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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 디킨슨 시 선집
에밀리 디킨슨 시 선집
  • 최승우
  • 승인 2023.05.16 15: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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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 디킨슨 지음 | 조애리 옮김 | 을유문화사 | 308쪽

내면으로 침잠하여 지상의 환희로 나아간 시인
에밀리 디킨슨의 대표 시 선집

19세기 문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거장 가운데 한 명인 에밀리 디킨슨은 아버지 에드워드 디킨슨의 교육열 덕분에 당시 여성으로선 드물게 정규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발병으로 애머스트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마운트 홀리요크 여성 신학교에 입학한 지 10개월 만에 고향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이후 그녀는 어머니의 병상을 지키며 시를 썼다. 생전에 발표한 시는 몇 편 안 되지만 1886년 디킨슨이 죽은 후 여동생 라비니아가 그녀의 시를 발견하고 공개하면서 대중에 널리 알려졌다.

그녀의 시 세계에서 가장 주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는 연대기적 시간의 중단으로 영원의 옹호나, 유한도 영원도 아닌 임시적 정지이다. 하지만 아감벤의 관점에서 보면 디킨슨의 시에 나타나는 시간의 중단은 영원이나 임시적 정지가 아닌 새로운 시간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 시간은 순간적으로 포착하지 못하면 영원히 지나가 버리는 행복한 순간이자 가능성으로 가득 찬 세계다. 디킨슨에게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연대기적 시간의 중단은 영원으로 가는 출발점이 되고, 여기서의 중단은 파괴인 동시에 해방을 가져오는, 완벽한 향유가 가능해지는 순간이다.

이러한 향유의 시간을 디킨슨은 기적이라고 부르며 죽음에서 그 작은 틈을 엿본다. 그에게 죽음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중단으로 인해 메시아가 들어올 수 있는 작은 문이 생기고, 인간이 기원의 상태로 돌아가 부활할 수 있는 계기다.

특히 그녀의 문학 세계에서 주요한 주제인 중단에서 주목할 점은 이러한 단절이 파괴인 동시에 구원이라는 것이다. 시는 이러한 중단을 드러내기에 가장 적합한 매체이며, 디킨슨의 경우 줄표와 행 바꾸기를 사용해 효과적으로 이를 표현하고 있다.

상실과 분열이 아닌
탈주의 욕망으로 가득 차 있는 시

에밀리 디킨슨의 시에서 보이는 또 하나의 특징은 부재와 상실, 포기의 관념이다. 심지어 자아 분열을 디킨슨 시의 특징으로 보는 비평가도 있다. 하지만 들뢰즈의 관점에서 해석할 때 디킨슨의 시는 상실과 분열의 시가 아니라 탈주의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

디킨슨은 시에서 종교와 결혼은 견고한 억압의 상징인데 종교의 억압성은 겨울 오후의 빛으로 표현되고 결혼은 대가가 핵심을 이루는 계약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이처럼 영원해 보이는 제도들이 늘 견고할 수는 없다. 견고한 체계에는 유동적인 미시 균열이 생긴다.

그것은 견고한 위계질서를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균열을 일으켜 해체하려는 시도를 보여 준다. 그리하여 디킨슨의 탈주는 역량이 증강된 에너지로 나타나고, 그동안 갇혀 있던 영혼은 견고한 배치를 완전히 벗어나 탈주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하지만 이 탈주가 항상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탈주가 퇴행함으로써 오히려 기존의 제도와 구속을 더 강력하게 만들기도 한다. 마침내 탈주에 성공하면 종교와 결혼 같은 제도를 파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배치를 만들어 낸다.

『에밀리 디킨슨 시 선집』은 시인이 남긴 1,800여 편의 시 가운데 이러한 디킨슨의 작품 세계를 대표하는 것들만 엄선해서 실었다. 이 책에 담긴 시들은 매우 간결하면서 이미지즘적이며 추상적인 사고와 구체적인 사물을 결합한 것이 특징이다.

시간에 갇힌 인간 의식의 한계에 대한 고통스러운 역설을 일깨우는 디킨슨의 시 세계는 오늘날에도 수많은 독자들로부터 공감을 얻으며 향유되고 있다.

최승우 기자 kantmania@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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