.

특히 최근 들어 업적평가가 강화되면서 교수들의 저서발행의 비윤리적 행태는 과거와는 사뭇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는 것이 출판관계자들의 말이다. C출판사의 허씨는 “재임용과 승진심사에서 연구업적이 강조되면서 교수들이 저서출간에 상당한 압박감을 느끼는 것 같다”며 “최근 들어 교수들의 저서출판 의뢰가 부쩍 늘고 있으며, 심지어 직접 원고를 들고 찾아오는 경우도 있다”고 설명했다. 실제 최근 거론되는 비뚤어진 출판관행은 업적평가와 상당한 연관성을 맺고 있다. D출판사의 한 관계자는 “일부 교수들은 몇몇 논문을 짜깁기한 원고를 들고 와 출판의뢰를 하기도 한다. 출판사는 이를 악용해 수익을 올릴 목적으로 책을 미리 만들어 놓고 명망있는 교수들의 이름만 빌려 책을 출간하기도 한다”고 밝혔다.

후학논문을 짜깁기해 출판하기도

심지어 연구비를 지원받은 교수의 결과보고용 저서만 전문적으로 만들어 주는 출판사도 생겨나고 있다고 한다. 영남대의 최 아무개 교수는 “연구비를 지원받고도 이렇다할 결과물을 내지 못한 교수들이 곧잘 이름없는 출판사에 의뢰해 저서를 만드는 경우를 보게 된다”며 “학자의 양심을 저버리는 비윤리적인 행위”라고 꼬집었다. 이런 그릇된 행태가 번져가자 학술진행재단을 비롯한 일부 연구지원기관에선 논문의 전문학술지 게재를 의무화하거나, 아예 특정 출판사를 지정해 주기도 한다.

저서간행에 관련된 또 하나의 그릇된 관행은 발행일자를 임의로 조작하는 경우이다. 서평전문지인 ‘출판저널’ 기자를 지낸 최성일씨는 “근래 학술서적 중 발간시기보다 발행일자가 앞당겨 기재되는 경우가 늘고 있다”며 “이는 교수들이 업적출판 기간을 임의로 짜맞추기 위한 편법으로 출판사와의 담합속에 이뤄지는 경향이 짙다”고 지적했다.

교수사회 내부에도 그릇된 출판관행은 잔존한다. 과거엔 교수들간의 담합에 의한 교재 출판도 적지 않았다. 연세대 유 아무개 교수는 “지역대학 교수들이 공동으로 저서를 집필하고 각기 자기 지방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교재를 출판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전한다. 비근한 예이긴 하지만 구설수에 오르는 표절논란의 상당부분이 제자의 논문을 베껴 쓴 부분이란 점도 그릇된 출판관행의 단면이다. C출판사의 허 아무개 씨는 “후학들의 리포트나 논문을 짜깁기해서 출간된 책도 적지 않다. 다만 학계가 침묵하고 있을 뿐”이라고 잘라 말했다.

연구의 질을 끌어올리겠다며 한해 몇 편씩의 논문을 요구하는 대학의 풍토는 오히려 연구의 양만 늘리고 질 낮은 논문의 양산을 불러오기도 한다. 최근 교수들의 저서출간이 활발한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 점에서 보면 과도한 업적생산 요구가 저서출판의 그릇된 관행을 낳고 있는 원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선행돼야 할 것은 교수의 도덕성이다. 또 하나 교수들이 이러한 출판관행에 대해 무감각하거나 너무 관대한 것은 아닌지도 꼭 되새겨 봐야 할 부분이다. 부도덕한 출판관행을 줄여가기 위한 제도적 방안은 무엇보다 저서에 대한 엄정한 평가시스템이 작동돼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지적이다. 비판적 서평문화를 정착되고, 이를 통해 제대로 된 검증이 이뤄질 때만이 그나마 그릇된 관행을 깨는 올바른 관행이 마련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안길찬 기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