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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관계의 가설을 뒤집다…‘전복적 해석학’
한미관계의 가설을 뒤집다…‘전복적 해석학’
  • 최형익
  • 승인 2023.03.30 08: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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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말하다_『불승인주의: 미국의 동아시아 외교정책과 한반도문제』 최형익 지음 | 진인진 | 512쪽

미국 외교정책의 백년지대계 ‘문호개방원칙’
윌슨주의의 이중 적용…유럽은 중립, 일본은 항복

미국이라는 나라는 우리에게 과연 어떤 존재일까? 그런데 이 점을 좀 더 올바르고 사실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미국에게 우리는 무엇인가’로 문제의식을 바꿔 살펴보는 것이다. 이를 통해 그동안 보이지 않던, 혹은 가리어져 있던 한미관계의 속살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 글은 1871년 조선과 미국이 전쟁을 통해 첫 조우한 이래, 한 세기 이상의 한미관계를 미국의 외교관념과 대외인식, 그리고 동아시아 외교정책의 틀 속에서 재해석하는 데 목적이 있다.

 

‘문호개방원칙’과 ‘불승인주의’는 20세기 시작부터 지금까지 미국의 한반도·동아시아 대외정책을 떠받쳐온 양대 지주였다. 문호개방원칙은 미국 외교정책의 백년지대계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국제주의 외교문법 수립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윌슨 대통령이 표방한 국제주의의 기원 역시 문호개방원칙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 가운데 미국 동아시아정책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가 스팀슨독트린으로 잘 알려진 ‘불승인주의’이다. 

스팀슨독트린은 일본의 후견 아래 건설된 만주국을 괴뢰정부로 간주해 승인하지 않을 것임을 천명한 외교원칙으로 처음으로 등장했다. 이때도 미국이 내세운 불승인의 핵심 기준은 만주국 수립이 문호개방원칙을 위반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결국, 한 세기 이상 지속된 미국의 동아시아와 한반도문제에 대한 접근법은 윌슨식 국제주의와 문호개방원칙, 그리고 불승인주의 등 세 가지 주요 외교원칙의 조합과 변주에서 발견할 수 있다. 

 

이오지마전투(유황도). 사진=로젠탈
1945년 12월 신탁통치 반대 운동(Anti-Trusteeship_Campaign)의 모습이다. 사진=최형익

불승인주의의 적용은 대단히 이중적이었다. 스팀슨독트린을 공표한 1932년 당시, 정작 미국에서는 고립주의와 중립외교가 절정을 이뤘다. 미국은 유럽에는 중립노선을 적용하여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군을 모두 철수시켰다. 하지만 아시아는 예외였다. 아시아에서는 윌슨주의가 살아남아 스팀슨독트린으로 부활했고, 태평양전쟁 시기에는 ‘무조건 항복론’으로 이어졌다.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트루먼 대통령이 일본에 내건 ‘무조건 항복론’은 만주에서의 일본의 군사·외교적 결정뿐만 아니라 메이지 헌법 체제 하에서 행해진 일체의 정치행위를 부정하는 형태, 곧 ‘일본제국 자체의 불승인’으로 이어졌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을 앞장서 승인한 나라가 미국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는 식의 윌슨주의에 내재한 이중 기준의 적용이었다. 또한 그런 만큼 놀라운 사태의 반전이기도 했다. 

한반도문제가 다시 미국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무조건 항복론’에 따른 일제에 대한 불승인주의의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미국의 이러한 입장 변화가 「카이로 선언」(1943) 말미에 “한국인들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란 문구가 담기게 된 대표적 이유라 할 수 있다. 미국의 대일본정책의 급격한 반전은 식민지 조선에게는 당연히 자주적 독립국가 건설이라는 기회의 창을 제공했다.

미국의 외교정책은 한반도문제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왔다. 특히, 해방 직후에는 한반도의 운명에 결정적 열쇠를 쥔 나라로 여겨져 왔다. 그런데 놀랍게도 정작 미국은 개항 이래 지금껏 한반도에 한정해서 유의미한 정책을 수립한 적이 없다. 해방 직후 한반도문제의 해결책으로 미국이 제시한 ‘신탁통치안’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한반도정책은 미국 외교에서 미미한 비중을 차지했을 뿐이다. 그럴 때조차 중국과 일본을 우선하는 동아시아 정책의 일부로 취급하거나 종속변수였을 따름이다.

 

중국 분할을 풍자한 그림이다. 사진=최형익

미국의 외교정책은 한반도문제와 결합하거나 아니면 분리되는 식으로, 일련의 마주침과 헤어짐의 과정을 겪어왔다. 상식적으로는 미국의 외교정책과 한반도정책의 일치, 곧 미국의 강한 개입이 한반도문제 해결에 우호적 상황을 만들어줄 것이라 기대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반드시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데 역사적 반전의 묘미가 숨겨져 있다. 이 점에서 이 책의 숨겨진 의도는 기존 한미관계 가설을 상당 부분 뒤집는 ‘전복적 해석학’에 속한다.

 

미군정이 실시되던 모습이다. 사진=최형익
미군모병 포스터. 이미지=최형익

이 책은 미국 외교정책의 변천 속에서 동아시아, 한반도문제를 이해하는 것이 핵심이다. 종래 대부분의 연구는 한반도문제를 중심으로 미국의 외교정책을 논의했지만, 반대로 이 연구는 미국 외교정책의 주요 특징을 고찰하는 가운데 한반도문제를 살펴본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미국의 외교정책사는 기존 유럽 나라들과는 결이 다른 정치 문법을 채택해온 역사이기 때문이다. 외교정책 상의 변형과 변주, 애매모호함에도 불구하고 일관되게 흐르는 미국 외교정책의 내적 핵심과 독특한 문법이 있다는 게 이 글의 핵심 주장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미국과 동아시아, 미국과 한반도 관계의 역동적 변화상을 보다 잘 이해하고 들여다 볼 수 있다고 판단한다.

 

 

 

최형익
한신대 글로벌인재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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