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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마음, 강한 사람, 강한 삶
강한 마음, 강한 사람, 강한 삶
  • 김월회
  • 승인 2023.05.19 10: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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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말하다_『맹자에게 배우는 나를 지키며 사는 법』 김월회 지음 | EBS BOOKS | 276쪽

일상에서 ‘수기치인’을 구현하는 ‘강한 이’
세상과 어긋나도 즐겁게 하늘의 뜻 실천

맹자는 ‘강한 이’다. 『사기』를 완성한 사마천에 의하면 맹자는 자신을 중용해 줄 군주를 찾아다녔지만 어디서도 왕도정치를 주장한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낙담하거나 좌절하지 않았다. 꿋꿋하고 당차게 자기 뜻을 펼칠 곳을 다시 찾았고, 노년이 되자 고향으로 돌아와 저술과 강학에 전념했다. 

 

맹자는 기원전 372년부터 기원전 289년까지 살았다. 향년 83세. 그림=위키백과

이는 세상이 받아주지도 않고 늙기도 했으니 물러나 책이나 쓰고 아이들이나 가르치자는 체념의 소산이 아니었다. 저술을 하고 후학을 가르친다고 함은 글과 사람을 통해 미래를 준비하고 빚어간다는 뜻이다. 소극적 삶의 태도가 결코 아니었다. 현세에서는 자신의 뜻을 구현하지 못했지만 미래에서는 그 실현 가능성을 높이는 능동적 행위다. 

부국강병을 욕망하는 시류와 엇나가 배척되었지만 굴하지 않았고, 늙음이 심신을 쇠약케했지만 그에 맞섰기에 가능했던 삶이었다. 그야말로 강한 이어야만 가능한 삶의 궤적을 그려냈다. 그러니 이러한 물음이 절로 든다. 도대체 맹자는 어떻게 그러한 강함을 지닐 수 있었을까? 필자의 책은 이 물음의 답을 구성하고자 맹자의 삶과 사유를 다시 읽어본 결과다.

여기서 맹자의 강함을 그가 타고난 기질 덕분이라고 하면 무척 싱거운 답이 된다. 그럴 가능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니겠지만, 타고난 기질이 강하다고 하여 자동적으로 맹자 같은 삶을 사는 건 아니다. 그러면 무엇이 그와 같은 삶을 가능케 했을까? 

그 답의 하나는 ‘강한 마음’의 구축이다. 맹자에 따르면, 마음은 하늘이 사람에게 부여한 것이고 거기에는 하늘의 본성이 깃들어 있다. 그리고 하늘의 본성은 다름 아닌 인의예지 같은 도덕이다. 그가 보기에 사람은 신분에 관계없이 누구나 이러한 하늘의 본성을 마음에 타고 태어난다. 하여 마음을 온전히 알면 하늘도 온전히 알게 된다. 

그 결과 인의예지 같은 도덕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하늘의 것을 인간에게 내려준 것임을 알게 된다. 이러한 도덕을 맹자는 ‘천작(天爵)’, 곧 하늘이 내려준 벼슬이라고 규정했다. 따라서 도덕을 행함은 하늘에 등용된 것이 된다. 하늘이 삶을 영위하는 기반이 된 것이다. 하늘로부터 발원된 도덕이 권력이나 재력을 지니지 않았어도 사람의 마음을 충분히 강하게 만들어주었음이다. 

이로써 사람은 누구나 ‘강한 이’가 될 수 있다. 사람은 하늘의 본성을 부여받은 존재이기에 누구나 다 천민(天民), 곧 하늘의 백성이다. 강한 이는 무슨 특별한 역량을 타고난 존재가 아니라, 자신이 천민임을 자각하고 그 바탕 위에서 ‘자반(自反)’, 그러니까 자신을 돌이켜보며 도덕적 정당성을 쌓아가고, 이를 타인에게 확충해감으로써 사회의 교화를 이루고자 하는 이다. 

 

맹자가 강조한 “자신을 닦고 타인을 다스린다”라는 수기치인의 삶을 명실상부하게 구현해가는 이가 바로 강한 이인 것이다. 이들은 ‘강한 삶’을 일상 차원에서 펼쳐낸다. 필요하다면 역성혁명 (세습되는 왕조가 새로운 왕조로 바꾸는 일)에도 당당히 나선다. 하늘의 본성인 타고난 선함을 실현하기에, 또한 나만 홀로 선하게 사는 삶이 아니라 세상이 더불어 선하게 살아감을 지향하기에 그러하다. 

게다가 사람은 군주의 백성이기 전에 하늘의 선함을 지닌 하늘의 백성이니 도덕을 해치는 군주를 축출함은 명명백백하게 정당하다. 성선설은 이렇듯 역성혁명의 윤리학적 근거였다. 강한 삶이 능동적인 이유도 여기서 비롯된다. 세상이 지향하는 바와 자신이 지향하는 바가 달라도 자기 삶을 하늘이 보증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맹자의 내면에는 한탄이나 낙담, 좌절 같은 것이 똬리 틀지 못했고, 하늘의 뜻을 실천함에서 비롯되는 즐거움이 자리 잡고 있었다. 즐거움은 이렇듯 맹자가 세상과 엇나가는 삶을 줄곧 살았음에도 자기 삶을 능동적으로 일구어낼 수 있었던 내적 동력이었다.

오늘날은 더는 개천에서 용 나는 시대가 아니라는 진단처럼, 기울어진 운동장이니 금수저니 하는 지적처럼, 외적 요인이 ‘나’의 삶을 좌우하는 힘이 갈수록 크고 강해지는 시대다. 이러한 삶의 조건에서 나의 삶을 나의 뜻대로 꾸려가기 위해서는 ‘나’의 내면을, ‘나’ 자신을, 또 ‘나’의 삶을 강하게 구축해야 할 필요가 있다. 2천300여 년 전, 맹자가 살아낸 말과 행적이 여전히 의미있는 까닭이다.

 

 

 

김월회 
서울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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