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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현실주의 아닌 ‘인본주의’ 문학을 펼치다
사회주의·현실주의 아닌 ‘인본주의’ 문학을 펼치다
  • 박태일
  • 승인 2023.05.04 08: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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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의 절명시 ‘물길 따라’

봄부터 ‘한국 지역문학의 옹이와 결’이라는 기획으로 전주 지역 계간지 <문예연구>에 연재를 시작했다. 그 첫걸음은 백석(1912∼1996)이 북한 문학사회에서 마지막으로 활동했던 해인 1964년의 작품 가운데서 절명시 두 편을 알리는 글로 뗐다. 1964년, 백석의 절명시 「동창생」과 「물길 따라」가 그것이다. 이 자리를 빌어 백석의 문학 생애 끝자리 발표 작품 「물길 따라」의 앞뒤 사정과 뜻을 짧게 소개한다.

 

24세 백석의 함흥 영생고보(永生高普) 교사 시절 모습이다. 박태 일 경남대 명예교수가 백석의 「동창생」과 「물길 따라」를 소개했다. 사진=위키백과

백석은 여러 가명을 썼다. 글쓴이가 굳힌 것은 리세희, 박일파(일파), 리식이다. 그 중에서 리식은 1955년 번역동화집 『동물 이야기』를 처음으로 1961년 경희극 작품평을 거쳐 1964년까지 7편의 작품에 올렸다. 각별히 1964년에는 번역 시, 기사문, 독후문과 창작 시에 걸쳐 5편에 이 이름을 썼다.

리식은 백석의 마지막을 지켜준 이름이었던 셈이다. 백석 나이 쉰세 살. 그 뒤로 이승을 뜰 때까지 서른 해를 넘는 동안 백석은 북한 문학사회에서 이름을 묻고 살았다.

「물길 따라」를 9월 8일자 <문학신문>에 올릴 무렵 백석은 평양 북쪽 먼 자강도 만포군의 압록강가 별오제재공장에서 사무원이자, <문학신문> 통신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1958년 해밑에 양강도 삼수로 첫 현지 파견을 떠났던 백석이다. 그곳에서 북한 축산 정책과 맞물린 장편 가극까지 창작했다. 그런 성과를 바탕으로 1960년 11월 무렵 백석은 평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1961년에는 함경남도 신포수산사업소로 단기 현지 파견을 다녀왔다. 그러다 1962년 하반기 만포로 다시 내려간 것이다. 그리고 성공적인 그곳 적응 사실을 알리듯, 가명이나마 두 해 만에 북한 중앙 문학사회에 작품을 선뵀다.

“저녁노을 붉게 타는 계벌장에 / 내 떼를 대이고 나서면, / 헤여짐을 아쉬워하는가, 물결도 처절썩…… / 발목을 감쓸며 모래불에 뒹구누나”로 시작하는 「물길 따라」는 일곱 토막으로 짜였다. 말하는 이는 유벌공 ‘나’다. 계벌장까지 옮겨 온 벌채목을 하류 저목장까지 끌고 가는 일을 맡은 사람이 유벌공이다. 「물길 따라」는 계류장을 떠나 압록강 물길을 좆아 떠내려 온 ‘나’가 저녁 저목장 모래불로 나서는 ‘오늘’ 이 자리를 바탕으로 삼았다.

그런 위에다 강 아래로 내려오면서 겪었던 여러 경관 변화와 그에 맞물린 감회를 혼잣말 형식에 얹은 시가 「물길 따라」다. 유벌공의 자랑스럽고도 만족스러운 노동의 기쁨이 부드러운 숨길을 탄 셈이다. 백석 후기시가 보여 준, 조곤조곤 유려한 말씨에다 특유의 개성적인 조어 역량까지 잘 담긴 작품이다. 그 무렵 북한 시의 대종이었던, 도식적인 발상에 상투적인 목소리와는 다른 고유하고도 개별적인 표현 특성이 오롯하다. 노골적인 정치 감각과도 거리를 두었다.

사회역사적 맥락에서 유벌과 유벌공이라는 글감과 주제는 비통하고도 고난스러운 겨레의 지난날을 되비추어 준다. 나라 잃은 시대, 울창한 우리 밀림에 대한 왜적의 무자비했던 대규모 산림수탈 책략과 맞물린 까닭이다. 거기다 북한 사회에서 압록강은 다른 맥락을 더한다. 김일성의 이른바 혁명 전통이 아로새겨진 곳이라는 뜻이 그것이다. 「물길 따라」는 압록강과 만포 지역이 지닌 그러한 역사 맥락이나 장소성에는 눈을 감았다. 오히려 압록강 긴 유벌의 풍광과 마주친 시인의, 타자를 향한 애정과 찬탄이 오밀조밀 옹근 맵시다.

압록강 저목장 지구, 만포군 별오 마을에서 백석은 이름과 자리를 낮춘 채 문학 생애 마지막을 견뎠다. 무명의 심지를 고요로이 마음속에 켜들었을 백석. 

절명시 「물길 따라」는 이른바 천리마 기상 드높은 북한의 사회주의·현실주의 집체 문학, 집단 문학 정치 속에서도 백석이 끝까지 실천하고자 했던 시의 중심을 가늠하게 이끈다. 곧 참과 개성이다. 압록강가를 거닐고 제재공장 사무실을 드나들며 개인 백석은 놀랍게도 인본주의와 문학의 문학다운 형식이라는, 자기식의 문학 정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셈이다.

 

 

 

박태일
경남대 명예교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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