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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동향] 라인하르트 코젤렉(1923~2006)의 타계에 부쳐
[해외동향] 라인하르트 코젤렉(1923~2006)의 타계에 부쳐
  • 박근갑 한림대
  • 승인 2006.09.09 01: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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槪念史 연구의 기원 … ‘궁핍한 시대’의 풍성함

개념사 이론의 창안자인 라이하르트 코젤렉의 올 2월 타계 소식이 국내에 뒤늦게 알려졌다. 그로부터 배우거나 영향을 받은 국내 학자들은 꽤 있지만 미처 소식을 접하진 못했다. 한림대에서 개념사 사전 작업에 참여하고 있는 박근갑 교수가 코젤렉이 남긴 학문적 업적을 짚어 보았다. 국내에서는 서양사학회가 뒤늦게나마 오는 9월 23일 추모발표회를 개최할 예정이다. / 편집자주

올해 2월 3일 세계 역사학계는 한 거장을 잃었다. 한국에서 그의 이름은 조금 낯설지 모르지만, 저명한 문화학자 헤이든 화이트의 말대로 그는 지난 세기에 역사학을 빛낸 ‘가장 탁월한 이론가들 가운데 한 인물’이다. 그는 독일 역사학자 라인하르트 코젤렉(Reinhart Koselleck)이다.

뢰비트, 하이데거 등 사숙

오늘날 독일 인문학의 최대 성과로 손꼽히는 개념사 사전 ‘역사적 기본개념’을 처음부터 이끌고 마무리하면서 이름을 드날린 만큼이나 그의 학문생애도 이채롭다. 그는 하이델베르크에서 뢰비트와 가다머로부터 역사철학과 해석학을 배웠으며 하이데거를 사숙했다. 이런 점에서 그가 랑케와 마이네케의 대를 잇는 역사주의 역사학의 한 가운데에 섰어야 마땅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세기를 넘어 풍미했던 ‘주류사학’의 그늘 속에 편안히 머물지 않았다. 1967년에 그의 이름을 유럽 학계에 널리 알린 교수자격 시험논문 ‘개혁과 혁명 사이의 프로이센’은 전통 역사학의 경계를 뛰어넘어 새로운 사회사 영역을 탐사한 저술이었다. 이어서 그는 곧 신설된 빌레펠트대의 역사학과 창설에 참여하고 여기에 장차 ‘빌레펠트 학파’로 알려질 ‘젊은’ 사회사가들을 불러 모았다. ‘역사적 사회과학’의 기치 아래 고전적 역사주의와 대결했던 이들이 오늘날 독일 역사학계의 ‘新정통’ 헤게모니를 이룬다.

그렇지만 그는 이들과 같은 길을 걷지 않았다. 그는 무려 25년에 걸쳐서 1백여 명이 넘는 학자들과 더불어 개념사 사전을 편찬하고 수많은 학술지의 편집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지만 어떠한 학파도 만들지 않았다. 최근에 이르러 ‘언어적 선회’ 기류 속에서 그의 개념사 이론을 푸코나 데리다의 포스트모더니즘에 겹치려는 경향이 있었으나, 그는 그러한 문화주의와도 명백한 선을 그었다.

그렇지만 그는 어느 평자들의 말대로 “홀로 서면서도 여러 경계에 걸친 인물”이었으며, “위대하고도 성공적인 아웃사이더”이기도 했다. 왜 그를 뒤늦게나마, 그리고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도 추도해야만 하는가. 널리 알려진 대로 그는 현대적 개념사 이론을 창안했으며 이를 기념비적인 ‘역사적 기본개념’으로 체현한 인물이다. 그러나 그의 공적은 여기에만 있지 않다. 그의 이론과 실천연구는 ‘18세기 철학자’라는 별칭에 걸맞게 여러 학문영역을 넘나들고 있다. 이 짧은 글이 어떻게 그의 모든 지적 세계를 일별이라도 할 수 있겠는가. 우리 학계에도 절실하게 요청되지만 아직도 처녀지로 남아있는 개념사 연구의 지평에서 그를 잠깐 다시 만나보자.

코젤렉의 기본명제는 개념이란 사회적, 정치적 변화의 지표이면서 동시에 그 요소가 된다는 점에 자리하고 있다. 구체적인 시대상황에 담긴 지속, 변화, 미래성의 계기들을 개념 의미를 통하여 추적함으로써 사회상의 변화를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언제부터 어떠한 개념들이 역사적 저류의 지표와 요소가 되었는가, 라는 질문이 개념사 연구의 핵심과제이다. 옛 언어들이 새로운 의미를 획득하고 신조어들이 등장하면서 ‘의미론적 투쟁’이 전개되는 위기상황이 그러한 시점에 해당한다. ‘근대’라고 명명되는 시기가 곧 그것이다. 이때부터 개념정립을 둘러싼 갈등이 사회적·정치적인 파괴력을 보인 것이다. 유럽 역사에서 보면 프랑스 혁명 이후에 이 투쟁은 첨예화되었다는 설명이다.

1백여명 학자 이끌며 개념사 사전 펴내

코젤렉은 이런 근대 운동개념의 동학을 추적하기 위해 ‘경험공간’(Erfahrungsraum)과 ‘기대지평’(Erwartungshorizont)이라는 새로운 인식범주를 창안했다. 그의 설명은 대강 이러하다. 경험은 사건들이 인간의 의식 속에 섭취되고 기억될 수 있는 현재적 과거이다. 기대 또한 현재 속에서 이루어지며, 현재화된 미래로서 경험되지 않은 것을 지향한다. 경험은 그 속에서 이전 시대의 많은 층위들이 이전과 이후 없이 동시에 드러나기 때문에 공간적이다. 이와는 달리 기대는 지평으로 열려있다.

그것은 아직은 볼 수 없는 새로운 경험공간을 나중에 열어주는 선을 의미한다. ‘근대’에 이르면 경험과 기대 사이의 차이가 점점 커진다. 다시 말해서, 기대들이 그때까지의 경험들에서 점점 멀어지면서 이때가 ‘새 시대’로 파악된다. 이때부터 개념들이 점점 추상화되어 지나간 기억을 불러오기보다는 다가올 미래를 미리 상기시키는 이데올로기로 고양되는 과정에서, 경험은 공간에 갇히고 기대는 지평으로 향한다. ‘공화주의’(Republikanismus)를 하나의 예로 보자.

객관과 주관 넘어선 경계에 홀로서기

칸트는 처음으로 여러 정체들 중의 하나였던 ‘공화제’(Republik)를 그의 ‘실천이성’에서 도출하여 인류사회의 지속적인 목적으로 형상화하면서, 거기로 가는 과정을 새롭게 ‘공화주의’로 지칭했다. 이 용어는 이후로 ‘진보’라는 추상적 기대를 정치적 행동공간에서 수행하는 ‘운동개념’이 되었다. 이로써 하나의 상태를 가리켰던 예전의 ‘공화국’이 ‘주의’라는 어미를 통해 목적으로 전이되었던 것이다. 이 개념은 다가오는 역사적 운동을 이론적으로 선취하면서 실천적인 영향을 끼쳤다. 전승된 모든 통치형식들의 경험공간과 아직은 멀리 보이는 정치체제의 기대지평 사이에서 벌어진 시간적 차이가 개념화되었던 것이다. ‘근대’의 정치적, 사회적 개념들이 그렇게 역사적 운동의 조종간이 되었다.

코젤렉은 이렇듯 객관주의와 주관주의, 구조와 문화, 그리고 사실과 언어 사이의 해묵은 역사연구 경계선에서 홀로 서기를 자처하였다. 그의 이론적 성찰이 우리 학계에 어떠한 본을 보여줄 수 있을까. 우선 개항 전후의 정치적 혼란기를 개념의미의 경험과 기대가 서로 어긋나는 위기상황으로 새롭게 조명할 수 있을 것이다. 농민전쟁, 정변, 개혁, 쇄국 등의 사건들이 혼재된 이 시기야말로 역사적 시간체험과 미래의 도전을 함축하고 있는 수많은 텍스트들이 분출하던 시대이다. 따라서 민족사의 견지로선 ‘궁핍한 시대’가 풍성한 개념의 시기로 바뀔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 개념사 사전 편찬도 시급한 시대적 과제라 할 것이다.

박근갑 / 한림대, 독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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