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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과 ‘제국의식’의 사이-최남선의 ‘만몽(滿蒙)문화’론
‘친일’과 ‘제국의식’의 사이-최남선의 ‘만몽(滿蒙)문화’론
  • 강해수 계명대
  • 승인 2006.08.21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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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 대동문화연구원, <동아시아 근대지식의 형성에서 문학과 매체의 역할과 성격>( 2006년 7월 1일)

제국의 전쟁이라 함은 사람들로 하여금 다만 사후(事後)적으로 승인하고 그 의의 부여만을 말하게 하는가?-子安宣邦,「‘지나사변(支那事変)’은무엇이었던가」

1. 왜 ‘최남선’을 연구하는가?

최남선의 저작들은 식민지 시기와 해방 이후를 통해 경성제국대학 출신의 연구자를 비롯한 아카데미즘 서클부터 철저히 외면 받아왔다. 근대 조선을 통털어 기적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방대한 그의 저술들이, 지금까지도 ‘적절’한 평가 및 그 대상이 되지못하고 있는 것은 단지 그의 ‘친일’ 행위에 따른 평가절하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경성제국대학을 중심으로 한 아카데미즘의 ‘지적 네트워크’로부터는 배제되었고, 이는 그의 학문적 성격에서 기인된 측면이 적지 않다. 즉 그만의 독특한 발상과, 민속학ㆍ인류학ㆍ역사학을 비롯하여, 소위 ‘六堂學’이라 부를 수 있는 백과전서식의 학문 양식이 연구자들의 접근을 어렵게 하였다. 그러한 점에서 1939년의 그의 滿洲建國大學 행은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면서, 아카데미즘 서클 안에서 자신의 입지와 발언권을 확보할 수 있는 최선의 대안이 되었다. 더욱이 만주지역은 그가 󰡔薩滿交箚記󰡕와 󰡔不咸文化論󰡕, 그리고 일련의 <壇君論(최남선의 경우는 檀字 대신에 壇을 썼음> 등의 저술을 통해 일찍이 관심을 가져온 지역이기도 하다. 그의 건국대학 교수직의 확보는 ‘불함문화론’ 등을 비롯한 자신의 ‘학설’을 아카데미즘의 ‘지적 네트워크’ 안에서 표명할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작용하였다.

한편 최남선을 ‘친일’을 향한 최남선의 학문적 행보를 둘러싼 논의는, 주로 1920년대 중반 이후의 저작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 이에 비해 1930ㆍ40년대는 그의 저술들보다는 그의 ‘친일’적 행위를 둘러싼 논의가 대세를 이루면서, 이 시기의 작업들은 주요한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이 시기 저술들 가운데는 일본어로 쓰여 진 것들이 많았고, 더러는 소재가 불분명하거나 은폐되어온 점들이 이 시기 저술들에 대한 연구를 더디게 한 원인이 되었다. 따라서 1930ㆍ40년대의 최남선과 그의 저술들에 대한 연구는 아직까지도 미개척의 영역으로 남아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특히 그가 ‘만주국’ 성립과 중일전쟁을 어떻게 받아들였고, 만주건국대학에서 무엇을 강의하고 생각하였는지에 관해 종합적으로 검토된 바가 없었다. 이 시기의 연구를 공백으로 둔 채, 1910와 1920년대 최남선의 저작에 관한 연구들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왔다. 이러한 공백이 그의 학문을 ‘연속성’ 측면에서 조명하기보다는 1910ㆍ1920대와 달리, 1930ㆍ40년대의 최남선과 그의 학문을 ‘변절’과 ‘친일’이라는 가치척도로 평가해온 배경이 되었다. 여기에는 물론 역사의 암흑기로서의 1930ㆍ40년의 시대관이 크게 작용한다.

이 논문은 이처럼 그의 ‘친일성’의 정점에 서 있는 1930년대 이후, 특히 중일전쟁을 전후한 시기의 저작들을 고찰함으로써 ‘친일’에 대한 논의와 시선을 복합화하고, 이를 통해 민족주의 재구성을 위한 ‘친일’과 ‘반일’의 이분법적 논리를 극복해보고자 한다. 아울러 ‘친일’ 비판 논의로부터 식민지 조선에서의 ‘제국의식’의 존재를 드러내는데 문제의 시선을 돌리고자 한다. ‘친일파’들의 담론은 ‘민족주의’의 잣대로 규명하고 단죄하는 영역에만 머무르지 않고, 여기에 내재되어있는 ‘제국의식(혹은 ‘준제국의식’)’ 측면에서도 조명되어야 하는 것이다. 기실 ‘친일파청산’을 말하는 ‘민족주의’적 담론 자체가 ‘제국의식’과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해왔는가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친일파’ 비판을 통한 ‘반일내셔널리즘’의 영역에는 ‘제국’을 향한 자기 욕망 혹은 그 연장선상에 있는 요소는 없을까하는 점이다. 재일한국조선인 학자 윤건차는 ‘친일파 청산’을 둘러싼 최근 한국 내의 진보적인 견해를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논한다.

그러나 나는 친일파의 문제는 일본과 조선, 종주국과 식민지라는 구체적 관계성 속에서 다루어져 야 하고, 그 문제의 근본은 민족문제로부터 출발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친일은 친일 내셔널리즘이라 불리는 것이 아님은 물론, 민족에 대한 배신인 동시에 황국ㆍ천황제를 찬미했다는 의미에서 전체주의ㆍ파시즘에 가담한 것, 즉 인류에 대한 배신이었다고 생각한다.

“민족문제”가 “친일파 문제”에 있어서 기본원칙이 되어야 한다는 윤건차의 주장에는 수긍이 간다. 그러나 종래 “민족문제”를 강조해온 한국 내의 ‘민족주의’적 담론의 생산기제에는, 심리적으로 항상 ‘제국의식’과 결부되어온 문맥이 존재해왔음에도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특히 이러한 민족주의의 텃밭인 ‘제국의식’은 ‘자기’를 표상하는 근대 조선에서의 ‘경계’ 공간 성립과도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최남선은 근대 지식인들 가운데 특히 만주나 몽골 등에 관한 저술들을 다수 발표했다는 점에서, 본 논문은 이 지역에 대한 최남선의 ‘제국의식’이 어떻게 표출되어있는가에 관해서 고찰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특히 1930ㆍ40년대에 만주ㆍ몽골지역를 통해 표상되는 우리의 ‘새로운’ 정체성과 ‘제국의식’은 무엇이었으며, 이것이 현재 ‘동북공정’을 둘러싼 한국의 중국과의 역사전유 전쟁과 어떻게 맞닿아있는지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2. 중일전쟁과 최남선의 ‘만몽’ 인식

최남선에게 중일전쟁은 무엇이었던가? 또한 이 중일전쟁이 최남선이 이전 가지고 있었던 ‘만몽’ 인식에 어떠한 변화를 야기했는가를 고찰하는 것이 본 장의 목적이다.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중일전쟁이 최남선이 종래 가지고 있던 ‘만몽관’에 어떠한 확신감과 박력을 불러일으켰는가 하는 것이다. 즉 중일전쟁이 1920년대의 저작인 ‘薩滿교차기’나 󰡔불함문화론󰡕 등에서의 ‘만몽인식’과 어떤 연속ㆍ불연속성을 가지면서, 식민지 시대 그의 학문의 집결지라고 할 수 있는 󰡔만몽문화론󰡕에 이르는가 하는 점이다. 최남선의 중일전쟁관 고찰이 특히 중요한 것은, 그것이 현재의 ‘친일’의 논리로만 재단될 수 없는 다기의 콘텍스트가 있기 때문이다. 당시 많은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이 공통적으로 가졌던 중일전쟁관을 최남선도 공유하고 있다. 또한 중일전쟁과 관련된 논고들에 드러나는 ‘만몽’관 및 󰡔만몽문화론󰡕에서의 ‘만몽문화’의 문화론적 담론도, 현재의 ‘친일’과 ‘반일’이라는 “단일하고 균질한” 민족주의적 공간 안에서만 해독될 수 없는 다인종ㆍ다문화ㆍ다언어적 담론 공간이 교차한다.

최남선이 중일전쟁을 어떻게 수용하였는지를 엿볼 수 있는 논고로는, 1937년 7월의 중일전쟁 발발 이후에 쓰여 진 「동방민족의 중원(中原)진출과 역사상으로 본 아세아제(諸)민족의 동향」과 「北支の歴史的特殊性(上)」(󰡔재만(在滿)조선인통신󰡕제39호, 흥아(興亞)협회, 1937. 11)ㆍ「北支の歴史的特殊性(下)」(󰡔재만(在滿)조선인통신󰡕제40호, 흥아(興亞)협회, 1937. 11), 그리고 「전쟁과 교육」(󰡔삼천리󰡕제11권 제7호, 1939. 6)이 있다. 본 발표에서는 우선 「동방민족의 중원(中原)진출과 역사상으로 본 아세아제(諸)민족의 동향」의 주요 내용을 소개하는데 그치고자 한다.

이런 중에 북방민족 중 아즉까지도 중원의 무대를 밟어보저 못하고 남어잇으면서 또한 그 남방민 족의 강렬한 동화력에서 避하여 온 민족은 해양에 잇든 大和民族과 반도에 잇는 조선민족이 올시 다. 그러면 북방민족이 다 한번式 중원의 무대에서 활동을 하엿으나 그 활동이 여러 가지 원인으로 성과를 맷지 못하엿는데 현재 이 최후로 남어잇든 일본민족이 대륙을 향하야 진출하는 그 형식내 용은 前日의 북방민족의 그것과 달리 浸畧정복이 주제가 아니라 아세아민족의 전체적 번영이 주제가 되여잇기 때문에 이 일본민족을 선두로 한 동방민족의 중원 진출이야말로 동양사 上에 유례가 없는 것이라 말할 수 잇습니다. 前日 豊臣秀吉이 중원 진출의 의도를 가지고 해양에서 나오다가 마츰 조선의 반대로 그 목적을 達하지 못하엿으나 현재의 일본민족은 세계의 반대에도 굴하지 안코 거대한 발자최를 대륙으로 대륙으로 ㅅ버더오니 日淸, 日露 兩戰役과 만주사변 今回의 지나사변을 통하야 그 세력은 점점 발전 전진하야 물리가지 안습니다. 더구나 몽고인이 元朝를 건립키 위하야 허비한 年月과 일본민족이 현재의 발전까지에 허비한 시일은 대단한 차가 잇서 일본민족은 단시일 내에 大端한 성장을 보게 된 것입니다. 물론 日支事變과 같은 것은 일본이 영토적 야심을 가지고 지나를 浸畧하는 것은 결코 아니나 一個의 세력이 中元지방에 들어가고 일개의 국가가 아세아에 건립된다 하는 것은 변치 않는 사실로 볼 수가 잇습니다. 卽日 日韓合倂 만주국의 건국 등은 支那 동북지방의 민족을 합하야 일개의 덩어리가 된 일개의 세력의 연장으로서 남북 최후의 승부를 결단할 운동이 시작하엿다고 볼 수 잇습니다. 일본이 황색인으로서 백색인을 대항하는 것이라든지 동양인으로서 소련을 방위하는 것이라든지 그 유례가 없는 진보력이라든지는 이제 동양역사에 빗나는 기록을 남길 것이라고 봅니다. 여긔서 흥미잇게 생각할 것은 今番 사변에 승부는 어ㅅ더케 될가는 둘재로 支那는 老大國으로 其 민족은 노쇠하여 잇서 이제 그 민족적 생기의 보급을 밧지 안으면 안 될 것인대 이것은 역사상으로 보아 지나 이외의 민족으로서가 아니면 안될 것이다. 그런데 이미 지나의 거주하는 타민족 즉 몽고족이나 만주족은 벌서 지나에 同化되여버리엿습으로 지나민족을 淨化할 피는 朝鮮族과 아울러 日本族이 아니면 안 된다고 思考합니다. 여기서 일본 及 조선인의 발전이 如何할 것이라는 것을 엿볼 수가 잇습니다. 一方이 지나인은 이런케 노쇄하엿스나 그 문화는 융통성을 가지고 잇는 것입니다. 지나에는 본시 국가라는 일흠은 잇으나 국가라는 事實은 없는 민족입니다. 그것은 그 나라의 국경이 없는 것을 보아 알 수 엇습니다. 만주국과의 국경, 소련과의 국경, 西藏 雲南 등 他의 국경이 未分明한 것은 그들이 평소에 天下一家라는 理想 하에서 국가관념이 명확하지 못한 ㅅ가닥이라고 볼 수 잇습니다. 또한 저들의 금일의 事勢를 보드라도 잘 알 수 잇습니다. 이러한 지나에 대한 그 주위 諸민족의 감정은 여하하냐고 하면 모든 민족이 그다지 악한 감정을 가지고 잇지 안은 것입니다. 금번 사변에 際하야 조선內地에서도 시국에 대한 인식을 위하야 당국에서 주의와 강연 등을 만히 하게 되는데 대개는 민간 人心이 일본인으로서의 忠義는 다하려고 하지만 지나에 대한 악감정은 그리 심하지 안습니다. 그것은 天下一家主義의 지나의 문화가 융통성이 잇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아세아대륙에 발전 형성하려는 일대 세력을 조장하는 한 개의 힘이라고 볼 수 잇는 것이니 아모리 민족간에 協和一致하려도 그 문화의 융통성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현재의 만주건국 정신은 이리한 동양문명의 정신을 내용으로 하고 잇는 점은 실로 치하하지 안을 수 없읍니다. 이것은 평소에 늘 늣기고 또한 흥미잇게 연구하여 오든 것으로서 오늘 여러분 앞헤 간단히 진술하는 바입니다.

최남선은 중일전쟁을 통한 일본의 제국주의적 진출을, 중원지역에서의 ‘북방(동방)민족’의 진출 과정이라는 “동양역사”의 전개 과정에서 이해한다. 나아가 최남선은 당시 일본과 식민지 조선의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중일전쟁을 ‘성전’으로서 인식하고 있음을 이 논고의 다른 문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3. '不咸文化論'의 행방 - 「東方 古民族의 神聖觀念에 對하여」라는 논문

1937년 7월에 중일전쟁이 발발되고 이듬해 4월에 최남선은 󰡔만선일보󰡕의 고문이 된다. 1939년 4월부터는 만주 건국대 교수(42년 9월까지?)의 교수로 부임한다. 최남선은 부임한 직후 “만주건국대학교수 건국대학연구원연구부원” 신분으로, 「東方 古民族의 神聖觀念에 對하여」를 건국대학연구원 연구회에서 발표하고, 󰡔建國大學硏究院 康德六年度 報告報告 甲 제3호󰡕(1939年)의 소책자로 간행한다. 이 소책자 冒頭의 범례에는 “본 책자는 康德 六年 4월 17일 건국대학 연구원 전체연구회 第六回 例會에서의 속기록이다”라고 되어 있다. 특별히 이 글은 1941년 6월에 발행된 󰡔內鮮一體󰡕(內鮮一體實踐社 간행)에도 「東方古民族の神聖観念に就いて」(上)라는 일본어 문장 상반부가 실려 있으나, 후반부의 소재는 확인하지 못했다. 이 글이 이 시기에 󰡔內鮮一體󰡕 잡지에 두 번으로 나뉘어져 실린 의미도 생각해보아야 하겠지만, 이 논문에서는 「東方 古民族의 神聖觀念에 對하여」의 주요 내용을 분석하는데 우선 할애하고자 한다. 이 글은 그의 건국대학 부임과 동시에 건국대학 연구원 연구부원으로서 연구원 전체연구회에서 발표한 것이라는 측면에서, 이 시기 최남선의 생각이 잘 드러나고 있다. 더욱이 이 글은 1941년의 󰡔만몽문화론󰡕 강의로 이어지는 前史적 작업이란 점에서, 이 글의 분석은 중요하다. 최남선은 우선 글의 첫머리에서 ‘동방’이나 ‘고민족’이라는 애매모호한 학문적 개념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양해를 구한다.

금일에 있어서 亞細亞, 특히 그 동북부, 그도 古代의 거기 관한 인종학 又는 민족론이라 한 것은 아직 학문적의 정확을 가짐에 이르지 못하여 정도의 차는 있지만 어쨋던 모다 약간의 單語며 土俗을 근거로 암중모색을 試하는 상태에 불과함으로 구태여 窮屈한 限定性을 가저 본댓자 결국 대단한 것이 아니고 또 이 제목의 내용은 그것을 깊이 詮議할 필요도 없음으로 이만한 정도에서 容捨를 바라는 바입니다.

최남선은 “亞細亞의 문화”를 “印度文化”와 “支那文化”와 더불어, “東北亞細亞의 문화라거나 ‘즈란’문화라거나 ‘즌도라’주거지대의 문화, 또는 ‘스키-드, 시베리아’문화 등”을 포괄하는 “세 가지 문화계통”으로 나눈다. 최남선은 “이 아세아의 세 가지 문화계통 가운데 그 북방을 점하는 문화에 직접 又는 계속적으로 거처온 고대의 諸民衆을 가령 여기에 東方古民族이라고 칭하기로 함을 아러주기를 바라는 바”라고 전체연구회에서 발언한다. 최남선이 ‘亞細亞의 문화계통’을 이처럼 세 갈래로 분류하는 입장은, 이미 1922년의 󰡔조선역사통속강화개제‘로부터 1925년의 󰡔불함문화론“ 등을 통해서도 표명되어온 바 있다. 최남선은 「東方 古民族의 神聖觀念에 對하여」를 통해 세 번째의 “이 문화권 내에 속하는 東方古代의 諸民族은 그 정신생활의 指標로 하여 여하한 表象을 有하여 있는가”를 고찰하려고 한다. 즉 최남선은 “아세아의 북방문화, 특히 고대의 더욱 精神方面의 그것을 고찰”하고, 그것을 “그 時代人의 觀念(意識)을 具象化한 유일의 遺物”인 언어를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언어에서의 “原始語形”, 그 중에서도 “확실하고 낡은 地名은 부대사실의 음미, 문헌적 고증의 가능”과 “神聖觀念이란 등의 普遍性의 것을 고찰”하는데 중요하다는 것이다. 또 “지리적 현상 중에 가장 常住不變인 것은 산악이며 더구나 原始文化에 있어 통트러서 산악은 중대한 신앙대상이였든 만큼 만일 어떤 지역에서의 대표적인 산악에 옛것인 확실한 명칭이 殘在하여 있다면 此種의 연구에 대하여 어떻게나 소중한 인연이 될 바임은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신앙의 대상이던 산악의 古名을 硏討함은 즉 그 信仰實體의 핵심에 ‘메스’를 넣는 所以”라고 최남선은 말한다. 나아가 최남선은

동방의 세계에서 地形歷史 내지 實際信仰 등 방면으로 보면 가장 대표적인 靈山은 만주에서 말한 長白山, 조선에서 말하는 白頭山이외다. 천하에 명산이 多하다하나 장백산과 같이 千歲一貫, 각 민족에 의하여 서로서로 절대한 尊崇을 모히고 있는 산악은 아마 유례를 보지 못했다 할 것입니다. 印度人의 ‘히마라야’든가 ‘이스라엘人’의 ‘시내’라고 하듯이 一民族의 것이 아니고 실로 동방 全 민족의 보편적 존재인 것이 장백산인 것이외다. 古來 幾多의 민족이 이 산에 成育되였으며 幾多의 국가가 이 산을 基軸으로 勃興하였던 것인데 이 모든 인민이나 나라는 한가지로 이 산을 성스러운 ‘미오야’라 하여(滿洲源流考 14, 山川), 근대에 興한 女眞民族의 金이며, 淸朝에서는 支那流로 이 산에 封冊을 행하여 興國靈應의 王이라던가 開天宏聖의 帝라던가의 훌륭한 칭호를 奉하고 있습니다(金史祭祀志其他)

고 단정하며, “鮮滿 양 민족”을 비롯한 “동방 全 민족의 보편적 존재”로서의 長白山의 의의에 대해 논한다. 나아가 최남선은 “山海經 이래의 不咸山은 太白山, 즉 지금의 長白山”임을 “滿鐵의 滿洲歷史地理에서 稻葉, 箭內兩博士” 등을 거론해가며 자설의 정당성을 주장한다. 최남선은 또

사실 이 山이 썩 뒤에 後代의 淸이나 金 등의 왕조에 의하여 국가나 민족의 發足點이 되어 있는 것은 일반에 주지되여 있는 바와 같은데 이 경향은 고대일수록 더욱 요구되어 있음은 상상키에 어렵지 안습니다. 사실 동방세계에서의 最古한 建國神話인 檀君의 古傳은 그의 중심무대를 太白山에 取하여 있습니다.(중략) 현재의 건국신화라고 전하여 있는 가장 낡은 書冊에는 같은 白의 字가 白이 아니고 伯의 字로 되어 있는 것을 말씀하여 두려 합니다.

라고 하며, “太白山이 어떻게 神聖, 위대한 聖地, 靈場”인가를 재차 강조한다. 최남선은 이 “不咸山에서 白山, 太白山 내지 長白山, 朝鮮에서 말하는 白頭山에 移變하여온 경로”는 언어의 “비교연구적 방법”으로 증명하려고 한다. 여기에서 ‘불함문화’의 중심지가 백두산이라는 󰡔불함문화론󰡕에서의 최남선의 설은, 1939년의 「東方 古民族의 神聖觀念에 對하여」에서도 연속적으로 주장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東方 古民族의 神聖觀念에 對하여」에서의 이러한 최남선의 논지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결말을 맺고 있다.

不咸文化의 내용을 짓고 있는 바의 色色의 表象, 그 정신적 源泉인 神聖觀念은 원악부터 多數히 있어서 이러한 일을 順順히 설명하는 데서만 이 文化圈의 윤곽이 점점 분명히 떠올라 오는 터인데 지금은 그 틈을 가지지 않었습니다. 더욱 不咸文化圈의 支柱的 존재로써 日本古典에 連繋을 가지지 않으면 어쩐지 畵龍點䝼을 缺한 感이 있으나 이것은 他日에 돌리려고 합니다. 이제야 만주국은 東亞 新文化建設의 前衛로서 世界史上에 빛나는 출발을 하여 내었으며 그리하여 일본은 정치철학의 根本義인 協和主義가 인류발전, 동양해방 우에 異常한 創造力을 示現하려 하여 당당히 무대에 서 있습니 다. 이 聖스러운 사업이 역사적 근거와 사상적 萌芽를 부여하여 주는 東亞공통의 ‘마음의 고향’ 이 과거無限의 옛날부터 훌륭히 존재하여 있는 일의 일단을 顧함은 유쾌하기 짝이 없습니다. 빛을 바라며 欣求, 精進不止하는 우리 祖先에 다시 더 한번 崇敬의 誠을 올리려 합니다.

이 문장은 앞서 논한 문맥과 결부시켜볼 때 해석이 용이하지 않다. 그렇다고 하여 만주국 수립 및 “협화주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최남선의 위의 입장은, 2장에서 살펴본 최남선의 중일전쟁관과 비쳐볼 때, 일본제국의 정치적 프로파간다를 단순히 타의적으로 수용하면서 문장을 수식하고 있는 차원으로만 보기 어렵다. 더구나 최남선이 ‘만주국’의 싱크 탱크인 건국대학硏究院에서 硏究員으로 강연하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최남선은 “東方 古民族의 神聖觀念”을 통해 드러나는 “동아공통의 ‘마음의 고향’”의 역사적 존재를 통해, 만주국 건국과 협화주의라는 “ 聖스러운 사업”의 “역사적 근거와 사상적 萌芽”를 이 논고를 통해 밝히려 하는 것이다. 이처럼 1925년 󰡔불함문화론󰡕에서의 “아시아의 정신적 支柱”의 추구는, 1939년의 시기에는 ‘동아’라는 “정치적 지역개념” 아래, 일본제국의 레토릭인 “동아신문화건설” “협화주의” “동양해방”이라는 언어적 편제 속에서 새롭게 전개되어 나간다.

4. ‘만몽문화’는 존재하는가?

4. 1. '滿蒙文化'―‘만몽(滿蒙)문화의 성립’의 담론

최남선은 실제로 건국대학에서 한학기만 강의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그 강의안이 󰡔만몽문화󰡕이다. 이 󰡔만몽문화󰡕는 식민지 시기의 그의 학문이 집대성된 텍스트임에도 불구하고, 건국대학 시절의 저작이라는 점에서 그다지 연구자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그러나 이 󰡔만몽문화󰡕는 만주국 건국과 중일전쟁의 전개라는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불함문화론󰡕의 논지가 확대 적용되면서 일정한 결말을 내리는 텍스트라는 점에서 이의 분석은 중요하다고 하겠다. 최남선이 이 강의를 통해 말하고자 했던 점은 다음과 같이 강의의 시작에 변에 잘 드러난다.

이제부터 잠시 동안 滿蒙文化에 관하여 여러분과 함께 硏鑽을 쌓아올리고자 한다. 특히 ‘여러분과 함께’라고 말하는 것은 ’滿蒙文化의 硏究‘라는 것이 아직도 資料 蒐集, 아니 오히려 그 모색의 시기에 놓여 있어, 어설프게나마 하나의 체계를 이룰 정도까지 성숙되지 못하고 있다. 이에 관한 전문적으로 종합된 저술도 거의 눈에 뜨지 않거니와 약간 있는 것이라고는 지역적으로 만주라든가 東 蒙古에 한정되어 있는가 하면, 내용에 있어서 언어학적 고고학적인 것의 그 어느 한쪽에 치우쳐 있어, 막바로 만몽문화의 종합적 고찰에 참고될 만한 것은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런데도 만주국 또는 본 대학에서는 여러 가지의 의미에 있어서 만몽문화의 체계적 연구는 매우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菲才 淺學의 몸으로 감히 이에 당치 아니함은 말할 나위도 없으나, 다만 悠悠今古幾萬年, 茫茫東西幾千里에 걸친 일대 영역에서 특이한 인문 발전의 발자취를 찾아, 그것으로써 道義國家의 새로운 문화건설에 얼마만큼이나마 이바지하려고 함은 學人으로서 흔쾌한 일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만주의 協和國에서는 역사적 諸민족이 현실적 구성분자로 되어 있어, 시간과 공간이 한 덩어리가 되어 있는 듯하며, 현재 본 대학에 있어서는 이른바 五族-더구나 그 배후에 과거의 온갖 전통을 이어받고 있는 諸분자-이 마음을 같이하고 어깨를 나란히 하여 똑 같은 영광을 누리려 하 고 있다. 만몽문화의 연구 및 그 건립을 위하여 최상의 조건이 갖추어져 있는 셈이다. 가르친다 배운다 하는 테두리를 뛰어넘어 서로서로 다 같이 이 영예로운 의무에 마음껏 협동․합작의 정성을 바쳐 보지 않겠는가.

최남선의 <만몽문화>라는 강의는, 아직도 ‘자료 수집' 내지는 ‘모색의 시기'에 있어 ‘하나의 체계’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만몽문화의 종합적 관찰” 혹은 “만몽문화의 체계적 연구”를 목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이 문장에서 알 수 있다. 또 이는 “悠悠今古幾萬年, 茫茫東西幾千里에 걸친 일대 영역에서 특이한 인문 발전의 발자취를 찾아, 그것으로써 道義國家의 새로운 문화건설”을 추구하려는 것을 목표로 한다. 즉 이러한 “만몽문화의 연구 및 그 건립”은 만주국과 만주건국대학에서는 중요한 연구대상인 것이다. 이를 위해 최남선은 우선 ‘滿蒙’이라는 용어의 고찰로부터 그의 논의를 시작한다. 이 용어의 고찰이 중요한 것은 ‘만몽’이 중국에서 흔히 일컫는 ‘동북’지방으로 규정하는가, 아니면 역사적ㆍ지역적으로 하나의 독자성을 견지해 온 문화권으로 인식하느냐의 여부 때문이다. ‘만몽'을 하나의 독자적인 문화권으로 인식하는 것은 ‘만주국' 건국의 당위성을 제공하는 논리가 되기도 한다. 최남선은 중국의 입장을 대표하는 학자로서 󰡔東北史綱󰡕을 쓴 傅斯年을, 후자의 입장을 대표하는 학자로서 󰡔現代支那論󰡕과 󰡔滿洲國歷史󰡕의 저자인 야노 진이치(矢野仁一)를 든다. 최남선은 야노와 마찬가지로 ‘만몽’ 지역지나 本位의 칭호․立名"을 부정하는 입장에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나아가 최남선은 "만주 건국과 함께 만주와 몽고의 要部가 하나로 합쳐져서, 국가로서의 만주는 바로 몽고까지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는 오늘날에 있어서는, ‘만몽’이란 말이 이미 역사의 저편에 止揚되어 가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여기서 말하는 ‘만몽문화’란 것도 기실은 단순히 ‘만주문화’라고 칭하여도 좋지 않을까"라고 단정한다. 또 최남선은 “문화에 관해서는 철학 쪽에서 여러 가지로 까다롭게 말하고 있으나, 事實에 따라 관찰하여 가는 사학․인류학․민속학 등에 그런 귀찮은 穿鑿은 필요치 않다. 우리들쪽에서는 문화란 인간의 生活樣式(Life-mode)이라고 한다"라고 하여, 당시 일본과 식민지 조선의 역사철학자들을 중심으로 활발히 논의되고 있었던 ‘문화담론'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견해를 나타낸다. 그러면서 최남선은 다음과 같이 ‘만몽’ 지역으로서의 ‘만몽’ 지역의 문화사적 시선에 착목하고 있다.

이처럼 생활양식이 공통한 민중의 주거지를 生活圈(Life cycle)이라 하고, 이 생활권 내에 있어서 는 개인의 활동은 대충 共同樣式에 합치되어 버리는 것이 원칙이라는 것을 C. Wissler교수는 설명하고 있다. 생활권에는 크고 작은 허다한 層段이 있는 법인데, 滿蒙의 지역과 같은 것은 광범위에 걸친 일대 생활권으로서 오히려 典型的인 것이다.

최남선은 이러한 ‘만몽의 지역’에서의 ‘생활양식’을 명확히 하는 것, 즉 아래와 같은 “학문적 약속"으로서의 ‘만몽문화’의 학문적 담론을 전개하고자 한다.

최남선은 이러한 ‘만몽의 지역’에서의 ‘생활양식’을 명확히 하는 것, 즉 아래와 같은 “학문적 약속"으로서의 ‘만몽문화’의 학문적 담론을 전개하고자 한다.

대체로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지역을 무대로 하여, 前述한 민족만이 上下 幾千年에 걸쳐서 특이하고도 공통성이 풍부한 一 系列의 생활양식을 전개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들이 새로운 흥미를 일으키려 하는 소위 滿蒙文化란 것은 그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다만 土耳其系는 지역 및 역사적 관계로 말미암아 자연히 테두리 밖에 놓여지기 쉽게 되거나, 몽고일지라도 만주 가까이 있는 것이 主가 된 것은 오늘날 부득이한 일이라 하겠다 (중략) 만몽지역은 면적이 넓고 연대가 오래인 데다가 종족 관계는 복잡․紛錯을 극하고 있는데 비해서, 그 문화-즉 생활양식에는 보편성이 많고 또 상호의 연결이 매우 밀접하다는 것은, 이른바 만몽 문화가 단순한 지역적 편의에 의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학문적 약속에 놓여져 있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이다. 新國家 만주가 그 빛나는 문화적 사명을 옛 전통에 돌이켜 생각한다는 것은 의미심장함이 있다고 하겠다.

 

최남선은 여기서 ‘만몽문화’가 “그 문화-즉 생활양식에는 보편성이 많고 또 상호의 연결이 매우 밀접하다는 것은, 이른바 만몽 문화가 단순한 지역적 편의에 의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학문적 약속에 놓여져 있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이다"고 논한다. 이른바 “신 국가 만주" 건국의 의의가 이 지역의 “옛 전통"을 되살리는 “문화적 사명"을 달성하는데 있음을 강조한다. 여기에는 ‘문화사’적 시선에 의해 정치․군사적 국가로서의 ‘만주국’ 수립의 근거를 뒷받침하려는 최남선 담론의 한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4. 2. ‘제국의 레토릭’으로서의 ‘大陸神道'라는 담론

최남선은 󰡔만몽문화󰡕의 <대륙에 있어서의 古神道>라는 강의에서 ‘大陸神道'론을 전개한다. 최남선에 있어서 ‘신도'라는 용어는 원래 󰡔조선역사통속강화개제󰡕에서부터 보이기 시작하여, 1925년에 탈고한 󰡔불함문화론󰡕에는 중국의 ‘神仙道'와 일본의 ‘隨神道'와의 대비 관계 속에서, ‘朝鮮神道'라는 용어를 적극적으로 사용한다. 나아가 1936년에 발표된 「朝鮮の固有信仰に就て」(『朝鮮』第250号, 朝鮮総督府, 1936年 3月)에는 ‘朝鮮神道'를 ‘古神道'라는 용어와 혼용하여 쓰고 있다. 이 용어는 ‘일본神道'에 비해 ‘朝鮮神道'가 더 유래가 깊다는 것을 제시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도입한 수사라고 추측된다. 최남선은 이 논고에서 또 만주국 건국과 더불어 “만주건국의 신”을 제사지내는 “만주神社”가 조성된 것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최남선은 「朝鮮文化當面の問題」(󰡔재만(在滿)조선인통신󰡕제22/23호, 흥아(興亞)협회, 1937. 3)에서도 그러한 취지의 발언을 재차 반복한다. 이처럼 최남선의 ‘신도' 담론은 만주국 건국을 계기로 하여 만주를 포괄하는 광범위한 지역으로 확대 적용되어 가면서, 마침내 󰡔만몽문화󰡕의 단계에 와서는 ‘大陸神道' 개념으로까지 발전되고 있는 것이다. 이 ‘大陸神道'의 신앙체계를 가지고 있는 지역은 「東方 古民族의 神聖觀念에 對하여」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불함문화권'과 동일한 지역에 해당된다. 따라서 이 <대륙에 있어서의 古神道> 담론의 전개를 추적하는 일은, 1922년의 󰡔조선역사통속강화개제󰡕에서의 최남선의 학문적 조감도가 󰡔불함문화론󰡕 등을 거쳐 1941년의 󰡔만몽문화󰡕로 결실을 맺게 되는 일련의 과정에 관한 고찰이자, 1920년대와 1930ㆍ40년대 시기의 학문적 연속성을 엿볼 수 있는 바로메타가 된다. 물론 최남선의 ‘만몽'관련 저술은 만주국 수립과 중일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다수 발표되고 있고, 이러한 동아시아에서의 중대 사건들이 그의 ‘(古)신도'론을 확대 적용하게 된 배경이 되고 있음은 재삼 강조를 필요치 않는다. 최남선은 이 <대륙에 있어서의 古神道>라는 강의를 통해, 세간의 여러 학자들에 의해 ‘동북아시아의 고유종교'로 일컬어 온 샤머니즘(薩滿敎)를, 다음과 같이 ‘古神道'의 개념으로 바꿔 칭하기를 제안하는 것이다.

샤먼敎는 滿蒙을 중심으로 하는 대륙의 한편에 옛날부터 뿌리를 뻗쳐 鬱然히 숲을 이룬 一大 信仰體이다. (중략) 민족과 더불어 존재하고 역사와 함께 진행하는 이 자연의 大道는, 세간의 종교학자에 雷同하여 경박하게 샤머니즘이라고 아무렇게나 불러 버릴 것이 아니라, 가장 좋은 의미에서의 古神道로서 크게 고쳐 보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들은 한걸음 더 나아가서 대륙의 역사에 神道 本然의 모습을 규명해 보도록 하자.

우리들은 이러한 견지에서 만몽계의 역사적 종교를 가볍게 샤머니즘이라고 처리해 버리는 것을 피하고 단적으로 大陸 神道란 이름을 내걸고자 하는 것이다. 대륙의 생활 환경에 의해서 자연히 발생하고 대륙 생활의 경험 누적에 의해서 저절로 발전하여, 天理에 따르며 神旨를 받드는 것을 本旨로 하는 이 신앙은 그 자체가 神道였던 것이다. 만약 이 대륙의 신도를 일본의 신도와 대조하여 생각할 때 信條나 행사, 또는 표현의 語形 등에 너무나도 이상한 일치를 발견한다는 것은 크게 주의를 요하는 점이다. 이를테면 더러움을 싫어하고 청결함을 숭상하는 것, 말 많은 것을 싫어하고 밝은 마음을 기본으로 하는 것, 일본의 신도에 있어서의 太占․注連․神籬․磐境 등이 그대로 대륙 각지에서 보인다는 것, 몽고의 ‘오보’, 조선의 ‘업’(業), 일본의 ‘우부스나’(産生)가 의미도 어형 도 일치하고, 조선의 ‘탈’과 일본의 ‘다다리’, 조선의 ‘풀이’와 일본의 ‘하라이’ 등이 내용도 말도 동일하다는 것 등 헤아릴 수 없는 정도이지만, 이것들은 문제로서 장래의 천명을 기하기로 하자.

최남선은 이처럼 “만몽계의 역사적 종교를 가볍게 샤머니즘이라고 처리”하는 것을 부정하고 ‘大陸神道'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를 종용한다. ‘대륙신도'로서의 이 지역의 신앙적 유대를 꾀하는 최남선의 관점은 이 같은 신앙적 요소들을 내재하고 있는 이 지역의 ‘건국신화'와 그것의 공통성에 착목하여 간다.

대체로 동북세계의 제 민족이 가진 건국설화란 것은 본시 하나의 母型이 있어서 그것이 隨時․隨 所로 계승되어 시대적․지역적인 새로운 요소가 보태져서 약간의 특색을 지닌 제각기의 설화로 분화한 것에 불과하다. 이것들을 한데 모아서 그 특수 요소를 빼어 없애버리고 공통점을 꺼내 본다면, 제일 옛 原型으로 환원시킴이 어느 정도 가능하리라. 이렇게 해서 본 동북세계의 건국신화의 골자란 것은 선악 두 원리의 對立界인 우주에서, 天인 善神의 보호 없이는 인간의 행복은 보장되지 아니한다. 그 처음에 악의 세력이 굉장히 퍼져서 인간생활이 일대 위기에 놓여 있을 때, 천상의 선신이 잘 이를 내려다보시고 사랑하는 一子를 救濟神으로서 下界에 巡遣하시어 악의 원리를 驅逐하고 광명과 안락의 세계로 되돌려 주셨다. 이것이 天族이며 신의 후예인 우리들 인간세계의 국가 건립의 동기 및 經路로서, 그를 미래에 價値 전환시킨다면 국가의 목적으로도 되는 셈이다. 이와 같이 하여 동북세계의 제 민족은 한결같이 神國의 인민으로서 이른바 天業의 恢弘에 이바지할 사명을 짊어지고 있다는 것이 그들의 신화에 나타난 국가이념이었던 것이다. 이 정신을 醇化하고 이 理想을 확장해 간다면, 일본의 건국정신인 이른바 光宅天下라든가 八紘一宇의 大理想에 도 달할 수 있음은 당연한 이치이며, 따라서 우리 만주의 건국정신도 본연의 모습을 쉽사리 체득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들은 감히 이렇게 부르짖고 싶다. 새 理想에 살기 위하여 옛 전통을 잡으라. 그 第一捷徑으로서 신화로 돌아가라고. 지극히 소중한 이십세기의 신화는 그 총명과 眞摯性을 과거의 그것에서 배워 마땅하리라고 통절히 느끼는 바이다.

나아가 최남선은 이 지역에 공통된 건국설화에 나타나는 모습이 “우리들 인간세계의 국가 건립의 동기 및 經路로서, 그를 미래에 가치 전환시킨다면 국가의 목적으로도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한

이와 같이 하여 동북세계의 제 민족은 한결같이 神國의 인민으로서 이른바 天業의 恢弘에 이바지할 사명을 짊어지고 있다는 것이 그들의 신화에 나타난 국가이념이었던 것이다. 이 정신을 醇化하고 이 理想을 확장해 간다면, 일본의 건국정신인 이른바 光宅天下라든가 八紘一宇의 大理想에 도달할 수 있음은 당연한 이치이며......

라고 언급하고 있듯이, 최남선은 “그들의 신화에 나타난 국가이념”이 순화되고 또 그 이상을 확장해나간 형태가 이른바 일본의 건국정신인 “光宅天下라든가 八紘一宇의 大理想”이고 현재의 일본제국도 이러한 理想을 추구해나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아울러 “만주의 건국정신”이란 것도 이 지역의 “본연의 모습”을 “체득”함으로써 正道를 얻을 수 있다고 최남선은 피력한다. 그것을 최남선은 “새 理想에 살기 위하여 옛 전통을 잡으라. 그 第一捷徑으로서 신화로 돌아가라고. 지극히 소중한 이십세기의 신화는 그 총명과 眞摯性을 과거의 그것에서 배워 마땅하리라고 통절히 느끼는 바이다"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최남선은 일본제국의 進路도 이 같은 “悠久ㆍ無限한 역사를 만들어 가는 생명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완성을 指向하여 묵묵히 運移하여 가는 정신생활의 行進 過程”이 되어야 함을 희망한다. 그것이 무리한 人工을 가하지 않는 “자연의 大道”임을, 최남선은 “건국설화”라는 ‘始原의 프리즘'을 통해 응시하는 것이다.

4. 3. ‘만몽'에 있어서의 ‘문화유형'의 진행

최남선은 그러나 ‘만몽문화’란 “문화권(Kulturkreis)”내지는 “文化類型(Kulturtypus)”은, 그것이 하나의 형태를 갖춘 “구조체”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완성을 향하여 진행 중에 있다고 말한다.

어떤 민족의 환경이란 공간적으로는 지리와, 시간적으로는 역사와의 교차점 위에 이루어진다. 환경으로부터 문화가 발생한다는 것은 말하자면 지리에 誘導되는 동시에 역사에도 제약되어 하나의 문화가 육성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조건을 같이하고 있는 범위 내에서는 同質․同型의 문화가 존재하고, 이 문화적 연대관계를 계통적으로 보아 문화권(Kulturkreis)이라고 하고 형태적으로 보아 문화유형(Kulturtypus)이라 한다. 문화권 또는 문화유형은 한개의 구조체이므로, 중심도 있고 주변도 있으며 더 나아가서 第二次 第三次性의 그것이 있고, 그리고 그들 사이에 여러 가지의 작용이 행하여진다. 특히 문화적 類緣이 종족 또는 사회와 일치를 겸하는 경우에는 중심과 주변 사이에 感應 牽引 흡수 융합의 작용이 한층 더 활발하기도 하고 용이하기도 하다는 점에 여기서 주의하고자 한다. 만몽이 하나의 문화권 또는 문화유형에 속하고, 게다가 종족․언어 등의 계통을 같이하고 있음은 여러 논점에서 증명할 수 있는 바이나, 지금 여기서는 일반적 흥미의 대상이 될 만한 약간의 사항을 드러내어 대체의 설명으로 충당하고자 한다. 우선 지리적 조건에 誘導되었다고 인정될 類型적 현상에 눈을 돌리기로 하자.

최남선은 또 이러한 “文化類型(Kulturtypus)”은 지리적 환경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역사적 관계, 즉 “민족과 민족 사이의 교통ㆍ혼인ㆍ전쟁 등에 의한 접촉"에 의해서도 형성된다고 한다. 특히 “혼인에 속하는 예로서 고려와 몽고와의 관계"를 든다.

이처럼 “만몽의 文化類型의 進行을 개관”하면서, “한층 더 넓은 범위에서 많은 사실을 망라하여 그 성립의 계통, 전파의 경로 등을 상세히 조사 규명”하려는 것을 미래의 복안으로 하는 최남선의 ‘만몽문화론’의 작업은 무엇으로 귀결되고 있는가? 1941년 6월 20일에 끝나는 「滿蒙文化」강의에서, 최남선은 다음과 같은 종강의 변을 토로한다.

오늘날 아직도 통속적 의미 밖에 안 되는 ‘만몽문화’란 것이 학술적 근거 위에 훌륭하게 세워지 고, 이른바 生活協同體는 急造된 이념이 아니라 역사적 本來性의 것이었음을 알게될 것이다. 이 것을 규명하는 것이야말로, 滿洲國의 學徒로서의 우리들의 영광스러운 임무이며, 이것을 완성함으 로써만 民族協和에 事實的 迫力이 가해질 것이다. 그리고 넓은 同情과 깊은 이해와 올바른 처리 에 의해서만 민족문화의 고찰을 할 수 있음을 此際에 다시 한번 강조해 두고자 한다.

임성모가 지적하는 것처럼, 만주국의 ‘국민' 창출은 기치로서만 존재했을 뿐 결코 완성된 것은 아니었다. 최남선이 생각하는 ‘만몽문화'도 그것이 형태를 갖춘 존재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완성을 향하여 진행 중에 있다. 그러나 최남선은 ‘만몽문화'는 그것의 ‘성립의 담론(discourse of origin)'을 통해 그 “학술적 근거"를 마련하고, 이를 통해 ‘五族'의 “生活協同體는 急造된 이념이 아니라 역사적 本來性의 것"을 명백히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民族協和에 事實的 迫力"을 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최남선은 강조하는 것이다.

4. 4. '만몽문화'론의 이후

최남선이 만주국 건국의 의의에 대해 논한 글은, 앞에서도 언급한 「朝鮮の固有信仰に就て」「朝鮮文化当面の問題」에서, 주로 ‘신도'론과 관계하여 산발적으로 보일 뿐이다. 최남선이 만주국 건국의 의의를 본격적으로 논하고 있는 것은, 오히려 1943년에 ‘만주건국대학교수' 직함으로 󰡔新時代󰡕(신시대사 발행)에 발표된 「滿洲 建國의 歷史的 由來」(󰡔新時代󰡕제3권 제3호, 1943년 3월, 󰡔新時代󰡕는 1941년에 창간)에서다. 1941년 11월에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戰線이 동남아지역으로 확대된 ‘총력전' 시기에 이 글이 발표된 것은 흥미있는 일이다. 필자가 입수한 자료(서강대학교 로욜라도서관 전자도서)에는 항목 <8>의 끝부분과 결론에 해당하는 항목<9>의 내용이 낙장 파손되어 있다. 따라서 이 부분은 <현암사본> 󰡔육당전집󰡕의 것에 의존할 수밖에 없으나, 여기에는 편집과정에서 의도적으로 누락시킨 것으로 보이는 공란이 많다. 그러나 1937년의 「동방민족의 중원(中原)진출과 역사상으로 본 아세아제(諸)민족의 동향」과 「北支の歴史的特殊性」(上)ㆍ(下), 1939년의 「전쟁과 교육」, 그리고 1943년의 「滿洲略史」(󰡔半島史話와 樂土滿洲󰡕) 등의 내용과 연관시켜 볼 때, 어떠한 어휘들이 누락되어 있는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최남선은 이 논고 도입부에서 만주국이 수립되어 10년이 경과된 시기를 맞이한 소감을 다음과 같이 피력한다.

만주 건국이 이미 10년이라 하면 혹시 역사의 悠久性에 비추어서 그까짓 동안이 얼마란 말이냐 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만주국의 건립이 세계 역사를 고쳐 쓰는 동기가 되어서 旋乾 轉坤의 대풍운이 뒤를 이어 發作하고, 그 끝이 마침내 대동아전쟁이라는 一大 舞臺를 湧現케 한 과정을 살필 진대, 爾來의 10년이란 실상 인류역사의 全 과정에도 필적할 만한 중요성이 있다고 하여도 그다지 어그러지는 말이 아닐 듯하다. 시간의 가치가 蓂葉의 多少에 있을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다시 한번 벅득여 생각할 것 같으면, 만주 건국이 표면의 실현을 보인 것은 10년 전의 일이라 할지라도, 그리 될 약속으로 말하면 아득한 옛날부터 잠복하여 나오는 것으로서, 드러난 10년의 배후에 숨은 累千年이 있음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이 기회에 눈을 한번 덜미로 돌려 보자.

최남선은 만몽지역에서 민주국이 성립될 수 밖에 없는 역사적 당위성, 즉 “역사적 유래"라는 “事後의 역사적인 해석적" 작업을 이 시기에 새삼스럽게 행하고 있다. 여기에는 「동방민족의 중원(中原)진출과 역사상으로 본 아세아제(諸)민족의 동향」과 「北支の歴史的特殊性」(上)ㆍ(下)에서도 논의된 바 있는, “東洋史上에 있는 남북 항쟁"과 ‘북방(만주ㆍ몽고)'지역에 대한 ‘동방민족' 진출의 역사적 전개를 논하는 최남선 ‘특유'의 역사관이 드러나고 있다. 최남선은 만주와 中原에의 ‘동방민족' 진출의 최후의 단계로서, 현재의 일본 ‘제국주의'의 진출을 들고 있다. 그 일본이란 다름 아닌 “북방선수로의 역사적 □□과 동방 대표로의 시대적 □□"을 동시에 수행하는 존재인 것이다. 최남선은 “이 최후의 단계에 있어서는 그 경략방법이 舊來처럼 영토적 야심이나, 민족적 蹂躪에 의하지 아니하고, 어디까지고 道義本位ㆍ解放主義를 취하는 것이 前에 보지 못한 특색을 짓고 있다"고 단정한다. 나아가 최남선은 이 “북방선수" 혹은 “동방 대표"로서의 일본에 의한 만주국 건국은 “이미 약속이요 운명인 바에, 누가 좋다거니 싫다거니, 또 당장에는 아프거니 쓰리거니를 묻지 않고, 엄연한 사실이 特爾한 위력으로써 그대로 진행할 것뿐이다"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제국주의적 침탈과 전쟁의 현실을 외면하면서, 그것을 “事後의 역사적인 해석"적 饒舌에 가득찬 특권적 知로 倒置하는 ‘지식인' 최남선의 전형적인 모습이 보인다.

俄羅斯(露西亞)가 북방의 새 걱정이 되어 步一步 淸의 死命으로 制하였다. 이것은 東洋史上에 있 는 남북 항쟁이 새로운 형태를 가지는 동시에, 동서의 균이라는 새 조건이 십자로 교차하게 된 신국면이다. 여기 남북 항쟁線上에 있어서 최후로 남겨 놓은 純 東方系의 役者인 일본이 동시에 동서 충돌의 국면에서 아세아 □□의 유일한 選手란 소임을 兼帶하고서, 가장 □나게 역사 진행의 무대 정면에 나타나는 계기가 있다. 일본은 먼저 日淸전쟁으로써 역사적 선수의 실력을 보이고, 日淸전쟁으로써 東方選手로의 西勢 배격에 성공하였거니와, 아직도 北方選手로서의 남방 경략이 남아 있었다. 이 동안 到滿 興漢의 旗幟하에 淸朝를 엎지르고 三民主義의 黨治하에 국권 회수열을 부채질하는 중국이 마지막 만주의 한복판에서 일본의 생명선이라 하는 바에 팔뚝을 내어 편 것은 실상 보이지 않는 운명의 손에 덜미를 짚여서 한 일이었다. 여하간 북방선수로의 역사적 □□과 동방 대표로의 시대적 □□를 한꺼번에 수행할 시기를 기다리던 일본이 이때를 놓치지 않고 奮然 히 일어나서, 여기 王道樂土로의 만주 新國이 서슴없이 건설되었다. 그리하고서 그 의의를 擴充하고 가치를 완성하려 하매, 다음 지나사변이 뒤를 잇고, 마침내 대동아전쟁이 동양은 무론이요, 전세계의 역사를 고쳐 쓰는 태세를 昭示하지 아니치 못하게 되었다. 이것이 現下까지의 역사적 추세 로서, 北ㆍ東北ㆍ東의 全一적 結成인 大北方勢力이 바야흐로 구원한 약속을 철저히 現成하려는 第五단계에 들어간 것이다. 그런데 이 최후의 단계에 있어서는 그 경략방법이 舊來처럼 영토적 야심이나, 민족적 蹂躪에 의하지 아니하고, 어디까지고 道義本位ㆍ解放主義를 취하는 것이 前에 보지 못한 특색을 짓고 있다. 이 主義의 완전한 具現은 물론 상당한 시간을 요할 것이지마 는, 이러한 綱領의 표방만 하여도 이미 選手의 □□정신을 누구나 □□치 아니치 못할 것이다. 그리고 북방세력의 남방 制限이라는 종래의 약속이 문득 飛躍 문득 翻轉하여, 대동아의 해방과 도의 세계의 □□을 목표로 하게 된 것은 진실로 世紀의 □□가 아니고 무엇이랴. 만주 건국의 현실적 사정이라든지 건국 이후의 발전과정이라든지, 여기서 아는 체 하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만주 건국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볼진대, 그것이 결코 일국 일시의 야심이나 고의로서 나온 것이 아니라, 실상 숙명적 일대 의무가 가장 유능한 국가를 말미암아서 실행된 것이니라 함을 우리가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이미 약속이요 운명인 바에, 누가 좋다거니 싫다거니, 또 당장에는 아프거니 쓰 리거니를 묻지 않고, 엄연한 사실이 特爾한 위력으로써 그대로 진행할 것뿐이다. 이 위대한 사업은 아직도 진행하는 도중에 있으니까, 거기 대한 평론은 太早計에 속할 것이어니와, 다만 이 대사명을 옳게 成遂하고 못함이 홀로 그 담당자뿐 아니라 이 시대의 영욕이리라 하는 것만은 시방도 넉넉히 단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할새 □□한 사명에 욕이 되지 않고, 아울러 이 시대에 오점이 찍히지 않도록 언제고 반성하고 척려(惕慮)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최고 윤리니라 하는 것도 거리낌없이 □言할 것이다.

5. ‘친일문제’로부터 ‘제국의식’의 문제로

최남선의 󰡔만몽문화󰡕는 역사적ㆍ문화사적인 긴 시간적 시야에서 만주국 성립의 당위성을 부여하려 했던 텍스트였다. 최남선이 일본제국주의에 의한 만주국 건국과 중국에의 침략전쟁에 대해 무비판으로 일관했던 것은, 그가 제국주의에 굴복했거나 동조하였던 때문인가? 아니면 ‘지나(타자로서의 중국)'를 경쟁상대로 하는 최남선 자신에 내재하는 ‘제국의식'의 발로였던가? 분명한 것은, 한국에서의 ‘친일파' 비판을 둘러싼 논의에는 최남선을 비롯한 식민지 조선 지식인들의 중국관과 ‘제국의식' 및 그 상관관계를 묻지 않는다는 점이다. 식민지 지식인이 ‘공유'한 ‘제국의식'이나 파시즘은, 단지 일본제국주의에 ‘동의'했거나 편승하는 것만으로 성립되지는 않는다. 최남선은 만주국 수립 및 중일전쟁과 같은 일본제국의 침략노선에 대해서 비판적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 역사적 당위성을 주장하는 글들을 끊임없이 발표하였다. 최남선 자신은 이 글들에서 중국에 대한 끝없는 ‘제국의식'과 파시즘 논리의 개진을 주저하지 않았다. 여기에는 ‘민족의 原鄕'으로서의 ‘만주'에 향한 ‘우리들의 제국의식'이 배경이 되고 있다고 해도 좋다. 그것은 신기욱이 논한 것처럼, 최남선을 비롯한 식민지 지식인들이 공유하였던 ‘에스닉 내셔널리즘(ethnic nationalism)의 또 다른 표현일지 모른다. 그것은 또한 ‘친일파' 최남선 개인에게만 한정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오늘날의 우리들의 자화상일지 모른다. 중국의 ‘동북공정'을 비판하는 현재 우리들의 역사전쟁은, 최남선의 󰡔만몽문화󰡕 작업과 맞닿아 있는 점은 없는지 이 지점에서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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